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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에 주의하는 자 (잠 16: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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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한 좋은 것은 물론 세상적인 것, 보이는 것, 물질 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의 좋은 것은 하늘의 것,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육신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 세상적인 것보다는 하늘의 것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에서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은 세상의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다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대로 하면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도 이 최고의 선을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신령한 축복을 사모하여 나왔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여한 계시록에 보면 ‘복이 있다’는 말씀이 일곱 번 나오는데 그 첫 번째가 요한 계시록 1장 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마지막 장인 22장 7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누가복음 11장 2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는대로 예수님께서 귀한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에 많은 감동을 받고 있던 어떤 여인이 큰 소리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다’ 할 때에 대답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복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마리아 못지 않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31절에도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요한복음 8장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요한 1서 2장 3절에서 6절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후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여러 가지 해야 할 과업을 앞에 놓고 주저하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1장 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은 좋은 것을 얻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어요.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에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음에는 아시아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였으나 성령이 이를 허락지 않아서 비두니아로 가서 전도해 볼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노라고 하룻밤을 거기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날밤 마게도냐인 하나가 나타나서 자기 지방에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고, 생각했던 것을 변경해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같은 마게도냐 지방이면서도 성경에 두세 번 지명으로서밖에 기록되지 않은 이 베뢰아는 무엇으로 유명했습니까? 한가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베뢰아 사람이 신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방면으로 신사적이었습니까? 우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대로 교육받은 사람입니까? 예의바른 사람입니까? 점잖은 사람입니까? 물론 그런 뜻도 전연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신사적이란 말은 영어로 noble 즉 고상하다, 바탕이 좋다는 뜻입니다. 베뢰아 사람의 마음은 그 바탕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굳게 닫힌 마음이 아니라 활짝 열린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길가와 같은 마음, 돌짝밭 같은 마음, 가시덤불 우거진 밭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옥토 같은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도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며칠 전에 부활 주일을 지켰습니다마는 예수님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단시 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믿어 오고 배워 온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그들과 전연 다르게 해석하니 그것이 굉장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말하자면 종교 지도자들이 큰 반발을 일으켜서 논란하고 종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 뿐 아니라 자기들만이 가장 옳다고 하고 독선적인 생각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신사성입니다. 신사적이란 자기 독선에 빠져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큰 약속에 대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태도와 진리에 대하여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를 가리켜 신사적 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관념 때문에, 지식인들이 자기들의 뭐 좀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밖으로부터 오는 객관적인 진리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도덕관이나 지식의 척도로써 모든 것을 판단하고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어리석은 이론이라고 아예 규정지어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 진리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은 비단 도덕가나 지식인 뿐만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도 독선적인 생각에 있는 사람은 이런 잘못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아마 가장 심한 것이 사실은 신앙적인 면으로 독선적인 생각을 가져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전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얻습니다.

그리고 베뢰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태도가 진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날뛰는 소위 광신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그들의 말이 구약의 예언과 부합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여기 ‘상고한다’는 말은 ‘깊이, 자세히, 광범위하게, 정확히’란 뜻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전도한 말씀을 반격하기 위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믿기 위해서, 믿지만 확신을 가지고 믿기 위해서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자세하게, 깊이 성경을 날마다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사적인 성도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인이 다 신사적인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영락 교회 성도 여러분, 신사적 교인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진리에 대한 태도가 진지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금년 우리 교회의 생활 표어가 “배우가 확신한 일에 거하자”고 한 것입니다. 왜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자리가 안 잡히고 부동하는 교인들이 많고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는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런다하면 여기에 오고 저기서 저런다하면 저리로 가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상고하고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달 마지막 주간에 가지려 하는 사경회의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흔히 쓰는 심령 대부흥회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피했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나 자칫하면 말씀 중심보다 감정 흥분에 끝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성경을 상고하므로 우리 심령의 참된 부흥을 도모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금년부터는 성경 공부를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주일 성경공부반에도 많은 분이 참석하고, 청년들이 저녁마다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 학원에도 많은 분이 성경을 배우고, 각 구역의 책임자가 성경을 배워서 각자의 구역에서 믿음의 식구들과 같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합시다. 그런데 혹 어떤 열심 있는 분들은 은혜를 사모해서 아무데나 따라 다니는 예가 있는 모양인데 이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애들 식욕인 생겨서 집에서 주는 음식만으로는 궁금해서 간식이 먹고 싶어서 길거리에서 파는 것 다른 학생들이 둘러서 있으니까 호기심도 나고 해서 여기저기서 막 먹다가는 위험한 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어느 다른 교회에 나가시는 분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요. “목사님, 목사님은 다른 은사 집회에 교인들이 가는 것을 말리시는 모양인데 그럴 것 없어요. 아니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과외 수업하지 않아요. 우리도 말하자면 과외 수업 하는 거예요.” 재미있는 말이에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은혜 받으시는 것 반대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 배우라고 권하는 교회가 성경 배우겠다고 말릴 까닭이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 배우세요. 교회의 교역자의 지도를 받아서 건전한 데서 배우세요. 어떤 분은 교역자 몰래 슬슬 피해 다니는 모양인데 그러지 마세요. 본 교회의 교역자는 여러분의 심령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려고 힘쓰면 힘썼지 손해 시키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역자를 신뢰하시고 지도를 받으시면 과히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바로 잘 자라기를 원하고 힘쓰고 있습니다.

말씀에 주의하는 생활하십시다.

어떻게 하면 말씀에 주의하며 상고할 수 있을까요? “몇 줄만 읽어도 졸리는데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면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이 말씀 읽을 수밖에 없어요. 아직도 말씀의 재미를 모르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부족해서 그래요.

여러분! 이 성경은 예수님의 사진입니다. 다른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이 보아도 우리에겐 예수님이 신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래도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야 신랑이 세상 남자 중에 최고가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사진을 짬짬이 아무리 바빠도 볼 것 아니겠어요?

이 성경은 주님의 편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온 편지를 아무리 바빠도 읽지 않는 아내가 있겠어요? 읽지 않으면 사랑이 떠난거죠. 시편에는 말씀이 꿀송이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주의하는 생활을 합시다. 아내가 남편의 편지를 밤이고 낮이고 시간 날 때마다 펴 읽으면 유혹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 덮어두면 뜻하지 않게 유혹을 받아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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