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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오면 삽니다. (잠 2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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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면 삽니다.(잠언 28:1-13)

이미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읍시다. “악인은 좇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오늘 저녁 이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죄 지은 사람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전에 없던 감정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면서 즐길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나서 죄를 범한 다음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가 닥쳐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 지은 인간이 숨을 곳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시편 139편 7절 이하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아디로 피하리이까? 네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 앞에서는 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덮어두면 그만인 줄 압니다. 다른 사람의 눈만 가리우면 되는 줄로 압니다. 거짓말 탐지기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태연하게 말하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가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지 영구히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앞을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곧 말라 버려서 수치스러운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 민수기 32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사람이 흔히 죄를 지은 후에 가리우고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리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은 죄가 정녕 우리를 찾아내서 우리가 맞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만나서 대면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이 다 들으셨을 줄 믿습니다. 우리 나라를 특별히 사랑하고 우리 교회를 남달리 아끼는 미국 사람 가운데 밥 피얼스 목사님 여러분 잘 기억하십니다. 그 어른이 우리 한국의 전쟁고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일하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 우리 영락 교회에서 한국 교회로는 제일 먼저 텔레비전 예배를 드리도록 시설을 하였는데 그 시설은 피얼스 목사님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치는 차임벨도 그분의 선물입니다. 이 예배당 증축을 하라고 제일 먼저 만 불을 헌금해 주신 분도 그분이십니다. 요 얼마 전에도 저에게 미국서 일부러 전화를 주시면서 언제 예배당이 준공되느냐 하시며 준공 예배 때는 꼭 참석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 분이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전에 설교를 하시면서 이런 간증을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분이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는 특별히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밥이 조반을 먹을 때는 빵을 굽고 쨈을 발라서 먹는데 자기 식성 같아서는 빵에 쨈을 좀 듬뿍 발라서 달게 해서 먹으면 좋겠는데 어머님께서는 언제나 조그만 그릇에다 겨우 발라먹으리만큼 주시고 좀더 달라면 ‘안돼!’ 하고선 큰 쨈통을 선반에 얹어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밥의 마음에는 “내가 언제 저 쨈을 좀 실컷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게 되었는데 밥더러 ‘너 집 좀 보겠니?’하고 부탁을 합니다.

밥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 듯 대답을 하였습니다. 어머님이 나가시자마자 밥은 부엌으로 갔습니다. 쨈통이 들어 있는 선반에는 손이 닿지를 않아 의자를 놓았습니다. 그래도 안됩니다. 그래서 어머니 침대에 가서 (어머니는 높은 베개를 좋아하셨는데) 그 베개를 고여 놓고 간신히 선반의 문을 열었습니다. 어린 밥은 그 쨈통을 안게 되니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이 좋았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 쨈입니까? 이제는 그 쨈을 마음껏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밥은 숟가락으로 퍼먹을 시간도 없이 아예 잼을 통째로 입에다 대고 한참 동안 먹었습니다. 아마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부를 정도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밥을 배부르게 먹었으면 그런 이상이 없겠는데 달고 단 쨈으로 배를 채워 놓았으니 속이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짓기 전에는 굉장히 좋은 것 같고, 봄직하고, 먹음직하지마는 실상 범하고 나면 생각했던 것 만큼 기쁨이나 만족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돌아오실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전에 같으면 어머니가 어디 가시면 돌아오시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는데 먹지 말라는 쨈을 허락없이 배부르게 먹은 어린 밥에게는 어머니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 뵈올 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의자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어머니 배게도 침대에 갖다 놓고 시트를 매끈하게 덮어놓았습니다. 물론 쨈통도 선반 제자리에 얹고 문을 잘 닫았습니다. 밥이 생각에 이만 했으면 아무런 자국도 나지 않았으니 어머니는 감쪽같이 속이실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래도 이상한 것은 환경은 원상 복귀를 시켜 놓았는데 마음만은 평안하지가 않았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연한 자세를 취해 보려고 군기침까지 하며 있는데 어머니께서 시장에서 돌아오셨습니다. 밥은 사실 어머니가 전에처럼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어머니 지금 다녀오세요!’ 인사는 했지만 힘이 없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태연하게 지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머니가 밥을 불렀습니다.

“밥! 집 잘 봤지?”
“네?”
“너 뭐 잘못한 것은 없지?”
“잘못은 무슨 잘못이요. 저는 집에만 있은 걸요.”
“너, 혹시 쨈 먹은 것은 아니니?”
“아니요, 쨈을 제가 어떻게 먹어요. 어머니 주신 것 외에는 먹은 적이 없어요.”
“밥, 너 거짓말은 아닐테지?”
“거짓말이라니요? 제가 언제 거짓말했어요? 어머니두.”
하면서 오히려 이쪽에서 화를 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래?” 하시면서 거울을 들고 와 딱 잡아떼는 어린 밥의 얼굴 앞에 들이대는데 이때 밥이 자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자빠질 뻔 했다고 합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아까 쨈을 훔쳐먹을 때 의자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베개도 제자리에 놓고 쨈통도 제자리에다 놓았는데, 감쪽같이 정돈해 놓았는데 너무 급히 먹느라고 쨈통에 입을 대고 먹었는데 그 입가에 쨈이 하나 가득 묻은 것을 처리하지 못했었습니다. 요것은 모르고,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거울을 들이대니 숨길 수 있습니까?

