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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과 고난 그리고 사명 (욥 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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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고난 그리고 사명(욥기 14:1-17)

고난 중에 있는 욥은 그의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사실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향합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인간의 생명은 짧고 서글프며 한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날이 얼마 못 됩니다.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합니다(5절).

시편 90편 1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시는 모세의 시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는 아름다운 종교시이나, 봄날 하늘 높이 즐겁게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가 아니라 그보다는 쓸쓸한 가을날 나뭇가지에 외로이 앉아 우는 라빈(새의 이름)의 노래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고요한 밤 저녁에 외롭게 우는 두견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시편 90편은 그런 인생의 엄숙한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3절에서는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하는 말,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왔던 인생은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티끌에서 났었기 때문에 티끌로 돌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백골로 돌아갑니다.

5절을 보면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했습니다. 그 뜻은 갑자기 많은 생명이 일시에 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재지변 혹은 큰 사고, 큰 전쟁을 당할 때 우리가 겪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홍수처럼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의 생명을 쓸어 갑니다.
“잠깐 자는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잠깐 잔다고 하는 것은 꿈과 같다는 말입니다.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우리가 듣습니다. 5절에서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하면서, 6절에서는 “아침에는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했습니다.
이사야 40장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오직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오늘 본문에도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진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잠깐 있다가 마르고 마는 풀에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90편 9절에 보면 심지어 이런 말까지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여기 “일식간”이란 무슨 뜻입니까? “숨 한 번 쉴 사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하품 한 번 하는 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품 한 번 하는 잠깐 사이에 우리 인생의 일생이 다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마지막에 “후-”하고 숨 한 번 내쉬면 그만입니다. 그게 인생이란 말입니다. 무상한 게 인생입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와 같은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자연히 “인생 칠십은 고래희”라고 말한 유명한 동양의 시인 두보(杜甫)의 명구를 연상하게 됩니다. 동서양의 철인의 말이 어떻게 그렇게 부합되는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사람이 칠십을 살면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균 수명이 많이 연장된 것이 사실이지만 대개 칠십 전후 해서 가는 것이 우리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이가 되면 갈 길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년수의 자랑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동양에도 “수즉다욕(壽則多辱)”이란 말이 있습니다. 조금 오래 살다 보면 욕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수고에는 내적 수고 그러니까 죄와 고민의 수고가 있고, 외적 수고 그러니까 환난과 재난의 수고가 있습니다. 세상은 외적 수고가 많습니다. 질병과 사망이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했습니다. 인간은 잠깐 사는 것이요, 또 수고와 슬픔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육신 면으로 본 인생의 현실입니다. 세월은 빠르고 인생도 또한 빨리 갑니다.

