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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 (잠 2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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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잠언 27:15-27)

이미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오늘 저녁은 잠언 27장 23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본문 23절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옛날 유목민 시대에는 일반적인 유대사람의 생업은 농사와 목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재산을 평가할 때도 요사이 같으면 몇 백만원, 몇 천만원 혹은 몇십억원이라고 하지만 그 때는 돈으로 계산한 것이 아니고 짐승의 머리수로 하였습니다.

가령 구약이 욥기를 보세요. 우스 땅의 욥이란 사람은 동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이름을 들었는데 “그의 소유는 양이 7,000이요, 약대가 3,000이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이며...”(욥기 1:3) 하였습니다.

양이나 그 밖의 짐승은 소유물인 동시에 생업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양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소떼에 마음들 두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종사하고 있는 생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에 게을리 하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이 일은 한 번 밖에 못사는 나의 생에 최선을 다해 일하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이 매사에 짜증만 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자가가 맡은 일에 사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약 아가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가서 1:5-6)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맡은 일에 그저 감사하고 감격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이런 일을 맡겨 주셨을까?”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내게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께서는 나를 신실하게 보셔서 이 임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나는 사실 신실하지 못한데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보셔서 이런 일을 맡겨 주셨구나’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맡아서 일하든지 마음 속에 감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맡은 일이 잘못되어서 이렇게 맡게 된 것으로 오해하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무슨 기쁨이란 것은 있을 수 없으려니와 자연히 하는 일에 보람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서 일을 하기는 하니까 일도 제대로 되지 않고 어디서나 문제만 일으키는 소위 trouble maker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18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코퍼우렌 경은 성바울 대사원을 건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원의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데 하루는 돌을 다듬는 일을 수백 명이 하고 있는데 우렌 경이 평복을 갈아입고 현장에 나가 보았습니다. 석공들은 똑 같이 돌 깎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을 돌아보신 중에 한 석공에게 우렌 경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묻는 사람의 얼굴은 쳐다볼 생각도 안하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섯자 길이 석자 폭의 돌이나 깎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하더랍니다. 또 다른 곳으로 가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석공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때 그 석공은 아니꼽다는 눈치로 우렌 경을 힐끈 쳐다보더니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이 짓이지요”하며 투덜대더랍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한 곳으로 가서 같은 일을 하는 석공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때 그 석공은 하던 일을 잠깐 멈추며 웃는 낯으로 낯모를 신사 우렌 경을 바라보면서 “선생님께서 보시는대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우렌 경의 지휘 밑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 나라의 자랑인 장엄한 성 바울 대사원을 건축하는데 한 몫을 맡아 지난 2년 남짓 여기서 돌 다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는 정성스레 하던 일을 다시 계속 하더랍니다.

같은 돌 깎는 일을 하면서도 마음의 자세 여하에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무미건조한 돌 깎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지루한 움직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바른 자세를 가질 때 똑 같은 일을 하지마는 거룩한 대사원의 건립의 값있는 직분을 맡아 감당하는 보람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향하신 기대와 소원이 계셔서 그의 뜻 하시는대로 우리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처지와 환경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나를 그 곳에 보내 주셨다고 믿을 때 거기서 충성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 요셉의 생애를 보세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의 반생은 가혹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려움이 거듭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를 보면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구김살 없이 늠름하고 싱싱한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떤 형편에 이르든지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그 처지와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까닭입니다. 요셉이 그처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생할 때도 일언반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아무런 죄없이 그저 예수님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한 말 “형제들아 내가 만날 일이 오히려 복음 전하는데 진보가 된 줄 아노라 내가 매임을 당한 것은 온 시위대와 그 남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함인 줄 아노라”하면서 그는 옥중에서 고생하는 생활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요, 거기서도 할 일이 있는 것을 믿고 오히려 열심히 전도하면서 많은 결실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도 거기에서 사명을 깨닫고 충성되게 일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양떼나 소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의 일터를 의미합니다. 가령 교역자라면 그가 봉사하는 교회가 곧 그에게 있어서 양떼입니다. 교회 학교 교사라면 그가 맡은 반학생이 양떼입니다. 성가 대원이라면 성가대가 곧 양떼일 것입니다. 구역의 책임자라면 그 구역이 그에게 있어서 양떼입니다. 가정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가정이 곧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 주신 양떼입니다.

