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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라 (잠 28: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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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봉독한 말씀 중에 복되고 잘될 수 있는 사람의 생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고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1. 14절 말씀입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경외는 물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잠언 19장 23절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하였고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왜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살피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까지 보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그 중심을 보노라’고.

더구나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한 말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요셉의 형들의 범한 죄가 감쪽같이 아버지를 속였지만 애굽의 궁중에서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지은 죄도 그렇습니다.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최일선에 내보내서 전사하였습니다.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종래는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하여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을 보시지 못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죄를 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뿐이 아닙니다. 공기도 보입니까? 전파가 보입니까?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사실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하나님)를 보이는 것 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살아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지으셨습니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감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것은 제가 여기서 앉아 계신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 경외하는 생활 그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 대해서 사람이 흠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리오 왕의 사자들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세요!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실 것입니다.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어떻게 청년들이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장래를 위해서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이 있습니다.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장래가 분명히 약속되고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항상 조심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청년 요셉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 악한 일을 행할 수 있느냐?’ 한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혹 어떻게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즉시 숨겨 두지 아니하고 회개합니다 깨끗이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생각한대로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항상’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을 얼마 동안만 경외할 것이 아닙니다. 항상 경외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떠나는 순간 범죄하는 자리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안 죄를 범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리지 맙시다.

2. 본문 25절 하반절을 보세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실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입니다.

어린애가 아버지를 의지할 때 아무리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갓난애가 캄캄한 방에서 잠자다가 깨면 무서워서 웁니다. 그러나 옆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내가 여기 있다. 어서 자자’ 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가슴을 두드려 주면 이 어린애는 엄마가 옆에 있는 것을 알고 엄마를 의지하기 때문에 곧 잠이 듭니다.

시편 23편은 너무 유명한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양과 같은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꼭 의지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구원을 청할 대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이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요셉이 어떻게 그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담대했어요? 다니엘이 어떻게 그처럼,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꼭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 꼭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이 있습니까? 정말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기쁨과 평화와 담력과 용기가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기분으로 하지 맙시다. 기분이란 아침저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 대한 확신도 기분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기분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온전히 믿습니까?

디 엘 무디(D. L. Moody) 선생은 일등차를 탄 사람과 삼등차를 탄 사람을 비교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일등차를 탄 것처럼 평안히 천국에 가고 삼등차를 탄 사람은 천국에 가긴 가는데 결국 죽도록 고생하면서 간다고. 여러분, 이왕이면 일등차 타고 평안히,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하늘 나라 가십시다. 의지하라! 온전히 의지하라!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의지합니까? 믿음은 아는 것만 아닙니다. 이해하는 것만 아닙니다. 인정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의지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내 몸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과 마음, 생의 전체를 주님께 내맡겼습니까? 그런데 왜 걱정합니까? 왜 염려합니까? 왜 밤에 잠이 잘 안오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권면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휘게 하리라.” 큰 염려, 작은 염려 할 것 없이 큰 죄 작은 죄 가릴 것 없이 다 주님께 가지고 나와 맡기십시다.

주님을 의지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풍족합니다. 찬송가 232장을 같이 한 번 부르십니다. (3절까지).

1.죄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나오라
주 말씀 의지할 때에 곧 평안 얻으리
(후렴)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리 구하시리 널 구하시리

2.큰 복락주신 주께서 보혈을 흘렸네
눈같이 희게 할 피에 온 몸을 잠그세

3.길되신 우리 구세주 늘 인도하시네
너 지체말고 믿으면 복 많이 받겠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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