이러한 인생의 현실을 직면하게 될 때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중요한 기도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시편 90편 12절에 있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날을 셀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왜요? 우리의 날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이 세상에 와서 얼마 동안 살 것이 정해져 있는데 이것을 미리 계수해서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살다가 죽을 날이 있는 것을 기억하게 해 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전도서 기자는 “지혜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이 잔칫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어떤 곳에 부자가 있는데 그 해에 농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곡간이 있는데 좁아서 그것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곡식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그래서 곡간을 더 크게 지었습니다. 많은 곡식을 곡간에 쌓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문 자답을 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이 부자가 왜 어리석습니까? 그는 자기 날을 계수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습니다(창고를 증축한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실은 어리석은 부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 날의 수가 한정된 것을 모르고 삽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살 줄로 압니다. 그래서 욕심도 많이 부리고 시기를 하고 싸움을 하고 모략을 하고 중상을 하고 어떤 때는 살인 강도질도 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의 날이 한정되어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허비하지 않고 귀중히 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이때가 악하다”고도 했습니다. 서양 속담에는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 더 귀합니다. 시간은 생명입니다.
한 시간을 낭비하면 한 시간의 생명을 그냥 버리는 것입니다. 돈은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생명은 다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시간이 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 머물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부지런하라고 권면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습니다.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고 하는 말은 그 날 할 일을 꼭 그 날에 한다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날이 끝이 있는 것을 알고 제한된 것을 알아서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귀하게 바로 쓸 줄 알고 내 책임을 다 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육신의 일생은 이렇게 잠깐이니 이 세상만을 위해서 살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내세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림자같이 신속하게 머물지 아니하고 지나가는 순간적인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미련하고 가련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지혜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기도 제목은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침”이라고 하는 말은 하루의 아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의 아침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생을 하루로 본다면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습니다. 소년과 청년 시대는 아침입니다. 장년 시대는 낮입니다. 노년 시대는 저녁, 황혼의 때입니다. 여기서는 인생의 아침, 그러니까 소년 시대에 주의 인자를 받아서 주님을 섬기는 도를 깨닫고 옳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전도서 12장에 보면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청년 시대에 옳은 길을 걷기 시작하면 평생에 즐겁고 기쁜 생활이 가능합니다. 인생은 잠깐이요 수고와 슬픔이 많지만 젊은 때부터 참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침에 바른 길을 택해야 합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한 노인이 80년 정도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 비교적 건강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80년을 산 동안에 시간을 어떻게 썼는가를 계산해 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한 계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26년간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마 잠자는 시간이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1년간은 일을 했습니다.
6년 동안은 음식 먹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음식도 굉장히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또 다른 6년 동안은 불쾌하고 성난 가운데 지냈습니다. 5년 동안은 다른 사람과 약속을 했는데 시간을 지키지 않아서 남을 기다리느라고 허비했다고 합니다. 사실 시간 안 지키는 것은 큰 일입니다. 그리고 228일 동안은 수염 깎는 데 허비했다고 합니다. 또 아이를 목욕하는 데 들인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26일이었다고 합니다. 또 넥타이 매는 데 보낸 시간이 18일이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으면 상당한 시간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80일은 코푸는 데 허비했다고 합니다. 12일은 담뱃불 붙이는 데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저 기쁨과 웃음으로 지낸 시간을 잘 계산해 보니까 80년 동안에 46시간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으로 계산해서 80년이면 700,800시간, 날 수로는 29,200일인데 말입니다. 이틀이 못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날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천금 같이 아끼면서 바로 사용하고 위로는 하나님께 봉사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인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어떤 여유 있는 부인들은 남편 출근하고 애들 학교 간 다음 호화 미용실에 가서 아침 10시부터 사우나 탕에서 몸풀고 점심시켜 먹고 피부 마사지 하고 시간 있는 대로 ‘고스톱’치다가 오후 다섯 시에 집에 돌아오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다고 하니, 성경에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다가 내일 죽으리라”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의 태도는 그저 귀로 듣고 싶은 말은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은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싶은 것은 맡고,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은 다 먹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자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향락주의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유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날 것이 없습니다. “향락을 누릴 수 있을 때 누려 보자.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향락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탐구하게 되면 탐구한 그 즉시로 향락은 환멸과 고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아편을 빠는 사람은 그 즉시로 환멸을 느끼고 그때문에 고통이 오고 마지막에는 멸망하고 맙니다. 술 마시는 사람의 운명도,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의 운명도, 정욕과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하는 사람의 결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개인의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과거에 의지해서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욥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욥기를 가만히 보십시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모든 친구들이 와서 “이것이 네 죄 값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죄 값이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과거에 의지해서 어떤 사람의 고난을 단정하는 이론을 흔히 숙명론, 운명론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사주 팔자가 그렇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일종의 운명론입니다. 힌두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철저한 운명론을 따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은 다 어떤 것의 결과인가 하면, 칼마라고 하는 법도에 의지한 그 사람의 전생의 업보라는 것입니다. 그 철학에 의하면 사람의 윤회전생설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한 번 나고 또 다른 세상에 또 나고 또 나는데 고생을 하는 그 사람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어서 그 결과로 이생에서 그런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철학을 따르게 되면 사람이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어떻게 고칠 수도 없으며, 거기에는 자유도 은혜도 다른 어떤 방법도 없고 그저 그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운명론 철학을 믿게 되면 이미 전생에서 작정된 것이니까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낙심하고 자포 자기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런 철학을 가지면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그저 무관심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전생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이니까?”
그러니까 자연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고 좀 낫게 해 주려는 생각을 가지지 아니하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사회현상을 오늘까지도 인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인도에는 네 가지 계급이 있는데 그 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저들은 전생의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 수 있느냐”하며 무관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운명론적인 견해를 부정했습니다. 과거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고 미래에서 해석하려 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숙명론적 입장에서 팔자 타령하지 말 것이며, 사명적 입장에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과 하실 일이 있는데 그 일을 발견해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고에 대한 사명적 태도, 사명적 견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좀 평안하다고 하지만 언제 내게 고난이 닥칠는지 모릅니다. 이 인생 행로에는 수난자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어떤 견지에서 보느냐와 여기에 내가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때로 질병으로 고생을 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갑자기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분은 60이 되도록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다른 것은 몰라도 건강만은 자신을 가지고 살았는데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더니 위암이어서 두 달 동안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병에 걸립니다. 병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사람은 뜻밖의 슬픔을 당합니다. 슬픔을 당해 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슬픔을 당해 본 사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할 줄 압니다. 슬픔을 통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온유해지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슬픔을 통해서 심령이 완숙해지고 인격이 자랍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통해서 남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가 큰 사명을 받은 것은 애굽 궁전에서 호화롭게 지낼 때가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외롭게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엘리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며 보호받고 있을 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세벨을 피하여 멀리 호렙산 기슭에 혼자 쭈그리고 앉았을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도 혼자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가늘고 은밀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 안토니 같은 사람도 일생을 자기 집을 떠나서 홀로 산굴 속에 거의 고독한 가운데 지내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보통 때 주시지 않던 은혜를 하나님은 고난과 슬픔, 병고와 고독을 통해서 주십니다. 고난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수난자가 되든 내가 그 수난에서 제 삼자가 되든지간에 사명적 견지에서 고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나도, 교회도, 나라도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날이 얼마나 짧은가 하는 것을 알고 사십시다. 그러므로 헛되게 보내지 마십시다. 세상을 위해 육신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다.
또한 인생은 괴롭습니다. 안으로 밖으로 괴로운 세상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괴로움이 닥칩니다. 이런 때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고 사명감을 가지고 대합시다. 그럴 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을 다 하십시다.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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