피얼스 목사님 말씀이 그때 일이 수십 년 지났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죄라는 것은 범하면 나로서는 가리우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 앞에는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타조가 포수에게 쫓겨가며 도망가다가 정말 힘들고 더 이상 뛸 수 없으면 숨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타조는 몸집은 아주 크지만 그 머리가 아주 작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타조는 숨는데 모래 밭에다 머리만 꼭 파묻는다고 합니다. 물론 몸뚱이는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그러나 타조 생각에는 눈을 가리었으니까 “내가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숨는다면 타조가 모래밭에 머리 박고 숨은 줄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까?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죄가 그 사람을 쫓아오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고 초조와 불안으로 이끕니다. 남의 빚을 지고 도망하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다 빚쟁이로 착각을 일으킵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우리 마음 속에 죄를 품고 있으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은 완전히 사라지고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바싹바싹 타 버립니다. 누가 뭐라지 않아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전에 헬라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주전 5세기 경에 이비커스라고 하는 유명한 시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린도에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어느 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게 되어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물건을 빼앗기고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시인 이비커스는 너무 억울해서 그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학들을 향해서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공중에 나는 너 학들아! 너희는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니 내가 죽은 다음에 이 원수를 꼭 갚아 다오!” 하고 죽었습니다. 이 유명한 시인이 나중에야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으나 누가 어떻게 살해하였는지 도무지 범인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노천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와서 구경을 하는데 그때 마침 이상하게도 학이 몇 마리 떠서 빙빙 돕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사람이 앉은 곳에 가까이까지 오며 빙빙 돕니다. 그때 거기 앉은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 “아,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러 오누나!” 하며 도망을 치더랍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사람을 붙들어서 심문을 했더니 그 사람이 바로 오래 전에 이비커스를 죽인 강도였다고 합니다.

왜 그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까? 남들은 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단 말입니까?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왜요? 그 양심 속에 죄가 쫓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보세요! 죄를 범한 것이 당장에 벌이 내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당대에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를 읽어보면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아주 간사한 사람입니다. 어수룩한 형을 속이고 나중에는 형 에서가 화가 나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니까 겁이 나서 어머니의 지시대로 외삼촌이 계시는 저 멀리 하란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거기서 20년을 사는 동안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재물도 많이 얻어 가지고 이제는 전에 지었던 죄도 다 잊고 살다가 고향에 가서 살고 싶어서 모두를 거느리고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다는 말을 들을 때 야곱은 겁이 나서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밤새껏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왜 형이 마중 나온다는데 겁이 났어요? 야곱에게는 형 에서가 아니라 20년 전에 지었던 죄를 대면하게 되어서 겁이 났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마른 웅덩이에 넣어 죽여 버리려 하다가 애굽에 가는 장사꾼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고 약 30년을 지나는 동안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곡식 사러 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30년만에 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반가운 형제입니까! 그러나 형들은 동생 요셉을 만난 것이 아니고 30년전에 지은 자기들의 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였습니다.

여러분! 죄는 졸졸 따라다니다가 제일 급할 때, 배고플 때 만납니다. 죄라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죄짓고 평안할 수 없습니다. 죄짓고 담대할 수 없습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담대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요셉은 옥중에서도 담대하였습니다. 왜요? 죄가 없어서요.

아무리 학, 박사라고 해도 죄지으면 그 심령은 밤낮 도망 다닙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호령하는 권력가라고 해도 죄 지으면 죄의 종이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하여도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닙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하였습니다. 시편 32편 3, 4절에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죄를 숨기는 동안 끊임없이 마음의 동요에 쫓기고 있었다고 자인하고 있습니다. 환자가 자기 병을 감추고 있는 동안 치료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하반절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죄를 자복하면 “잘못했습니다” 하면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그리고 죄를 버리면 용서해 주십니다. 요한1서 1장 9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거짓말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귀를 기울이고 죄인이 회개하기만 기다리고 계시다가 회개만 하면 얼마든지 용서하여 주십니다.

예레미야 3장 12-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렸도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하십니다. 돌아오면 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이사야 1:18 참조).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오라 하실 때에 불러주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불러주소서 (찬송가 260장 1절)

여러분! 이제라도 돌아오면 삽니다. 주님께서 용서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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