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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깨끗합니까? (잠 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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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깨끗합니까?(잠언 20:1-15)

로마서 3장 22, 23절을 읽읍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축복 속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르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생긴 것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모두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범하는 죄도 가지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육체의 일에 대해서 말하면서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 이라고 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는 말세에 있을 인간들의 범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였습니다.

이사야 3장 16절에는 여자들이 범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21가지 장식품)......’ 하였습니다. 형식과 내용에는 다양성이 있으나 결국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우리 모두가 다르지마는 차별이 없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오늘 저녁 누구나 공통적인 이 사실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1.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지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을 보면 중고등학교 학생도 있고, 대학생, 청년, 의사, 사업가, 대학교수, 가정주부, 각계 각층이 한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만일 제가 어떤 한 부류에 속한 분에게 말씀하신다면 다른 층에 속한 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 직업별로 따지면 수백 종으로 나눌 수 있겠고 지식 면으로 말해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한가지 공통되는 것은 우리가 누구나 예외 없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메시지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저에게는 얼마나 편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살고,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전에 불란서의 나폴레옹은 어떤 설교자에게 “나는 모든 왕들보다도 뛰어난 사람인데 나에게 설교를 하려면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보다는 좀 달라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심령을 구원하는 메시지는 차별이 없습니다. ‘믿으라 그러면 산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다가 그날 밤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가 나타나서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다 풀리게 될 때 옥사장은 죄인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아마 잠을 자던 모양입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것을 느끼면서 자살하려 하는 것을 바울이 불렀습니다. “우리가 도망가지 아니하고 여기에 있소. 당신의 몸을 상하지 마시오.” 이 때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말하기를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이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요’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높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도덕적인 사람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노년이나 청년이나,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장사하는 사람이나 노동하는 사람이나 누구나 차별이 없이 이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이사야가 말씀한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것은 우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전에는 세계에서 제일 높던 집이 미국 뉴욕의 맨하탄에 서 있는 Empire State Building이었습니다. 이 근래 그보다 더 높은 집은 뉴욕의 소위 Wall Street라고 불리우는 세계 상업의 중심지요 은행의 집결지인 Empire State Building보다 좀더 높은 집을 세계 무역 센터라고 해서 쌍둥이 집을 세웠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세계에서 제일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카고 Sears Building 이라고 Sears백화점 주인이 현재로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Building을 지었습니다.

우리 서울 3&8228;1빌딩의 3배가 훨씬 넘는 높은 집입니다. 너무 높아서 바람이 강하게 불면 집의 윗부분이 1.8m 정도는 움직이게 설계를 하였습니다.

전망대가 103층에 있는데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겨우 보입니다. 그저 점이 움직여 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땅에서 사람을 볼 때는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빼빼한 사람, 옷을 잘 입는 사람, 못 입는 사람, 얼굴이 흰 사람, 얼굴이 검은 사람... 여러 가지가 많지만 높은 데서 보면 다 똑 같이 보입니다. 사람의 표준으로 하면 비교적 선한 사람도 있고 좀 더 악한 사람도 있지마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차별이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메시지가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는 메시지의 본질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왜요?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아침 말씀드린 대로 사람은 죄인이라면 저항을 느낍니다.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 앞에서 우리의 죄를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숨기울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양심에 가책을 받고 두려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아래를 가리우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왜요? 무서워서요. 누가 책망해서요? 자기 양심이 괴롭게 해서요. 그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하였습니까? 서로 핑계만 댔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하와 때문에 그렇게 댔다고 하였습니다. 하와는 뱀이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공통적인 성품입니다.

형무소에 가면 물론 죄를 범하지 않고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럽고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 죄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민망한 것은 없습니다. 죄의 병에는 하나님의 수술이 필요합니다. 인간 자신이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혹시 자신이 손과 발을 바꿀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심령을 바꾸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지으신 이 밖에는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벗은 몸으로 선다면 누가 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을 때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인 간치고 사실 이 복음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하는 방법도 똑 같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학자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나 장군이나 병사나 구원얻는 방법이 꼭 같습니다. 세상에서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어떤 특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는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누구나 구원을 얻으려면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기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좁은 문, 좁은 길은 회개의 문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전에 한 번은 미국의 유명한 Billy Sunday가 부흥 집회를 옥외에서 하는데 하늘을 향해 입에 손을 대고 크게 외치는 말이 ‘베드로 선생님! 거기에 장로 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감리교인은? 침례교인은?’ 그 대답이 ‘여기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은 없고 회개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한 사람만이 와 있는 곳이요’ 하였다고 합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단순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의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내가 지금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효력도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똑같은 구원을 받습니다. 혹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같은 사람이야 웬만해서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모든 것에서부터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멸망하지 아니합니다.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세상에서 악을 행한 사람도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더불어 낙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일곱 귀신이 나가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그날 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일곱 귀신이 나가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그날 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가정이 함께 구원받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고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바벨탑의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능가해 보려다가 그 탑이 무너짐과 아울러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갑니다. 어떤 이는 북쪽으로, 어떤 이는 남쪽으로, 다른 이는 동쪽으로 온 지구로 흩어져 갑니다. 하나의 가족이 흩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다시 만나거나 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이 흩어져 갑니다. 이제는 말도 서로 통하지 않게, 다시 만나도 의사가 전달되지 않게 흩어져 갑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그러나 여기 흩어졌던 인간이 다시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식구는 다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오늘 저녁이 나의 생명의 끝날이라면 내 영혼이 분명히 하나님께 올라가게 될 것으로 자신이 있습니까? 자신있는 분 한 번 손을 높이 드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혹 구원받기 원하시는 분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하세요. 그러면 삽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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