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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 2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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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영도자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시편 90편을 읽어보면 거기 모세의 눈에 비친 일생의 일면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시 90:3-6).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사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시편 39편 5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며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를 알지 못하나이다”

옛날 시인들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하였습니다. 시편 8편에 보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내가 보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우주를 보고 우리 인생이란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을 옛 시인도 느꼈습니다.

하물며 이 우주 시대를 당해서 천문학이 발전되어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무변하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우리 20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느낌이 커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옛 글의 말과 같이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알 하나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상 29장 15절에는 사람을 그림자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4장 13절 이하에 보면 우리에게 퍽 교훈적인 말씀을 하였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그 어느 도시로 가서 일년 동안 거기서 지내며 장사하며 이를 남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 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이 연약하고 허무한 존재인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있고, 해일이 있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있고, 무서운 병마가 가득차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내 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 아니 내일까지 갈 것 없고 다음 시간에 어떻게 무슨 일이 생길는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모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알고 산다면 두려워서 못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의 곡식이 잘되었으니 곡간에 가득히 채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니 다른 새 창고를 더 짓고 거기에도 가득하게 곡식을 채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니 다른 새 창고를 더 짓고 거기에도 가득하게 곡식을 채우고 자기 영혼더러 하는 말이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 가신다면 그 쌓아 둔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일까요?

여기에 몇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세속주의적인 향락적 태도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의 문화가 극성할 때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이 있는데 그 가운데 소위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표어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도 지적하는 그대로 “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그 때 헬라의 에피큐리안만이 가진 생각이 아니고 어떤 사회에도 있는데 우리 한국 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처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모기와 하루살이가 밤에 만나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 밤이 늦어서 모기가 하루살이에게 “그럼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내일 또 만나 이야기 합시다.” 그러니까 하루살이가 하는 말이 “내일이 무엇이요?”하더랍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고 죽기 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이외에 내세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세가 무엇이요? 이 세상 이것이 전부지요”하면서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하루살이처럼 육신의 향락을 위해서 즐기려 합니다.

옛날 중국의 양주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대야 100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100년을 사는 사람은 1,000명에 하나도 어려워. 설사 어떤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하자.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년기가 그 반을 차지하니 결국 50년, 또 환난과 질고와 고통을 당하는 기간이 많으니 이것도 모아 놓으면 그 절반은 될 것이니 25년, 그 중에도 잠자는 시간이 거의 반은 될 것이니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해도 결국은 10여년 밖에는 더 못돼. 그러니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죽음이란 것은 생각지도 말고 아예 잊어버려라. 그저 네 귀로, 네 눈으로, 네 코로, 네 입으로, 네 발로, 네 손으로, 네 몸으로 하고 싶은 것 , 즐기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라”하였습니다. 세속주의적, 현세주의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전도서 7장 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와 이것에 유심하리이다”하였습니다. 잠언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이 항상 잔치 집에 있으나 지혜로운 자는 초상집에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둘째로 염세주의적 생활 태도입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생각한 세속주의, 향락주의적 생활 태도와는 정반대 되는 사람들의 생활 자세입니다. 옛날 헬라 시대에 에피큐리안 학파와는 반대가 되는 사상을 가진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스토아 학파입니다. 이 스토아 학파의 사상 중에는 이 염세주의적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이처럼 잠깐이고 허무하니 결국 의미가 없어. 결국 인간 생활이란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할 것이야. 그러니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 생을 구하지 말라. 생을 부정하라. 생을 사랑하지 말라. 그러면 이 세상의 헛된 생에 대해서 속지는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동양의 불교의 사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염세 사상입니다. 생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생 자체가 고통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고통이 있지만 생, 노, 병, 사(生, 老, 病, 死)가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려 하지 말고 생을 도피하라. 생을 부정하라. 가정도 사실 쓸데없어 집에서 나가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라. 그래서 너 자신이 없어지는 무아(無我)지경에 들어가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산에 들어간다고 이 고통이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아까 읽은 성경 말씀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도 인간의 허무함, 무상함, 순간성을 인정하고 가르쳐 줍니다.

요한 1서 2장 15-17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은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 25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영원하도록 있도다.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곧 주의 말씀입니다”하였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이처럼 허무한 면이 있지만 인생을 좀더 깊이 통찰 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인간의 이런 허무성, 순간성은 보이는 면 뿐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기독교의 사상도 세속적인 것보다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이는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면을 봅니다. 사람이란 보이는 면 뿐만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보이는 육신의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늙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밖의 사람 뿐이고 주안에서 새로워질 사람은 겉 사람이 늙을수록 속 사람은 새로워집니다. 보이는 육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영은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이 겉 사람은 아무리 가꿔도 별 수 없이 늙어집니다. 물론 손질을 열심히 잘하면 조금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 있는 부인은 아침 10시에 미장원에 가면 이것저것 다하고 나면 저녁 5시가 된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화장하는 모양이지요. 그 다음날은 무엇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고 금으로 장식하고 옷을 차려입고 하는 겉 단장을 하지 말고 온유하고 정숙한 정신으로 썩지 않는 숨은 속 사람을 단장하시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벧전 3:3-4).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옷맵시도 보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다 하세요. 그러나 거기에 치중하느라고 겉 사람 꾸미노라고 속 사람 단장하지 못하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의 육신이 이렇게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시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다시 말하면 육신을 쓰고 있는 기간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작정됩니다. 영생과 멸망이 이 육신 쓰고 있는 동안에 작정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너희는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죄를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너희 하나님은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우리에게 외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 생활이 비록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잠깐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행하여 기대하시는 뜻이 각각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동안 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찾고, 내 사명을 알아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네 사는 날이 많지 못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광음을 아껴서 열심히 네 맡은 사명을 다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릅니까? 1978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우리 경험대로 보면 오늘 만났던 사람 그 다음날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면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와 함께 예배드린 분이 다음 주일 아침 예배에는 예배당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 계실 분이 안 계신다고 누가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말은 퍽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한 번만 이 세상을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이 지나가는 도중에 친절을 베풀 일이나 누구를 도와줄 일이 있다면 그것을 절대로 연기하지 않고 등한히 하지도 않고 즉시 행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길을 다시 통과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 엘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 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일하고 사는 것은 내일 죽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서반아 옛날 격언에 “차차 한다는 길은 도무지 못한다는 집에 인도하는 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내일 우리가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국 격언에는 “연기는 시간의 도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고 사람의 욕심이 제일 많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모양입니다.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을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

여러분, 우리 가운데 나이가 점점 많아져가므로 내 육체 쇠약해 진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이제는 내 힘 의지하지 마시고 믿음의 돛을 달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세요. 육신의 눈 점점 어두워지면서 신령한 눈이 더욱 밝아져서 하늘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맙시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돈 있다고, 권세 있다고, 건강하다고 자랑하지 맙시다. 내일 일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 오늘 최선을 다 합시다. 주께서 ‘잘했다’ 칭찬하게 말입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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