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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려운 일 당할 때 (욥 0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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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 당할 때(욥기 1:13-22)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욥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을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생각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으며 하나님에게는 신임을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하나님은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하실 정도였습니다. 하여간 사단이 시기할 정도로 욥은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살았습니다.
욥에게는 식구도 많았습니다. 아들이 일곱, 딸이 셋 모두 열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습니다. 양이 칠천,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 그리고 종도 많았습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욥이 그렇게 뼈아픈 손실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당하는 손실은 꼭 우리의 잘못 때문만은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 중에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욥은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집안을 거느리고 있었고 가장으로서의 본분을 다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이 장성하여 분가해서 살 때에도 계속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미 생각한 욥기 1장 5절에 보아도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했습니다.
성경에는 욥의 건강 상태나 나이, 또는 직업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평안한 가운데 거하며 날로 번창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아니, 그렇게 안정되게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하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바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며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은 이렇게 삽시간에 연속타를 맞았습니다. 한순간 전만 해도 아무 근심, 걱정, 어려움 없이 그저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많은 재산과 훌륭한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습니다.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악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에게도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환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 환난은 예고없이 임합니다. 갑자기 밀어닥칩니다.

왜 욥에게 이런 환난이 한꺼번에 밀어 닥쳤습니까? 그래야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반항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사단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화를 내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밀어 닥치는 환난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이 위축당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당황한 가운데 말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저주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을 당할 때 침울해지기 쉽습니다. 산 넘어 산이요, 물결 뒤에 물결입니다. 우리에게는 환난이 계속 밀어닥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불행 속으로 몰아 넣는 매우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환난의 강타가 임했습니다. 재난에 대한 준비가 없을 때 임했기 때문에 그 정신적인 타격이 더욱 컸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환난은 사람들이 마음놓고 있을 때 임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고요하고 평온할 때 폭풍우를 대비하라.” 의미 있는 말입니다.

환난이 언제 임했습니까? “그 맏형의 집에서 잔치하는 날” 임했습니다. 그 날을 사단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빨갱이들이 말하는 소위 ‘결정적인 시기’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욥은 네 가지 시련을 겪었습니다.

