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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길을 걷습니까? (잠 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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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나 여자나 학생이나 군인이나 청년이나 노년이나 그 누구나 다 쉬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하루, 이틀, 한달, 두달, 1년, 2년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길을 가야하고 또 어느 길을 하나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걸어갔고 지금도 걷고 있지만 결국은 길은 많지 아니하고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는 좁은 길 즉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길 즉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길을 걷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지마는 그 길의 결국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결국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의 마지막이 어디에 이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 보시기에 어리석어 보이고, 고생스러워 보이고, 고난을 자처하는 것 같은 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쉬워 보이고, 평안해 보이고 지혜 있어 보이는 길, 넓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좁아 보이고, 힘들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그 길의 필경은 생명과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사실 바른 길 생명의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적은 데서부터 큰 데까지 우리 스스로 선택한 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따라서 선택의 자유가 있음과 아울러 선택한 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길을 걷든 저 길을 걷든 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도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바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시면 우리는 그대로 살고 책임도 하나님이 지시면 될 것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도 하시는 것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그것도 다른 과실보다 먹음직하게 만들어 놓고는 따먹지 말라 하고 따먹으면 죽는다고 까지 해서 인간에게 호기심을 잔뜩 발동시켜 놔서 결국 죄를 짓게 하셨을까? 아예 에덴 동산 안에 선악과는 없고 생명 과실만 있었다면 인류의 조상이 범죄할 기회도 없고, 따라서 이런 귀찮은 수속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아니, 하나님은 선악과 만들어 놓으시고는 이것을 또 시험하시고, 나중에 따먹어 범죄 하니까 법을 가르치고, 종래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시고, 십자가에 지게 하시어서 가슴 아픈 일을 당하시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실 알 수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할 때 우주 만물 가운데도 가장 귀하게 창조하셨어요. 왜 귀해요? (생긴 것이 귀하게 생겼어요? 아름답게 생겼다구요? 아름답기야 꽃이 더 아름답지요. 무엇이 귀해요? 빠르기로는 짐승보다 못합니다. 힘으로 해도 소나 말보다도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귀하다고 그래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그럽니다.

