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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과 악인의 차이 (잠 2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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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잠언을 여러 시간에 걸쳐서 계속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마는 잠언에 제목을 붙여 말하려면 “삶의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합니다. 지혜있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혹은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란 말로도 표시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잠언 29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도 ‘의인과 악인’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여기 “목이 곧다”는 말은 본래 소가 그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지 않는 데서부터 온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소를 키워 봤습니다. 풀도 먹이고 꼴도 베어 오고 소등에 올라앉아 타고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는 달구지를 메고 가는 연습을 시키는데 이거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소가 보통 때는 아주 순한 것 같다가도 달구지 멍에를 메우려고 하면 발악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발버둥질 칩니다. 그래도 억지로 메우면 괴로워서 막 뜀박질을 하고 야단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메고 나아갈 때까지 매를 맞고 코가 찢어질 정도로 잡아 다니고 고생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가 달구지 메는 법을 배워 목을 숙일 줄 알면 밭가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엔 곡식이 자란 후에 북돋우기 위해서 후치질을 하는데 곡식밭 고랑을 따라 잘 일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자녀답게 키우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킵니다. 좀 잘못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사랑의 채찍을 가합니다. 그런데 이 채찍을 잘 맞고 주인의 뜻을 알아서 그대로 하면 채찍을 더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을 숙이라는데 숙이지 아니하고 곧은 대로 버티면 가해지는 것은 매 밖에 없습니다. 소가 소구실을 하려면 목을 숙이고 멍에를 바로 메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 못하면 매를 맞습니다. 그러기에 잘 길들여진 소는 달구지 멍에 옆에 갔다 놓고 멍에를 주인이 획 쳐들면 소는 이어 그 멍에 밑에 가 섭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기에게 메워진 멍에를 메고 갈 길을 갑니다. 이 얼마나 복됩니까?

여러 번 매를 맞으면서도 회개하지 못하는 심령을 잠언에서는 멍에를 메지 않으려는 소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고통보다는 평안을 원합니다. 매보다는 칭찬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멍에가 각각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메어야만 하는 멍에가 있습니다. 내가 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메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쓴 잔이 앞에 있을 때 그 사명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오죽했으면, 얼마나 급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이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제물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우리가 메지 않으면 안될 멍에가 있습니다. 이 멍에를 잘 멜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목이 곧아서 멍에를 메지 아니하면 그 결과는 패망 밖에는 없습니다.

잠언 5장 12절에는 “훈계를 싫어하며 꾸지람을 가벼이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0장 17절에는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간다”고 하면서 이런 지혜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2장 1절에는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약 출애굽기 32장 9절이나 33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명기 9장 6-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면 육신의 종살이하던 애굽땅에서 해방을 받아 영원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지금 말하자면 광야 40년 동안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은 떠났어도 광야에서 고생스럽다고 하나님을 거역하다 패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생각하였지만 잠언 28장 14절에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케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목이 곧은 생활하지 맙시다. 그리고 본문 2절을 보세요!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지배자가 의인이냐 악인이냐 하는데 따라서 백성은 즐거워하거나 탄식하게 됩니다.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죄인이 벌을 받고 신앙이 있고 미덕이 있는 사람이 후원을 받게 되므로 질서는 안정되고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악이 만발하게 되고 경건과 신앙은 박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므로 백성이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문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오는 3월 12일 그러니까 1주일 후에 불란서에서 총선거가 이루어지는데 모든 여론조사나 현재의 추세로 보아 좌익파에서 집권을 하게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재산이 좀 있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껴서 이 근래 부쩍 외국에 재산을 도피시키는 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자동차, 의자 밑이나 스페어 타이어에다 현금을 넣고, 심지어 의족을 한 사람들은 의족 속에다 돈을 넣고 스위스 은행에 저축하는 일이 생기고, 이것이 어려우면 불란서 안에 있는 브로커를 통해서 비밀 구좌를 통해 예금을 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미국 뉴욕 같은 데서는 불란서 사람들이 부동산을 사는 고객이 전에 비해 3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왜요? 사회가 불안해서 그럽니다. 무엇이 달라졌기에 그렇습니까? 우리 나라처럼 전쟁의 위협이 있어서 그럽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권세를 잡느냐 하는데 따라 그 미치는 영향이 이만큼 큽니다.

먼데 갈 것 없이 우리 나라도 금년도에 선거를 한 번 치뤄야겠는데 “의인이 권세잡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야 국민이 평안히 살 수 있습니다. 백성이 탄식하게 되면 불행입니다.

