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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손을 들라 (욥 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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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손을 들라(욥기 11:1-20)

오늘 우리는 욥의 친구 나아마 사람 소발이 한 말을 읽었습니다. 본문은 크게 말하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욥의 교만함과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책망했고, 둘째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회개할 때 소망이 있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미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다녀갔습니다. 그는 매우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빌닷이란 친구는 약간 거친 태도로 욥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소발은 무자비하게 그를 공격하고 매우 거친 말을 퍼부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3절을 보십시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물론 이 말은 고난 중에 처해 있는 욥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서 참기가 힘들어 몸부림치고 있는 욥을 설득시킨 것도 못 되었습니다. 결국은 욥을 위로하는 것보다는 논쟁을 벌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파할 때 우리는 그 아픔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 소발의 눈으로 볼 때 욥은 건방지고 혼자서만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제들과 다투고 싸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쁜 구실을 붙이고 나쁘게 보고 나쁘게 말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쁜 점도 있지만 보는 사람의 눈이 그렇게 나쁘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생각한 말씀에서 욥의 대답을 읽고 그 가운데 매우 유익하고 선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원칙은 옳았고, 그의 이론은 강했으며, 그의 표현은 무게 있고 신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격렬하고 허심탄회하게 한 말은 너그러운 태도로 용서해 주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를 조금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저렇게까지 말할 수가 있을까? 욥이 본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가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태도를 가지는구나. 지금 말하는 저 말은 제 정신이 아니지”라고 이해할 수 있는 말이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소발은 이해심을 가지고 본 것이 아니라 비판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못마땅하게 보였습니다. 욥은 하도 고통스러우니까 제 정신으로 혹은 제 정신이 아니게 말하자면 신음 소리처럼 이런 말, 저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눈에는 시끄럽게 말만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말을 많이 함으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발의 눈에는 욥이란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욥이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대적자들을 침묵시키려는 거짓말쟁이요, 사람들을 야유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르치고, 그와 이야기한 사람들 모두를 이용하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라고 보았습니다.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더구나 4절에 보면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했습니다.
가령 욥이 그렇게 말했다 해도 그것이 무슨 큰 잘못입니까? 욥의 믿음은 흠이 없었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의 친구들이 말했던 것보다 더욱 훌륭하게 하나님께 대해 말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 자신을 경솔하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그의 도가 진실하다는 것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나 소발은 욥이 한 말 “나는 주의 목전에서 깨끗하다”는 것 때문에 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욥은 그렇게 말한 일이 없습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대로, 10장 7절에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고 말했고 또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가 한 말을 최대한으로 선하게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투려는 사람은 그것을 나쁘게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찬양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이미 생각한 5장 9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인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욥기 37장 23-24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전도서 3장 11절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했습니다.
전도서 8장 17절에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주권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한정된 이성으로는 결코 추측도 할 수 없는 깊은 면에서 경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본이요 방법이요 또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한 나라도 그렇습니다.
가령, 요셉을 보세요. 그의 일생을 누가 예측했습니까? 하나님이 내내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때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될 것을 생각이나 했었을까요? 그가 애굽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일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인뿐만 아닙니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가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고 자유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을 누가 예측이나 했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그 동안 우리 나라가 자유 민주주의 대신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유신 체제로 영구 집권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다 잡고 있었는데, 누가 감히 손댈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보세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 이상 그대로 나가면 안되겠으니까 조용하게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계획 저런 계획을 다 세우고 그대로 될 줄 알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롱펠로우의 말이 너무 옳습니다. “하나님의 연자맷돌은 매우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몹시 부드럽게 갈아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십니다.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 크시고, 높으시고, 넓으시고, 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2-5).
모든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신비의 골자는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정황에는 때로 역설적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을 인간 사고의 극단까지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이성이 어느 정도까지밖에 못가고 그 한계에 이르면 남은 일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방법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는 욥에게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과 같은 풍족함과 안전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13절 이하를 보세요.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13-19절).

소발은 엘리바스와 빌닷처럼 욥에게 좋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희망이 있다는 진리를 말씀했습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들라. 그리하면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게 되고 소망이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세요, 항복하는 태도요,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노력이 끝날 때 손을 들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역사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때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지난 밤에 밤이 늦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의 고백일는지도 모릅니다. “밤새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이 생각해 볼 때 그의 지식으로 그의 경험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주석책에 보니까 시몬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시간은 아침이 아니라 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침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소적으로 보더라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고기는 얕은 곳에서 먹이를 먹고 찾고 잠을 자는 것이 경험에 의한 어부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물을 씻어 놓은 뒤였습니다. 다시 그물을 내리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수고를 더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시몬 베드로는 다른 것은 몰라도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요 평생을 어부로 지냈기 때문에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의 경험과 기술을 따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설교밖에 할 줄 모르는 목사가 사업하는 분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주님께 손을 들고, 하라시는 대로 했습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이란 자기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자기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종의 믿음이 있는 곳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몬이 주님의 말씀을 다 깨닫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순종한 것입니다. 그때 큰 축복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완전히 진리를 깨닫고 행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시몬은 행동에 옮겨 놓았을 때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이 말씀은 “깊은 데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물을 내리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 걸음만 앞으로 더 나아갔더라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인데 그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 많습니다.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는 깊은 것이고 얕은 것이 아니요, 고뇌는 깊은 것이고 높은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약점은 깊은 데로 내려가는 용기가 없는 것과 모험을 두려워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깊이 파야 생수가 솟아납니다. 훌륭한 작품은 깊은 정성과 땀을 바친 삶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 사람만이 인생의 깊은 맛과 행복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도 광풍이 일고 사나운 파도가 흉흉한 때에도 물속 깊이 내려가면 거기에는 고요하고 잔잔한 해류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평화스럽게 흐르는 삶의 해류에서 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새로운 면에서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눈이 있다고 모든 것을 바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왓트만이 그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생각해 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아이작 뉴톤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이나 타성 때문에 인생과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 새로운 각도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엔 언제나 새로운 축복의 기적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인생이나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사람에겐 이 세상이 언제나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 법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일한 시몬 베드로는 완전히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해 보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왜 우리가 실패합니까? 다시 한 번 해 보았더라면 성공했을 것을 단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해 보고자 하는 용기와 끈기, 그리고 노력이 없어서입니다. 더구나 해 봐야 안될 것이 뻔한 일을 다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투지가 있으면, 반드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순종함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사건의 절정은 물고기가 많이 잡힌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일어난 시몬의 변화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물고기 잡는 일에 관심이 큽니다. 그가 재산이 얼마나 되며 그의 수입이 얼마인가 하는 데 관심이 큽니다. 그러나 사실 풍요는 빈곤보다 더 큰 위기이고 함정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교만해지기 쉽고, 권력이 커지면 부패해지기 쉽습니다. 사람은 흔히 성공하면 교만해지기 쉽고 실패하면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공과 실패에서 모두 새 인격을 창조하십니다.
코빈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두 가지 방법으로 자극시키시는 데 하나는 실패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이라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성공에서는 겸손히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성공과 축복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겸손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두려움을 아는 자만 하나님의 위로와 소명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는 지금까지 고기를 잡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인 줄 알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이 더 귀하고 값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자기를 발견함으로 또한 새 사명을 찾았습니다. 그는 물질적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전환과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손을 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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