무엇이나 우리가 맡은 것 그것이 곧 양떼일 것입니다. 양떼를 맡은 사람은 그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의 밭에는 잡초가 우거질 시간이 없습니다. 틈틈이 뽑아 버리고 돌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항상 그 밭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이 크든지 적든지,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얼마나 그 일에 성실하였습니까? 우리가 맡은 양떼를 얼마나 부지런히 살폈고 우리의 소떼에 마음을 주고 일했습니까?

헬렌 골프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구두를 만드는 화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두를 만드는 화공이 되었습니다. 내게 있어서 한 켤레의 구두를 짓는 것은 하나의 설교와 같이 거룩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나 이런 마음으로 감당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맡은 양떼를 잘 돌보지 못합니까? 불평과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에 얼마나 만족하게 합니까? 오늘 우리의 환경에서 얼마나 행복을 느낍니까? 가령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다른 집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우리 가정만은 불행해’ 이렇게 생각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을 여러분이 행복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부인들께서 남편을 볼 때 어떻게 보세요? “나는 무슨 팔자에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섬기게 되어서 이렇게 사노?”하는 사람은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해서 저렇게 착하고 사랑스럽고 훌륭한 분을 내 남편으로 삼아 주셨지?” 하고 생각하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저런 여자를 아내라고 맞아서 한 번도 재미있게 살지 못하나?” 하고 생각하면 불행할 뿐더러 자기 가정에는 충실하지 못하고 딴 눈 팔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참 감사하지, 세상에 여자가 많지마는 내 아내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라구. 저렇게 알뜰하고 살림 잘하는 아내는 다시 없지”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자기 아내처럼 귀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감사하게 살며 행복하게 사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양떼를 사랑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를 사랑할 때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교역자 입에서도 불평, 불만, 시비가 나옵니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교역자를 사랑할 때 은혜가 되고 신앙 생활하는 희열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을 때 은혜는 떠나고 다툼만 남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하면 이보다 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없으면 허물만 보이고 짜증이 나고 어쩌다 상대방이 감기라도 들면 ‘저러다 죽으면 팔자라도 고치리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지런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앉아서 궁리도 하고 계획도 해야 하지만 일어나서 힘써 일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치고 불행을 느끼거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 일하지 않을 때 여러 가지로 의심도 생기고 불만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일하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지 않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부지런히 읽고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은 조금도 의심이 생기거나 불평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기도도 하지 아니하고 전도도 하지 아니하는 사람치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여름날 풀을 베면 새움이 돋아서 더 신선한 꼴을 얻게 됩니다. 사랑도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넘치게 됩니다. 복음도 다른 사람에게 주면 줄수록 샘 솟듯이 솟아남으로 모자라지 아니합니다. 그냥 주지 아니하고 간수하고 있으면 신선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종래는 썩어지고 맙니다. 생명은 언제나 새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신령한 동산에서 사랑의 꼴을 베어 우리 양무리에게 줍시다. 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주면 줄수록 새롭고 풍성해지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다함없이 솟아나는 생명의 샘에서 생수를 퍼서 목말라 애타 하는 내 양떼에게 마시게 합시다. 그리하면 큰 축복이 임합니다.

본문 26절, 27절을 보세요.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젓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요사이 자연보호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데 재미있는 표어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 보호, 자연은 사람 보호.”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연을 잘 보호해서 잘 가꾸게 되면 자연히 공해로부터 보호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네 양떼의 형편은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고 마음두고 일하면 양떼가 우리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젖을 넉넉히 얻어 음식이 부족함이 없고, 양의 털이 잘 자라서 옷이 될 것이고, 염소는 잘 발육해서 땅값으로 내 놓을 수 있는 재산이 될 것입니다. 양식과 의복이 있고 누구에게든 줄 돈이 있으면 우리의 소유는 족한 셈입니다. 이것이 곧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를 선한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시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되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현세와 내세를 통해 풍성한 생명에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1. 생의 활기를 주십니다.
새 생명을 얻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활기가 있어야 일 할 수 있습니다.

2. 생의 범위를 확장시킵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다른 이를 위해 살게 됩니다.

3. 새 힘을 공급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승리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기고도 남습니다.

5. 기쁨이 넘치게 하십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딴 근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6. 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은혜의 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러합니다.

7. 차고 넘치는 축복입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맡겨진 양떼를 부지런히 살펴서 우리 스스로 넘치는 축복을 받으십니다. 주는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어린 양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또 양이 맡겨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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