3절에는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길이 바른 길이요, 생명과 복의 길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므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자랑스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반대하여 잘못된 길로 나아가 창기를 사귀면 패가망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약 성경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도 그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번뇌 거리가 될 수 밖에 없고 알거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4절을 보세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집권자는 공의의 대행자가 되어야 나라가 튼튼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불의한 집권자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중한 세를 가중시켜 국력을 파괴케 한 예가 많이 있습니다.

이디오피아의 살라시에 왕도 근래의 예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지나치게 자기 왕가의 사치와 치부를 위해서 과세했고 이에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높아져서 국왕의 재산을 조사하게 되고 국제적인 망신을 하게 되었던 사실을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위정자의 관심은 언제나 “나라를 견고케 하는데” 있어야지 자기 자리를 견고케 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고 강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곪아서 언젠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위정자의 책임은 국민의 기본법을 유지하고 국민의 사상을 확립하며, 국민이 평안하게 살며,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며 발전시키고, 경제를 개발하여 골고루 혜택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공의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서 국민 생활을 곤궁에 빠지게 하면 그 나라는 얼마 오래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악인의 생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아첨’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아첨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그저 한마디로 말하면 아첨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지당합니다’로 응수하고, ‘잘 되어 갑니다’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승만 박사께선 장막을 쳐 놓은 경무대 속에서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전연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4.19학생 혁명이 터지자 깨끗이 하야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남긴 한마디 말씀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남아 있습니다.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사실 이승만 박사만큼 정치적 능력을 가진 사람도 우리 나라에 쉽지 않았습니다. 그 분만큼 나라 사랑한 정치가도 드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아첨 때문에 망하고 말았고 국민에게도 큰 누를 끼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저는 요사이 염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 정부에서 긴급 조치 9호를 발표하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까지는 특수한 상황하에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집권자가 꼭 들어야 할 충고까지라도 못 듣게 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면 예기치 않은 불행과 비극이 초래될까 두렵습니다. 수출고를 100억불 돌파하고 국민소득 1,000불을 바라보는 것이 가난하게만 살던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한 나라가 바로 서 나가는데는 경제 성장이 전부가 아닌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나라 정치 체제대로 하면 대통령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 이때 대통령을 보좌하는 여러분들의 책임을 느끼고 제자리나 뺏기지 않으려고 ‘아첨’하는 일을 지양해야 될 것입니다. 아첨은 사실 그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본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니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 하였습니다. 구부러진 길, 불의한 길을 걷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스스로 올무가 되는 일입니다. 제가 판 웅덩이에 제가 빠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왜요? 마음이 평안하니까 담대하니까 기쁘고 여유 있어 노래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기뻐하며 노래하고 살아야지 왜 초조해 하며 불안해하고 당황하여 성나서 살겠습니까? 그런데 제 죄가 있으면 지난 28장 1절 말씀 때도 말씀드렸지만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공연히 깜짝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합니다. 왜? 마음이 불안해서 그럽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무슨 이야기만 해도 자기 보고 하지 않나? 자기 욕하지 않나? 벌벌 떱니다.

공의를 행하세요! 담대합니다 기쁘게 삽니다.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7절에는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판사와 변호사는 가난한 사람의 소송도 부자의 소송이나 다름없이 꼭같이 돌보아 주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무시해 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알아줄 지식이 없다는 말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흔히 오해받기 쉽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을 차별을 두기가 쉽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누구나 다 꼭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더 긍휼히 여기십니다.

8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고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색은 화평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사람은 복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될 수만 있으면 어떤 문제나 요란케 하지 아니하고 조용하게 화평하게 하는 것이 지혜있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용하게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소란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조용히 네 할 일을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썽부리지 말고 하라고 합니다.

9절과 11절을 보십시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성내면 성낸다고 시비하고, 웃으면 웃는다고 야단입니다. 아예 미련한 사람과는 될 수 있는대로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태 헬리는 이 구절을 주석 하다가 “똥더미와 싸움을 벌리는 자는 이기든 지든 간에 똥이 묻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노하게 되는 경우는 꼭 같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있는 사람의 차이는 그 노를 드러내는 사람과 그 노를 억제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플리니 서간 7장 6절에 보면 “진정한 웅변은 이따금씩 쉼표를 요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자기 화가 난 것만 나타내는 것은 결코 지혜있는 일이 못됩니다. 화가 발할 때 억제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해서 우리는 악인의 길, 어리석은 사람의 길을 걷지 말고 의인의 길, 지혜있는 사람의 길을 걷기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목이 곧은 생활을 하지 않았나? 이 나라에 의인이 권세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이 나라가 견고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누구 앞에서나 아첨하는 사람되지 않게 해 달라고, 또 아첨하는 사람 없게 해 달라고 의롭게 살아서 하루를 살아도 노래하고 기뻐하며 살게 되기 위해 어디 가나 화평을 위해 힘쓰는 사람, 노할 일이 있어도 억제하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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