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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세대 (잠 30:11-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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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세대(잠언 30:11-14:17)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악한 시대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디모데후서 3장에도 말씀하였습니다. 저기에도 지적하고 있듯이 마지막 때는 다른 때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는 어려운 때입니다. 헬라어 Chalepos 라는 말의 뜻은 ‘어렵다, 힘들다’는 뜻이 있는 낱말입니다. 여기서는 정신적, 육신적 고통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는 악한 시대요, 위험한 시대입니다.

이 악한 시대란 말은 아주 성난 바다나 사나운 짐승을 볼 나타낼 때 사용한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겉으로 볼 때는 온화하고, 평화롭고, 발전하는 사회 가운데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악한 세대, 마지막 때에 있다고 성경은 밝히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때가 어떤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세대의 특징이 어떠합니까?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를 읽을 때 들어보세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극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 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정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오늘 본문에는 네 가지만 기록하였지만 조금 전에 읽은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 5절에는 19가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주의해 보세요. 악한 세대 사람들은 “자기들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하였습니다. 악한 세대 사람들의 행위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19가지 표현을 한 줄에 꿰면 사랑으로 묶을 수 있는데 악한 세대, 마지막 때 사람들은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사랑하여 돈이면 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육신의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그 부모에 대한 자세는 어떠합니까? 모두가 부정적입니다. 여기 다섯 가지를 기록했는데요. 성경에는 ‘주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악한 세대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않는 자가 있느니라”하였습니다. 17절에 뭐랬어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하였습니다. 현대 가정의 문제 가운데 심각한 하나가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일입니다.

비틀즈 문학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하도 부모를 속상하게 하고 안타까울 정도로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19세난 아들에게 타이르다 타이르다 못해 속이 상할대로 상한 아버지가 아들을 책망합니다. “네 이놈, 너는 무엇 때문에 세상에서 나와 가지고 이렇게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니?” 이 말을 듣고 있던 19살 날 아들의 대답이 “아버지, 나는 이 세상에 나고 싶어서 난 줄 아세요?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있어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에게 순종을 강요하세요?” 이런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입니다.

그리고 악한 세대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악한 세대에 사는 사람은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악한 세대에 사는 사람은 경건치 않습니다. 무정하며 정이 없고 서오 사랑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어디 가나 미움과 시기와 싸움 뿐입니다. 영어 번역에는 “They are inhuman'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비인간(非人間)이라’고 했습니다. 겉모양은 사람이지만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세대의 사람들은 “원한을 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이 이웃이고, 그리고 나중이 우리 자신인데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아 우리 자신이 먼저이고 하나님을 나중에 놓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의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 여기 영어를 배우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영어로 “GOD”이라고 하는데 그 순서를 뒤집어 보세요 “DOG”입니다. 무슨 뜻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할 인간이 그 순서를 뒤집어 놓으면 결국 ‘개(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오늘 20세기의 고도화된 문명 속에서 고대광실 좋은 저택에서 갖은 문명의 이기를 즐비하게 차려 놓고 살지만 이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실상은 개처럼 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살랑하기 때문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땅엣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는 데는 복음밖에 없습니다. 주 안에서 새 사람되어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때 자기 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세대의 종교적인 생활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2절을 보세요.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나타난 마지막 악한 세대의 징조 가운데 하나는 “종교의 형식은 가지고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볼 때 종교와 도덕 사이에는 결혼한 적 보다는 이혼한 적이 더 많습니다. 주전 7세기나 8세기 경에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선지자들의 경고를 통하여 종교와 도덕이 이혼한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 때만 하더라도 종교적인 붐이 일어났는데 이상한 것은 바로 같은 때에 불의가 성했습니다. 이사야 선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법대로 절기대로 지켰지마는 불의는 여전하였습니다. 그 때의 사정을 보세요. 이사야 1장 11-17절을 교독해 보십시다. 이사야 때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도 불의와 부도덕 가운데서 사는 그 당시 소위 종교적인 사람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겉모양은 깨끗하였습니다. 율법의 문자를 그대로 따라 지키노라 힘썼습니다. 손을 씻지 아니하면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 그대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무덤 속에 시체가 썩고 냄새나는 것처럼 이와 같은 더러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형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은 부인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생활 주변에서도 이런 현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주일이면 깨끗한 옷을 입고 예배당에 나와 예배에 참석합니다. 함께 찬송을 부릅니다. 기도할 때 아멘 합니다. 헌금대에 헌금을 넣습니다. 보기에는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능력 없는 형식, 속에 생명력이 벗는 겉모양, 진실성이 없는 경건, 도덕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믿음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참된 종교는 형식과 능력의 결합입니다. 형식이 없는 능력이 아니고 능력없는 형식이 아니라 형식과 능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악한 세대에는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며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한 무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악한 세대에는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본문 13절에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까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교만입니다. 이미 생각한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하였습니다. 16장 5절에는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 눈까풀이 높이 들린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시편 101편 5절에는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교만에도 몇 가지가 있어요.

가령 영적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이사야 14장 12-1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계명성의 교만과 타락의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계명성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리라”하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 위에 오르리라.” 이것이 소위 영적 교만으로 우주의 모든 죄 가운데 첫째 되는 죄입니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기 자신의 덕을 더 내세웁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를 보세요!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하였습니다. 신앙적인 교만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교만해서 자기들만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고 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단자로 취급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교만 중에는 지성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대개 무엇을 좀 배워서 그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여러분! 지성적인 교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지장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 3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지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의 지식의 범주 안에 집어넣어 보려 합니다. 그대로 안되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그에게서 배우기를 싫어합니다. 지식을 초월하는 신앙을 고백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지식을 반대하거나 무시하지 아니합니다. 더 높은 지성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변화 받을 것을 강조합니다.

재물에 대한 교만도 그러합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되면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 지기 쉽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다 약해서 그럽니다. 재물은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바로 사용하라고 맡겨 놓은 것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청지기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빈손 들고 왔던 것처럼 이 세상을 따나 갈 때도 가지고 가는 것 하나도 없이 빈손 들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맡은 것으로 어떻게 교만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시편 62편 10절에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치 말라”고 경고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을 시험과 올무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적인 교만도 그렇습니다. 어떤 민족은 자기 민족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특수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교만한 생각을 합니다. 사회적 교만입니다. 전에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은 초민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우리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 멋입니다. 그러므로 공직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국민의 공복으로 봉사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강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 실제로 그렇지 못한 일들이 많이 눈에 뜨입니다. 유감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장관(長官)을 영어로 Minister라고 합니다. 목사도 Minister라고 합니다. 그 뜻은 ‘봉사자’입니다. 장관은 국민을 위한 그 방면의 봉사 책임자입니다. 이것을 권력의 남용자로 착각하면 큰 비극이 초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나라에 거치는 돌입니다. 권력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내게 맡겨 주신 동안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에게 바로 봉사해야 합니다. 악한 세대에는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권력 없는 사람을 넉넉하고 힘있고 권세 있는 사람이 돌봐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삼켜 먹어 버리는 세상입니다. 악한 세상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악한 세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에베소서 5장 15-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이 때가 악하니 지혜있게 살라고,
이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이 때가 악하니 주님의 뜻을 이해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월을 아껴서 그리스도인의 빛을 발하매 선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해야겠습니다. 이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이성을 잃지 말고 주님의 뜻을 이해하며 그 뜻대로 살려고 힘써야겠습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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