첫째 시련은 욥의 소유인 소와 나귀를 스바 사람들이 공격하고 약탈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 직접 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손을 빌어서 일하시는 것처럼, 사단도 직접 활동하지 아니하고 꼭 사람을 이용합니다. 사단은 자신의 일을 수행할 일꾼들을 넉넉히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악을 행하도록 할 수 있는 신비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종종 악한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둘째 시련은 벼락으로 양들을 멸한 것입니다.
어려움과 시련은 한 가지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환난이 함께 찾아옵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도 있고 “설상가상”이란 말도 있습니다.
양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헌물에 노를 발해서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마련해 놓은 바로 그것들을 통해서 욥을 벌하시려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더구나 욥이 그처럼 많은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은 그 양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가혹한 주인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소돔성에 불과 유황의 심판이 있은 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들이 하늘의 불덩이, 벼락에 다 타 죽어 버리고 말았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셋째 시련은 갈대아 사람들이 약대를 습격하고 약탈해 간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벼락이 떨어져 타 죽었다면 당연히 벌을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이 악하면 “벼락맞아 죽을 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악한 사람 갈대아인들은 벼락에 맞아 죽지 않고 오히려 선한 사람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을 하는데, 그러한 악인의 길이 오히려 형통하고 그 노획물이 늘어나는 반면에 의로운 사람 욥은 모두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넷째 시련은 자녀들의 죽음입니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사단은 자신에게 허용된 모든 일들을 완전히 다 수행하기까지는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씨이저는 때때로 그의 칼을 그의 칼집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의 칼을 그의 몸에서 떼어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이 당한 시련 중에 가장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사실 욥은 자녀들이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그들이 혹시 죄를 범하지나 않나 하고 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10남매가 함께 죽었으니 그의 슬픔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욥에게 가장 큰 아픔이며 치명적인 상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재산의 손해를 본 일에 대해서는 욥이 하나님께 반항하도록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녀를 죽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욥이 당황한 가운데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자식은 말하자면 우리의 분신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는 일도 힘든 일이지만, 혹 사랑이 없어져서 이혼을 하는 사태가 생겨도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는 일은 정말 가혹한 일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구역에 심방을 가서 구역 예배를 드리는데 미리 가서 그 댁 집사님의 어머님과 잠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아드님이 우리 교회 집사님으로 너무 신실하게 봉사를 잘 하셔서 치하를 드렸더니, 만족해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먼저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는 가슴 아픈 경험도 했고 자식을 먼저 보내는 뼈아픈 일도 당했습니다. 그런데 물론 부부가 일신(一身)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를 비교해 볼 때 남편 세상 떠난 것과 자식 앞세운 것을 생각하면, 물론 남편 잃었을 때도 슬프고 막연하고 가슴이 아픈데, 자식 잃은 것하고는 비교가 안돼요. 제 아이가 세상을 뜬 지 17년인데 지금도 생각하면 온 몸이 저려 오는 것을 느껴요.”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다가 몰려서 그 머리채가 상수리 나뭇가지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다윗이 얼마나 슬퍼했습니까? 사무엘하 18장 33절에 보면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통곡했습니다.
이것이 인정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여러 자녀 중에 하나가 죽어도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욥은 열 자녀가 하나도 남지 않고 함께 죽었습니다. 더구나 갑자기 죽었습니다. 병으로 오래 앓아서, 죽음을 예상하고 이별 준비를 하고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욥과 같이 경건하게 살던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기도하는 중에 이런 변을 당했다면 모르겠는데,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먹고 마시다가 이런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는 “혹시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욥은 한순간에 가장 행복한 아버지의 상태에서 자녀가 하나도 없는 비참한 상태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가장 혹독한 시련은 우리의 가장 달콤한 행복과 위안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가장 날카로운 가시들은 바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나무에 솟아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행복의 모든 아름다움은 일순간에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에게 영원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마귀는 이처럼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만들기 위해, 욥을 치도록 허락받은 모든 일을 연달아 행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욥은 놀라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충격 앞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당하였을 때 욥은 인간답게 처신했습니다. 목석처럼 무감각하게 대하지 않았고, 하나님처럼 초연하지도 않았습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큰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를 치신 주님의 손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 비보에 접했을 때 기절하지 않았고 용사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는 더워서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슬픔을 나타내는 뜻으로, 자기 나라 관습대로 옷을 찢었습니다. 그는 격렬한 감정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은 것이 아니라 신중히 그의 머리를 밀었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절제를 지키며, 용감히 자제하며, 그의 영혼을 안식시키려 한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언제 그랬습니까? 자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로소 일어나 겉옷을 찢었습니다.

욥은 환난 속에서도 지혜있게 처신했습니다. 욥은 슬픔으로 땅에 엎드렸습니다(수 7:6). 욥은 수치로 인해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땅에 엎드렸습니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도록 하는 축복이 됩니다.
욥은 여기서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날 때 몸에 걸치는 옷마저 없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도 지고 가는 것이 없습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었어도 다 놓고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매우 경건한 말씀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내 능력과 내 손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서 다시 앗아 가시기도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경건한 사람들의 철학입니다. 요셉도, 다윗도, 엘리도 같은 사상을 가졌습니다. 욥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자는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이 아니라, 번갯불이나 폭풍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하에서 욥에게 재난을 가져다 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사단은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찬양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항복합니다. 욥에 대한 거짓 선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욥의 찬양은 하늘 높이 울려퍼졌을 것입니다.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온 땅과 하늘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지극히 영화로운 음악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이 없어질 때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세상에 태어날 때의 상태만큼 가난해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망했다고 하고 실패했다고 해도, 우리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에 비하면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욥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주셨고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빼앗아 갔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부요케 하셨고 마귀가 나를 궁핍하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자가 취해 가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신 것이므로 그는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이가, 그가 원하는 것을 그가 원하는 때에, 그가 원하는 방법으로 취하여 가실 수도 있습니다.

세네카는 “그가 빼앗기도 하셨지만 주시기도 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에픽테투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잃었을 때 그것을 잃었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그것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드렸다고 말하라.”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욥이 지금은 빼앗겼지만 받았던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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