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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 19: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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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장 23절을 읽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신명기 10장 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수아 24장 14절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충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사야 8장 13절에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고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즉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였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래 우리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써 하나님께서 이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때에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다음부터는 인간을 유익하게 해주는 본래의 지경을 지나서 도에 넘치게 되고 또한 그러한 형태가 변해서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도에 지나게 많은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공포심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인간 생활을 해하는 하나의 하나의 감정적인 요소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를 두려워합니다. 흔히 민주 사회에서 여론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지 아니하더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살피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 더구나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한 말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팔아 버린 후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어떻게 했어요? 형들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에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묻혀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는 나이 많은 야곱에게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보더니 ‘내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구나’하면서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해 후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는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애굽의 궁중에서 환하게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간음한 뒤에 자기의 범한 죄를 덮어 버리기 위해서 그 남편 되는 우리아를 모함하였습니다. 우리아를 말하면 다윗의 충신입니다. 비밀문서를 써서 우리아에게 주며 요압 장군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아로 하여금 최일선인 암몬성 가까이에 가서 싸우게 해서 암몬사람의 칼에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왕의 부탁대로 했더니 사실 우리아는 적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손을 대지 아니하고 적의 손을 통해서 죽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아가 일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험악한 죄는 오래가지 아니해서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을 다 보십니다. 사람의 눈은 혹시 피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실 뿐더러 모든 죄를 죄대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귀는 두 가지로 인간을 시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니까 너 아무리 죄를 회개해보라. 그는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아무리 죄를 범해도 벌하시는 분은 아니다”고 유혹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까닭에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 주시지마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형벌을 내리십니다.

금생에도 내리시고 내생에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때로는 양심을 통해서, 때로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때로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3,4대까지 내려가면서 형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무서운 것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범한다고 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보십니다. 그 죄는 그 사람의 뒤를 항상 졸졸 따라 다닙니다. 그러다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씀처럼 요긴한 대목에 가서 꼭 마주칩니다. 그 죄가 꼭 사람을 벌하고야 맙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의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 형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잠깐 실수해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벌할 수가 있겠는가?”고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5장 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 48절에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정 두려워하여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보지 못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죄를 범합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뿐만은 아닙니다. 공기가 보입니까? 전파가 보입니까? 세상에 보이지는 않지마는 실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아니합니까?

히브리서 기자도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꼭 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지으셨습니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감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단에 서서 여러분을 대개 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의 방향, 몸의 자세를 다 봅니다. 누가 재미있게 듣고 계시나, 누가 졸고 계시나 하는 것을 다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것은 제가 여기서 여러분을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병원엘 가면 X-레이 촬영실이 있습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몸의 밖의 부분만 봅니다. 그러나 X-레이를 비치면 이 몸의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뼈가 다 보입니다. 폐나 심장, 위장, 내장들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속마음, 심령의 상태를 다 보십니다. 밖으로는 아무리 웃는 낯으로 말하지마는 속에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레이보다 더 밝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해서 사람이 흠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의 친구 셋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바르게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행해 기도했는데 계속하게 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선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던 그대로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무섭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세요! 그 청년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그들을 책잡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는 여기에다 절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시기하는 바벨론 동관들이 다른 것으로는 흠을 잡을 수 없으니까 그들이 하나님 외에는 무엇에게나 절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것으로 그물을 쳤습니다. 왕이 세운 금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결국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섬기지 아니하는 일이라고 해서 이 세 청년을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노해서 사실을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지마는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인데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실 신이 어떤 신이냐?”고 하였습니다.

이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한 말이 이러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어떻게 이렇게 대왕 앞에서 포로의 신세로 있는 청년들이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정죄할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장래를 위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요? 장래가 분명히 약속되고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란 대심판이요 형벌이기 때문에 이것처럼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항상 조심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청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내가 어찌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으랴?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혹 어떻게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즉시 회개합니다.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때에는 두려운 재판장의 얼굴이 아니요 인자하신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으면 이 두려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변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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