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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날의 준비 (욥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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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의 준비(욥기 17:1-16)

오늘 읽은 말씀 역시 엘리바스가 한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욥의 비참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은 욥에게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정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입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돈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권력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래 살아 보려고 그처럼 발버둥치던 진시황도 한무제도 다 갔습니다. 권력가도 갑니다. 학자도 갑니다. 재벌도 갑니다. 미인도 갑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에게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망 선고가 다 내려져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1주일 후에, 어떤 이에게는 한 달 후에, 어떤 이에게는 1년 후에, 어떤 이에게는 10년 후에 이 형이 집행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은 모든 사람이 맞서야 하는 적입니다.

더구나 이 죽음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3절에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앞에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욥은 그의 죽음이 문자 그대로 눈 앞에 이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을 한 후에 욥은 14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한 대로 사람의 생명이란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먼저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이요 가까이 와 있는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하루를 그의 마지막 날처럼 살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거행하고 신혼여행을 가다가 사고로 참변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 땅에는 천재지변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 있게 사는 것입니까? 매일 매일을 나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해서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 중에 다음 시간에는 제 설교를 듣지 못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도 제가 오늘 설교를 합니다만, 이것이 여러분에게 마지막 설교가 될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우선 하지 않을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옛 글에 “인지장사에 그 언야선”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그 말이 선합니다. 죽으면서까지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죽기 전날 그 선생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가룟 유다가 다음 날 자기가 그것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못이겨 목을 매어 자살할 줄 알았다면 은 삼십을 받고 선생님을 파는 악한 일을 했을까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을 안다면 안 받을 돈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안다면 아마 가지 않을 데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할 일도 많을 줄 압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내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이제 조금 있다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죄를 가지고 주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생각하고,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먼저 자기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는 믿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두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 것 같아서 일것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죄를 다 회개하시는 분이 계시기는 합니다. 그런 분은 대단히 축복을 받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히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천국을 가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뜻하지 않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가 없이 가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조금도 가리는 것이 없이, 내 생활 어떤 면이든지 회개할 것은 온전히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 가운데 막힌 담이 있어서 서로 외면하는 사람,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 한 교회에 다니면서도 서로 얼굴을 피하는 사람이 있으며, 마음 가운데 화를 품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그런 것도 다 무너뜨리고 서로 화해하고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그 분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딸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사랑하시겠지만 우리 하나 하나를 내려다보시고 기뻐하실까?”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끼리 서로 담을 막고, 서로 외면하고 산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여러분 가정에 자라나는 자녀들이 서로 싸우고 말도 안하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 부모된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려면, 어떤 원인으로 담이 막혔든지 먼저 형제 자매가 그 담을 헐고 온전히 화목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알고 산다면 우리가 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여러 가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할 일이 있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며,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안다면 그 의무에 더욱 충실할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것입니다. 가족이 모여서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그 날이 삼일기도회 날이라면 아무리 다른 일이 바빠도 다 제쳐놓고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예배 드릴 것입니다. 헌금하는 일이 있다면 마지막 헌금이므로 더욱 정성껏 드리게 될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그러한 지혜로운 방법으로 무슨 일을 맡았든지 충실히 행하면 우리의 생활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언제 부르신다고 하여도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 것입니다. 글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 것입니다. 글로 남기는 유서나 말로 남기는 유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혹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혹 유언이 있는가 물으면 대개 없다고 합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유언이나 유서가 없는 집이 많이 있습니다.
서양에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 나라에도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지만 유언을 써서 봉하고 변호사의 공증까지 해서 봉해 놓고 이 다음에 죽은 후에 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녹음기가 있으니까 미리 유언을 녹음해 놓은 분도 계십니다. 나중에 하고 싶어도 혀가 굳어져서, 혹은 정신이 흐려져서 말할 수 없기 전, 정신이 온전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때 녹음을 해 놓으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건강하실 때 본인의 고별 예배 순서와 인사말까지 다 준비해 놓은 분이 계십니다. 내가 죽으면 이런 순서로 하는데 이 순서는 누구에게 부탁하고 이 순서는 어느 분에게 부탁하라고 하면서 모인 조객에게 인사와 유언을 겸해서 녹음해 놓았는데 고별예배 때 다 듣게 해 달라고 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밤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에게,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슨 말씀을 남기시겠습니까? 어느 부인은 자기가 죽을까봐 걱정하면서 남편에게 따집니다. “당신 나 죽으면 누구하고 또 결혼하겠어요?” 이 정도의 말뿐이겠습니까? 잘 믿는 사람이라면 “나는 먼저 가지만 예수님을 진실 되게 잘 믿으세요. 다른 것은 다 소용 없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 중 하나입니다. 다만 세 가지 사실만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준비하며 삽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의 밭에 곡식이 잘 되니까 스스로 “이렇게 곡식이 잘 되어서 내 창고가 적으니 어떻게 할까? 내가 창고를 크게 짓고 이 모든 곡식을 내 창고에 간직해 두자. 그리고 내 영혼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먹고 마셔라, 네 창고에 먹을 것이 많이 있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다시 찾으리라. 그러면 세상에 준비해 놓은 그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산다고 해서 장래에 대해서 경영도 계획도 없이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해야 합니다. 내일 죽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세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면 아끼던 것 다 놓고 그대로 갈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전도서 기자인 솔로몬은 권세도 누려 보았고 부귀와 영화도 한 몸에 지녔었고 육신의 향락도 마음껏 누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모든 것이 헛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전도서 7장을 보십시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7장 16-17절을 보세요.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환난과 질고, 근심과 걱정, 실패와 좌절 속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져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다가 이 육신의 장막 집 벗는 순간,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세상 것은 꿈에 본 듯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그때, 그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 있으면서 흘린 눈물을 씻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난 시간 생각한 욥기 16장에서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으면서 위로받기는 커녕 조롱받고, 비난받고, 멸시받고, 정죄받아서 오히려 마음에 더 큰 상처만 입게 될 때, 그는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라고 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애들이 대학 입시에 떨어져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남편이 진급되지 않아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억울하게 중상 모략 당해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돈 없다고 업신여김을 받고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무식하다고 천대받고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실연해서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부모님 여의고 가슴 아파 우는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남편 먼저 저 세상에 보내고 흘린 눈물도 닦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괴로운 세상입니다. 하늘나라 가기 전에는 이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서 저 하늘 나라에 가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 감사와 감격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들려주신 말씀도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도 하셨습니다. 그때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니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 어느 문헌에서 이런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죽는 것이 복되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죽음이란 인생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절망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겁쟁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영생을 맛보며 삽니다. 말하자면 하늘 나라 비자를 받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 출국 신고 하는 것이고 이것만 끝마치면 하늘 나라 시민으로서, 듣기만 하던 그 나라에 직접 가서 바울의 말처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우기만 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엘리야, 다니엘, 사무엘 이런 믿음의 대선배들을 만나 뵙게 될 것이니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 116편 15절에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했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욥은 너무 심한 고통 속에서 “내 눈은 근심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에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와 같은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보이는 면일뿐입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의 사람은 시간이 감에 따라 늙어 가고 병들고 후패합니다. 여기에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겉사람이 후패할수록 속사람이 더 새로워집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질수록 영혼의 눈이 밝아집니다. 육신의 귀가 어두워질수록 신령한 귀는 분명해져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보이는 육신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영은 영원 불변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육신이 비록 잠깐이라고 하지만 이 잠깐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향하신 기대가 있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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