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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자를 좇지 말라 (잠 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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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를 좇지 말라(잠 1:1-19)-박조준 목사

우리가 그 동안 5년 7개월에 걸쳐서 신약 성경의 복음서를 생각하며 기도하여 왔습니다. 차례대로 하면 사도행전을 공부해야겠지만 신약 성경만 다루는 감이 있어서 복음서를 끝냄과 동시에 구약 성경의 잠언을 강해 하려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책들을 분류해서 복음서, 공동서신, 목회서신, 계시서 등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 성경에도 율법서 혹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서, 지혜서, 예언서 등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부터 생각하려고 하는 잠언은 말하자면 히브리 문학에서 지혜 문학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첫 부분에도 잠언이 어떠한 책인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2절 이하를 보세요.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물론 세상적인 지혜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 지식, 명철, 훈계, 공평, 정직, 모략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만 한마디 지혜라는 말씀에 다 포함시킬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지혜입니다. 지식 많은 사람이 지혜가 있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대학을 졸업한 전문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지혜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많이 배워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르므로 잘못된 일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지식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느니보다는 지식이 적더라도 지혜있는 사람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인의 지혜라는 것은 그 관념과 방법에 있어서 서양인의 철학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즉 서양인의 관념이 추상적인데 반해서 히브리인의 관념은 인간 생활의 복잡한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7절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지혜 문학에 속하는 욥기도 인간의 모든 위대한 발견과 채굴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28장 12절-13절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하면서 28절에 가서는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습니다.

전도서에도 비슷한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장 13절에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모든 일의 결국 즉 결론이 이러합니다. 12장 13-14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하였습니다.

랑게(Lange)가 말한 것처럼 “히브리 철학의 본질은 사색적인 것보다는 실천적입니다. 그것은 일반 세속 철학으로 자명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일의 원인을 연구하려 하지 않으리만큼 진정한 사색을 일삼거나 장려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신적인 철학이기 때문에 그 발을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를 두고, 그 몸을 하나님의 율법의 영원한 원리 위에 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참된 지혜는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인간의 재능만으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혜를 얻기 위해 힘써야 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그리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지혜는 인자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장로는 일찍이 우리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어려서 왕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을 때 기브온에 가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 날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 그때 솔로몬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였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구하였습니다.

이 때 솔로몬의 간구가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烈王)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약속하신 대로 사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극치의 부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는 한 나라의 왕인 통치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학자에게나 기업인에게나 의사나 교사나 공장 기술자나 상인이나 농부나 학생이나 가정주부나 군인이나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잠언 8장 15절에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하였습니다.

주님의 사업은 하는 데로 지혜가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31장 3절에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하였습니다. 농부가 논밭을 갈고 적재적소에 씨를 뿌리는 데도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사야 28장 24절에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여...” 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큰 일이든 적은 일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니면 바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무식한 사람이 10년 동안 교회에 잘 다니면 대학 졸업한 사람보다 나은 지혜를 얻게 된다”고요. 퍽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이번 삼일 기도회 시간마다 이 지혜의 말씀 잠언을 생각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많이 나오셔서 이 패역한 시대에서 참 삶의 지혜를 다 얻으셔서 승리하는 생활, 전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잠언은 어떤 이야기의 계속이 아니라, 한절 한절이 어떤 때는 내용의 연결이 전혀 없는 다른 뜻의 말씀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의 목적은 경험없는 젊은이를 교훈하여 지식을 증진시키며, 지식 있는 사람에겐 지식을 더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는 모략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이제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오늘 본문을 상고해 보십시다. 1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다윗왕은 일평생을 통해서 천신만고를 겪은 사람이므로 주로 그의 글은 경건하고 신앙적인 것이었지만 솔로몬은 안정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대개가 교훈적인 책을 썼습니다. 물론 잠언 전체가 솔로몬의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솔로몬이 쓴 잠언입니다. 솔로몬은 이 방면에 특별한 자질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되어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요긴한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잠언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전절과 후절의 연관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제목을 붙인다면 “포악한 일에 유혹 당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1절에서 7절은 잠언서의 표제와 목적을 기록했습니다. 지혜로 젊은이를 교육하고 지식있는 사람의 지혜를 더하게 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여기 지혜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하크마(Hakma)로 잠언의 열쇠가 되는 말로서 전 교훈의 기초가 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훈계라는 히브리어는 무달(modal)인데 훈련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없이 자란 사람은 동물적인 본능과 정열만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전에 유대교 랍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약한 사람은 자신의 충동의 지배하에 있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충동을 제어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충동만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실 사람이라기 보다는 짐승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듣지 아니할 때 자동차는 무엇이나 받아 피차에 파멸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도 매 한가지입니다. 자신의 충동을 제어하는 훈련이 부족해서 그냥 내달리다가 부딪치고 쓰러지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이 잠언은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한다’고 하였는데 어리석은 자란 히브리어 페타임(Phetaim)은 ‘마음이 넓게 열린 사람’이란 의미가 있는데 선한 것에나 악한 것에 감화되기 쉬우므로 미아가 되지 아니하도록 바른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영적인 견지에서 볼 때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어린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잘 자라나야 합니다. 좋은 지도자 밑에서 바로 훈련을 받아 바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되어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어른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미혹받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른이 되면 사탕 몇알 준다고 무턱대고 따라 다니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본문대로 의와 공평과 정직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28절에 보면 솔로몬은 남에게 이 진리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실행하였습니다.

더구나 지혜있는 사람은 항상 미련한 자와 무식한 사람들 보다 배우기를 더 좋아합니다. 잠언 9장 9절에 “지혜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 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리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 이젠 배울 것이 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말하자면 잠언 전체 교훈의 열쇠라고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에 13번이나 쓰여진 말씀이요, 구약 다른 책에도 여러 번 적혀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명철한 생활과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열쇠인데 미련한 사람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2장 13절에 보면 르호보암이 원로들의 지혜로운 충고를 듣지 아니하다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2장 25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8절-19절의 말씀은 죄에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오늘 우리 젊은 사람들이 부모의 훈계를 얼마나 귀담아 듣습니까? 시대차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귓등으로 넘기고 듣지 아니합니까? 에베소 6장에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했는데 순종이란 말은 들을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단 말입니다. 과연 우리 젊은이에게 이런 마음의 자세가 마련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10절-19절의 말씀은 실제적인 권면과 교훈입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쫓지 말라.” 성경 중에는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망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창세기 3장 6절:아담의 범죄, 사사기 16장:삼손, 열왕기상 13장:여호사밧 참조).

반대로 요셉같은 사람은 금령을 잘 순종해서 복받았습니다(시편 1편에서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였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모든 선지자, 예수님의 제자, 모든 성도들에게도! 기쁠 때는 기쁨을 통해서, 슬플 때는 슬픔을 통해서, 한가한 때는 한가한 것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할 것입니다. 시험은 밖에서 오고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시험될 만한 것은 아예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멀리 하노라고 하지만 마귀는 갑자기 우리를 시험합니다. 이때는 소위 전격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죄와 협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부지런하며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시험에 들 시간조차 없도록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면 됩니다(에디슨:“시험에 못들어 봤냐고? 시험에 들 시간이 있어야지!”) 그렇습니다. 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내가 맡은 책임만 충성되게 감당하노라고 애쓰면 시험들 사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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