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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목케 하는 생활 (잠 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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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케 하는 생활(잠 17:1-14)-박조준 목사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리라.” 화목케 하는 생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시편 133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하였어요. 형제가 서로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요! 우리 기독교는 말하자면 화해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로 화평케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먼저는 좌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인간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누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였고, 에베소서 2장 10절에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여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 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고 또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잠언에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성경 구절을 읽어보십시다.

잠언 10장 12절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베드로 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15장 16절에서 18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이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느니라”

잠언 17장 9절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7장 4절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잠언 18장 6절에서 8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여기 남의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입니까? 남의 흉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남의 칭찬이 듣기 좋습니까? 흉보는 것이 듣기 좋습니까? 사람이 타락한 이래로 남의 말의 대부분은 흉보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남의 흉을 보고 헐뜯는 이야기는 별식(別食)과 같아서 구가 기웃해서 흥미있게 듣습니다. 듣기만 합니까? 또는 만나는 사람마다 선전합니다.

전도를 하라면 평생 못하는 사람도 남의 흉을 말하라면 열을 냅니다. 그것도 그대로나 하나요? 눈사람과 같이 하나씩 하나씩 붙는 것이 나중에 가서는 엉뚱한 이야기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이런 억이 돌고 돌다 본인에게 들리면 그 말을 듣는 본인의 마음이 또 평안하겠습니까? 그러니 자연히 불화하게 되지요. 남의 말 될 수 있는대로 그것도 칭찬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20장 3절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잠언 25장 8절에서 10절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잠언 26장 17절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은 자와 같으니라” 같은 장 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그 다음 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2절 말씀은 아까 읽은 18장 8절과 같은 말씀이에요.

그저 한마디로 말하면 서로 화평하게 살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 범죄한 이래 사랑 대신 미움이, 화목 대신 싸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 인간적으로 최초의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어진 골육 상전이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뭐라고 대답한지 아십니까? 아주 반항적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중심의 제사, 믿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인류는 신과 불신의 두 갈래로 나뉘어졌습니다. 신령과 진심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믿음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의 불신앙을 반성하는 대신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보다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그를 쳐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우는 사랑과 협력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사랑 대신 미움으로 아우를 대한 것입니다. 사랑의 보금자리 마음속에 간직할 아우를 미워한 나머지 쳐죽여 들판에 눕혀 두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유명한 마페트 번역에는 “내가 내 아우의 목자입니까?”로 했어요. 옛날에는 목자는 업신여기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이때 가인은 아우의 직업을 천시하고 아직도 자기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그러면 나도 아벨처럼 목자란 말입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이런 못난 아우를 환영하시는 하나님께 반항조로 나왔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 재미있는 대화가 있습니다. 멀리 아버지를 떠나가서 허랑 방탕하다가 다 죽게 되어 거지처럼 되어서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이 너무 귀여워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 그 형이 불평을 하면서 “이(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매...” 하였습니다. 즉 그는 자기의 아우를 아우라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의 답변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하면서 ‘내 아들’이라 하지 않고 ‘네 동생’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큰 아들은 형제 의식을 잃었고 아버지는 그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위로 하나님과 화평하며 옆으로는 이웃과 화목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는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님 말씀 중에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뜻을 받아서 에베소 4장 1절에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도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서로 화평한 가운데 화목하며 살 수 있습니까? 먼저 화평을 가지려면 자신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과 염려, 번민과 내적인 투쟁이 있는 사람이 자연히 다른 사람과 화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사람의 다음은 마치 바닷물이 요동해서 솟구쳐 올라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악인의 마음에는 안정이 없고 평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사회나 단체에서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가만히 보면 그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어서 그럽니다. 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학교에서 소위 문제 학생은 가만히 보면 가정의 부모와의 관계 또는 부모가 서로 화평하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사람 사이에도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끼리 화목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착하게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화평한 일을 좇습니다. 원수를 사랑합니다.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웁니다. 저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나로서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화평의 생활을 하고 화평의 성품을 가지고 화목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목한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힘 쓸 일이 무엇입니까? 소극적으로 싸움 붙이지 않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개의 싸움이 어디서 생깁니까? 이 말에서 나옵니다. 말을 안할 수도 없고 하는데는 조심해야 합니다. 아까 읽은 잠언에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속담에 “불붙는 집에 키질한다”는 말이 있는데 화목 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통 때 평안한 때는 가만 있다가도 무슨 분쟁이 생기면 갑자기 분주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하던 심방도 하고 안하던 지방 순회도 합니다. ‘조무래기 한 놈이 한강물 흐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분쟁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화평한 가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화평한 교회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조심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힘 쓸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써 성령이 하나되게 하여 주신 화평의 매인 줄을 끊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끊지 아니하려고 애씁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국제간에도 언제나 화평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시간을 냅니다. 어디서나 화평을 말합니다. 화평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이렇게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누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요? 사람에게요? 혹시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사람에게는 손해를 받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려고 힘쓰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우리도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면 하나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20세기는 어떤 이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상으로 볼 때 평화 운동의 세기입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신교의 진리를 분명히 새롭게 제시하였습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는 세계 선교 운동의 세기로 온 천하에 가서 땅 끝까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특별히 힘쓴 세기입니다. 20세기는 어떤 세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은즉 어떻게 하든지 믿는 사람과 믿는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화평한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툴 때 아브라함이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 무슨 말했는지 압니까?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부리스 사람이 있어. 유대 사람만은 아니다. 우리가 다투면 가나안 사람과 부리스 사람이 우리를 멸시할거야. 그러니 우리 서로 다투지 마세”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마는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는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 같은 공산당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는 신학자도 필요하고 여러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일 필요한 인물이 누굽니까? 제가 보기에도 화목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가정이 화목하고 교회가 평안하고, 사회가 화평하고, 나라가 화평해야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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