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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 손에 (욥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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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12장은 소발의 발언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1-5절에서는 욥이 그 친구의 한 말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옳든 그르든 아주 날카롭게 말했는데, 그것은 교만하고 비웃기를 잘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망과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욥의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사실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거나, 마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대답하며 거만하게 이야기하고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못난 사람이 없고, 자기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욥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현재도 너희처럼 지혜로운 자가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러므로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고 너희가 떠나면 이 세상은 모두 미련한 사람만 남게 되고, 너희 해가 지면 이 세상은 암흑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우리가 없으면 큰 손실이고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이 남아 있게 하시며 그의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욱 합당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형보다 나은 동생 없고 아비보다 나은 아들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은 발전도, 전진도, 성장도 향상도 있을 수가 없이 퇴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보다 오늘이 낫게 하시며, 오늘보다 내일을 더 좋게 하십니다.
욥기 11장 12절에 보면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했습니다. 아마 욥이 이 말에 대한 대답으로 “그렇다. 나는 들나귀고 너희만 사람이구나”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문 3절을 보십시다.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말은 “나도 너희 같은 총명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라. 나도 너희와 같이 거룩한 섭리의 방법과 의미를 판단할 수 있으며 그 어려운 부문을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욥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한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바울을 괴롭게 하며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비난하자, 하도 안타까워서 고린도후서 11장 16절 이하에서 이런 말로 변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도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 육신적인 것을 내세우니까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나도 자랑하려면 너희보다 못하지 않게 자랑할 것이 있으나 그것으로 자랑을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 6장 17절에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하게 된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 그리고 그들 자신을 강단의 학자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저지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그들과 다투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우리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총명을 가지고 있고 그들 스스로 판단할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우리보다 못하기는커녕 더 우월할지도 모르며 그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을 삼가야만 합니다.

로마서 14장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야고보서 3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비난하고, 무시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욥의 경우 그의 친구들이 자기를 아주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원망하고 있습니다. 상처가 난 곳은 자꾸만 다치게 됩니다. 사실은 거기만 다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한 데는 다쳐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상한 데는 다치면 아프니까 특별히 거기만 다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병든 사람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 되어 가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 일이 실패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 아프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4절 말씀에 있는 욥의 표현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사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모욕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보니 자신들이 한 말이, 고난 중에 소외감을 느끼며 열등 의식 속에 빠져 있는 욥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욥은 “내가 웃음 받는 자가 되었구나”고 외치고 있습니다.

욥뿐만 아니라 책망이나 충고, 또는 경고를 받게 되면 그것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우리들 자신이 웃음 받는 자, 그러니까 놀림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그를 위로하러 왔지만 결국 노하게 했고, 그에게 격려와 권고를 들려 주려 했었지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효력을 거둘 만한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이 자기를 조롱했다고 생각했고 욥의 슬픔은 오히려 가중되었습니다.
모든 하는 일이 잘 되고 성공하고 번성하다가 깊은 역경 속에 빠진 사람들은, 짓밟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 같은 아픔을 더욱 느끼는 법입니다.

욥을 더욱 비통하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다” 했지요? 원수가 아니라 이웃과 동료에게 조롱을 받는 것은 더욱 참기 힘든 일입니다. 시편 55편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더구나 하나님께 불러 아뢰는 자들이 그들의 형제를 조롱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야고보 3장 9-10절에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이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에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명심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입으로 사람을 흉보고 욕하는 말은 말아야 합니다. 이 입으로 남에게 덕이 되는 말을 합시다. 또 어떤 때는 좋다고 하다가 얼마 후에는 안 좋다고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때는 언제고 안 좋을 때는 언제입니까?

욥이 이처럼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그를 지탱케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욥에게는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16장 20절에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호소에 귀를 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이 우리를 정죄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결백을 아십니다. 그들이 우리를 악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선용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사람이 정말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주변에서는 그의 의로움과 순전함, 인간에 대한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건함마저도 비웃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과 순전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훌륭한 점은 생각지 않고 그에게 약간의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을 비웃습니다. 경멸과 조소를 당하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이 옛날부터 당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정말 변덕스러운 세상입니다. 사람이 형통하고 잘 되면 칭찬하기에 침이 마릅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몰락하면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아무리 전깃불처럼 빛났어도 지금 꺼져 가는 등불처럼 빛을 잃으면 땅에 던져 버리고 짓밟아 다 타 버린 양초 심지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면 형통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배가 부르면 남이 배고픈 사정을 모릅니다.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과 같이 감옥에 있던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직위가 회복이 되어서도 감옥 안에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는 요셉의 형편을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돈 좀 벌면 가난하던 때의 사정을 잊어 버리기 때문에 남이 볼 때 구역질나게 굴 때가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부귀는 흔히 사람들을 이처럼 거만하게 만들며 이처럼 그들의 가난한 이웃에게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소발은 11장 20절에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지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이론에 반대합니다. 악한 자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오래 살고 형통하고, 심지어 큰 죄인까지도 매우 형통하며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6절을 보세요.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시편 73편 7절에 보면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했습니다. 단지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것도,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현재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장래를 위한 것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들의 손에 가진 것으로써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므로 오늘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자랍니까?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이 핏덩이 같은 것을 거들어 주고 젖을 물려주고 옷을 입혀 주고 목욕을 시켜 주고 잠잘 때 도닥거려 주고 보호해 주고…. 이렇게 어머니의 손이 있기 때문에 자랍니다. 누가 이 어린아이를 어머니 손에서 빼앗을 수가 있습니까? 어진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바칠지언정 자기의 아기를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린 심령과 하나님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어린 심령, 아무 힘없는 심령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손이 우리 심령을 붙들어 주십니다. 인도하여 주십니다. 생명의 떡과 물을 먹이십니다. 원수가 올 때 막아 주십니다. 시험에 빠지려고 할 때 이끌어 내주십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보존하고 우리의 연약한 심령이 아주 멸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늘 나라까지 능히 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밤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있다가 물위에 무엇이 보이니까 처음에는 무서워서 무슨 요물인 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다”하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반가워서 “아, 예수님이시면 나도 물위로 걸어가게 해 주세요” 해서 물위로 걸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큰 물결을 보고 두려운 생각이 나서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체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 이 죄악의 세상에 살면서 무서운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빠져 들어갑니다. 이때 하나님의 튼튼한 손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아주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손은 멀리 천왕성, 해왕성의 운행을 주장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봄 동산에 어린 싹이 나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아침 이슬에 장미꽃 봉우리가 점점 벌어져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하나님의 손이 또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옛날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파사같은 큰 나라들의 흥망성쇠만 주장하시는 손이 아닙니다. 나일 강변 갈대밭 사이에 버림받은 어린 핏덩이 모세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어린 것을 친히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십니다. 죽지 않고 살겠다고 멀리 모압에 갔다가 불행을 만나서 남편을 잃고, 또 아들 형제 다 잃고, 외로운 그림자로 돌아서는 나오미의 발까지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고 아무리 깊어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난의 심연에 빠졌다고 해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거기에 미칩니다. 하나님의 손은 4천여 년 전 아브라함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인도하시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 7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가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자기의 동포와 함께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먼 광야 길입니다. 원수가 많은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도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힘입어 오월 초하루, 그러니까 넉 달만에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하늘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가는 길처럼 황막한 광야 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길을 갈 수가 있습니까? 이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승리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선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 전부를 부탁하십시다. 승리와 축복의 삶을 영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손을 들자고 했습니다. 순종할 때 우리 지각 밖에 넘치는 축복을 안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눈을 향해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의 손이 우리를 붙드시고 일으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하신 축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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