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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소망을 보라 (욥 15: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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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 중에 그 둘째 부분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욥의 친구들의 생각은 공통된 것이 있는데 사람이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벌로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아무리 변명을 하여도 아예 들을 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일축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서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17절에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다른 사람의 말은 반박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기가 쉽습니다. 엘리바스는 그의 경험과 관찰에서부터 얻은 지식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관찰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간증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실을 내 생활 체험을 통해서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한 가운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에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했습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자녀들은 훌륭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배운 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 주며 다음 세대에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78편 3-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십시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만 주신 기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세상 사람이 알지도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출세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돈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이 그처럼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얻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칼빈 선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 중에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눈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의 빛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큰 역사는 우리 심령의 눈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도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바디매오는 이중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남의 것을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였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는 아마 여러 의사에게 가서 뵈었을 줄 압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소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치지 못하고 포기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디매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여리고 같은 데도 오실까? 만일 오신다고 해도 나처럼 가난하고 눈 멀고 빌어먹는 거지를 만나 주실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누가 오십니까?” 그러나 그에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무리 물어도 그의 물음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앉아 있는 바디매오의 앞을 지나갑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옷자락을 꽉 붙들면서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바디매오의 손에 옷자락이 붙들린 사람은 옷자락을 뿌리치며 내뱉듯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 “나사렛 예수! 아, 내가 들은 대로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선생님이 아닌가?”
이 순간 바디매오는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예수님 어서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여러분, 바디매오는 바로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합한 시간에 부르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만일에 바디매오가 ‘이번엔 내가 기다려야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거니까. 나는 다음 기회에 만나지’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그는 거기서 그대로 앉아 기다렸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디매오는 그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바디매오는 잘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다시 그 길로 오실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예루살렘에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순간은 그의 온 생애에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바쁘신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저 늙은 거지와는 이야기 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바디매오야, 주님이 너를 부르신다. 어서 빨리 가 봐!”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바디매오는 걸치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지팡이를 팽개치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바디매오를 보신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흥분된 어조로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가 “주님”하고 말하는 순간 그의 영은 이미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그의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 처음으로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눈이 먼 사람에게는 보는 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떻습니까? 육신의 눈 말고 마음의 눈이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의 눈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지지는 않았습니까?

만일 제가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과 감격, 평화와 만족에 대해서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예수 믿으면 그렇게도 좋습니까? 그렇게 만족하고 기쁩니까?”라고 말입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어두운 눈을 고쳐야 합니다. 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의 눈을 밝히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바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며,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며,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현재만 보지 않고 장래까지 보게 됩니다. 물질만 보지 않고 영혼을 보게 하십니다. 이 세상만 보지 않고 저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또한 로마서 8장 24-25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소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소망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고 하늘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거짓 소망이고 하늘의 소망은 참소망입니다. 왜요? 세상의 소망은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모두 박사 학위를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공부한다고 해서 다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박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다 권력을 잡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정치한다고 해서 다 권력을 잡는 것은 아닙니다. 잡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연애하는 사람은 그 상대와 결혼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연애한다고 해서 다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재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장사한다고 해서 다 재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벌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여기에 한숨이 있고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이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박사가 되고 보면 생각했던 만큼 굉장한 것,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잘되면 권력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높은 지위에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이 폭삭 늙는 것을 봅니다.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연애 시절에 꾸던 꿈하고는 너무 다른 현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천사인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실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장사한다고 해서 다 돈을 벌어 재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전에는 돈만 있으면 안될 것 없고 못할 것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재벌이 되고 나면 거기에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못하고 안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망은 이루어져 만족한다고 해도 그 만족이 얼마 오래가지 못합니다. 잠시뿐입니다. 지나갑니다. 세상의 소망이란 밖에서 볼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만 막상 얻고 나면 별 것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은 반드시 이뤄지는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참 소망, 하늘의 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에게만 주셨기 때문에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적인 평안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온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평안과 만족이 거의 없습니다. 20절에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했습니다. 잠언에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그를 찾아 만나기 때문에 시간마다 놀라고 당황합니다.
그리고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평온을 가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초조해 합니다. 불안해합니다. 21절에 보면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빚에 쫓기는 사람처럼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 다음 제일 먼저 두려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창 3:10).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22절에는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했습니다.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하는 요한계시록 13장 10절 말씀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보기에는 안전하다 할지라도 사악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죽음에 포위되어 있으며, 지옥이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것입니다. 왜 술을 퍼 마십니까? 불안하고 초조해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을 누리려면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흥함도 끝날 것이고 그의 자만과 즐거움도 그와 함께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실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26절에서 처럼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는 자는 반드시 넘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판 때에 이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모든 악인들의 계획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악인은 소유하고자 하나 부요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악인은 그가 얻은 것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헛된 일입니다. 그 재산이 남아 있지 않고 없어집니다. 29-30절에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 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했습니다.
악인 그가 얻은 것을 자손에게 물려주기를 원하나 그 계획이 방해를 받습니다. 32절에 “그 가지가 푸르지못하리니” 했습니다.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흥할 것이나 망하게 되는 것도 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37편 34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악인은 환난을 당할 때에 그곳에서 벗어나려 애쓸 것이나 그 일도 역시 방해를 받습니다. “그는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했습니다.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 받은 바가 있습니다. 본문 31절에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재앙을 보고 우리 스스로 주의해야 하며 흔들리는 갈대 위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람 편에서 볼 때 굉장해 보여도 실상은 갈대요, 그것도 상한 갈대같이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허망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세상을 믿는 것은 허망한 것을 믿는 것이며, 허망한 것이 그들의 보응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간계는 그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들이 얻은 것이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며, 거기에 붙어 있는 죄악이 그들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들은 바람을 뿌리고 광풍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하시고 하늘의 소망, 악인이 손댈 수 없는 기업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소망의 닻줄을 튼튼히 붙잡게 하옵소서. 이 소망의 닻을 만세 반석 되신 주님께 걸 때 세상에서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진다 해도 주님의 언약을 믿고 소망이 더욱 크게 하옵소서.”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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