요사이 기계가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현대를 소위 컴퓨터의 시대라고 하지 아니합니까? 컴퓨터는 전에 하던 일의 몇 백배, 몇 천배 신속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될 때가 있어요. 언제 잘못돼요? 컴퓨터 안에 넣는 재료를 잘 못 넣으면 답이 엉뚱하게 나옵니다. 가령 요사이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무를 컴퓨터로 합니다. 심지어 중매도 컴퓨터가 합니다. 카드에 해당하는 난을 다 기록해서 집어넣으면 자기가 가장 원하는데 가까운 상대가 나옵니다. 그러면 전화 번호와 이름을 가지고 만나서 교제해 보고 좋으면 결혼을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위 결혼 상담소가 도시에 있어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만 컴퓨터도 어떤 때는 아주 엉뚱하게 잘못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써넣는 사람이 정직하게 기록을 하지 아니할 때 그런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나이를 틀리게 적는다든지, 몸무게를 다르게 한다든지, 무엇이나 그대로 하니 아니할 때 기계가 정확해서 사람에게는 틀리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어요? 기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요. 기계에는 자유가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유의사가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귀한 것입니다. 짐승도 그렇습니다. 짐승에는 본능 외에 양심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책임 질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짐승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형무소에 가두어 두는 것 보았습니까? 아니요. 왜냐하면 짐승은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물론 짐승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 신명기 30장 15절에서 20절까지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앞에 놓고 이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15절:“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절: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절: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절: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절: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절: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여호수아도 여호수아 24장 14절에서 15절에 이스라엘 만족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고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예레미야21장 8절에도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사실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이 아니면 사망의 길, 이 두길 밖에는 없습니다. 좁은 길이 아니면 넓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바른 길, 좁은 길, 생명의 길을 택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 보기에 바른 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 보기에 바른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국 사망의 길인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말씀한 그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이 달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바보스러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보세요! 청년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그 마음 속에는 고민이 생겼을 것입니다. 내가 어느 편을 택할 까? 육신의 소욕을 따를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까? 육신을 따르자니 그의 신앙 양심이 허락치를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육신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바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고생문이 환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청년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인간적 견지에서는 바르게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하나님께서 바르게 보신다면 그 길을 따라 걸은 것입니다. 가시밭 길, 험한 길,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필경은 승리한 것입니다.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큰 일을 하려고 하여도 보통 이상의 고를 맛보았고 그러므로 보통 이상의 소득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 의의 있는 길, 값있는 길은 좁은 길이요 힘든 길이요 가시밭길입니다. 값있고 귀한 것은 무엇이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유크릴이 그의 기하학을 완성하여 가지고 애굽왕 어전에서 강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강의를 듣고 있던 왕은 유크릴에게 “여보게, 그거 참 훌륭한 이론인데 좀 더 쉽게 배우는 법은 없는가?”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유크릴이 왕에게 대답하기를 “대왕이시여! 배움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부자도, 권세자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왕이라고 쉽게 배우는 것이 아니요, 돈이 있다고 사는 것도 아니요, 권세로 빼앗는 것도 아닙니다. 힘들지만, 괴롭지만 이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그저 쉽게 생각하고 나서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 부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좁은 길, 험한 길, 힘든 길을 걸어가면 사람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좁은 길은 힘든 길입니다. 훈련의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활은 한 번만 아니요 하루만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출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심한 그리고 규칙적인 훈련을 합니까? 먹는 것을 조심합니다. 마시는 것 조심합니다. 피곤하다고 마음대로 쉬지 못하고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훈련하라 하였습니다. 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하였습니다. 훈련 없이 승리와 성공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훈련은 한 번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한 것을 또 하고 또 하고 어떻게 시켜도 할 수 있게 몸에 배도록 반복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그리스도로 우리 몸에 가득 차게 해야 합니다. 누가 말한 것처럼 꿈속에서도 주님을 찾아야지 딴소리하면 안됩니다. 흉측한 말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이 좁은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걸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바른길, 생명의 길을 걸으려면, 좁은 길을 걸으려면 무거운 죄의 짐, 얽매이기 쉬운 짐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생명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못 걸어갈 길은 아닙니다. 여러분! 죄의 짐을 벗어버렸습니까? 회개의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어려워서 그저 넓은 길, 쉬운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전에 콘스탄틴 대왕이 기독교 박해령을 중지하고 그때 로마 천지에 예수 믿는 것을 장려했기 때문에 왕이 권장하니까 자연히 국민들이 일시에 수천 명씩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된 것을 기독교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바로 그 때가 기독교가 교회 역사상에 가장 타락한 때였다고 역사가들은 평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아니한 사람은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회개의 좁은 문은 죄의 짐을 벗고 혼자서 걸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좁은 길은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역경에 처하여 고난과 싸우며 지켜 나갈 그 신앙이 순수하고 귀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여 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오늘처럼 교회의 수가 늘어가고 교인의 수도 늘어나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교회는 내부적 부패의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경계를 소홀히 할 때 양에서는 성공할는지 모르나 질에서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복의 길입니까? 화의 길입니까? 생명의 길입니까? 사망의 길입니까? 나 스스로 생각해서 내가 가는 길이 바르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바른 길을 걸어갑시다.

잠언 16장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 26장 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앞에 드러나리라”

잠언 28장 26절에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잠언 12장 15절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여러분! 미련한 자 되지 맙시다. 내가 가는 길이 꼭 바르다고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 비추어서 권고를 들을 줄 아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됩시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꼭 생각한 후에 택해야 합니다. 이 길의 마지막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들어서야 합니다. 이 길의 결국이 생명이라면 괴롭고 험해도, 바보스러워 보여도 걷기를 시작해야 합니다(잠언 7장 6절에서 27절의 어리석은 자의 길과 사망의 길을 참고하십시오).

청년 시절은 인생의 분기점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길을 택했습니까? 생의 옳은 방향을 정했습니까? 보기에는 좁은 길이지만 실상은 넓은 길을 걷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오늘 저녁 생명의 길을 택하기로 결단하세요.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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