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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한 자의 집 (욥 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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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 빌닷이 욥에게 와서 첫 번째로 말한 것이 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말로 욥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그런 것은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빌닷의 눈에 욥은 환난 속에 있으면서도 교만한 사람으로 보였고, 화를 잘 내고 그 생각이 완고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를 책망합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빌닷은 심한 말로 불쌍한 욥을 향하여 쏘아댑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여기서 빌닷은 욥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엘리바스와 소발까지도 포함하여, 욥과 대화를 나누었던 모든 사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욥의 편을 들어 말한 사람들을 나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빌닷은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의 말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듣기는 속히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말만 말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말만 하려고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사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말을 이끌고 나갑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그럴 때는 이것이 큰 결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제 앞으로 생각하게 될 욥기 29장 22절에 보면 욥이 모든 논쟁자들의 말을 끝내게 합니다.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은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거의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욥이 번영할 때는 그의 말이 인정을 받고 존대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가 어려움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적으로 번영한 사람, 학식 있고, 돈 있고, 지위 있고, 힘있는 사람을 소위 ‘유력하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유력한 사람의 말은 같은 말이라도 인정을 받고 존대를 받지만 가난하고 무식하고 세력 없는 사람의 말은 무시를 받는 것이 세상입니다.
전도서 9장 16절에 보면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절에 보면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낫고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빌닷은 욥이 자기가 한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아서 나무랍니다.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했습니다. 아무리 합당한 말을 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들어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말해야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0장 4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청종할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는 큰 힘을 얻습니다.

빌닷은 악인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상태는 슬픈 것이며 그는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모든 악인이 누구나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5-6절 말씀에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했습니다. 빛은 멀리 퍼집니다. 악인의 영향력이 빛처럼 퍼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해서 그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장막도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 위의 등불이 꺼지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잠시 동안 안으로 빛을 얻을 것이며, 즐거움과 기쁨을, 그리고 소망을 어느 정도 누릴 것이고, 밖으로도 재물과 영예의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일순간의 섬광일 뿐 곧 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서 사그라지고 쉽게 꺼지는 등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아니라 그가 피운 횃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피운 횃불은 일시에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해서 조용히 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줄기의 빛도 남지 않아 다른 횃불을 피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장막 안에 있는 한, 다시 말해서 그가 육신의 장막 안에 있는 한 그 빛은 어두울 것입니다. 그에게는 위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를 만족시킬 만한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그를 지탱시켜 줄 소망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가 장막을 벗어나게 될 때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빛은 그와 함께 영원히 꺼지고 말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끝날 때 그의 모든 것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고, 그의 모든 소망은 끝없는 절망으로 변할 것입니다.
잠언 11장 7절에 보면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인은 그 소망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데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면 자연히 바라던 모든 것이 끊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소망이 보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영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은 참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 7절 이하에 보면, 악인의 멸망에 대하여 말했는데 그를 덫에 잡힌 짐승과 새, 그리고 체포되어 처벌하려고 가둬둔 범인으로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 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 얽는 줄을 밟음이며 그 발 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동일 줄일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하만의 종말을 생각합니다. 시편 140편 8절에 보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 죄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주 멸해 버릴 음모를 꾸몄던 하만의 경우를 보십시다. 하만은 일찍이 파사 나라에 공을 세운 바 있어 아하수에로 왕에 버금가는 총리 대신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궁을 출입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만에게 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모르드개는 그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당하는 이 모욕을 생각할 때마다, 모르드개 한 사람 때문에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자기의 상한 자존심과 모르드개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의 동족인 유다 족속을 전멸시키고,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모르드개는 극형에 처하려는 잔인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 후에 하만이 왕을 찾아가 뵙게 되었습니다. “대왕이시여, 지금 우리 파사 나라에 국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 나라 각도에 흩어져 있는데 그들 때문에 우리 나라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이 나라에 안전을 위해서는 아예 유대인들을 없애 버리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저들은 언제 어떤 일을 일으킬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만은 마련한 조서에 어인을 찍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왕이 술을 마셨다고 했습니다. 짐작이지만 아하수에로 왕이 12월 13일을 기해서 파사 나라 각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다 죽이라는 조서에 반지인(EP)으로 서명을 했을 때는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만은 특히 모르드개를 비참하게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검으로 쳐죽이고 자기가 보기 싫어하는 모르드개는 미리 세워 둔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로 했습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준비는 조금도 빈틈없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이와 같이 하만은 무자비하고 처참한 계획을 다 세우고 있었으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다른 한 분이 여기에 관계하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아하수에로 왕도 하만도 전혀 생각도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누구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만의 음모가 무르익어 감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죽게 될 전날 밤, 아하수에로 왕이 잠을 청해도 이상스럽게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의 비서를 불러 역대 일기를 자기 앞에 가져다가 읽게 하였습니다.
읽어 가는 도중에 “문을 지키는 왕의 두 내시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미리 알고 그것을 왕께 고발하여 왕의 생명을 위험한 지경에서 구하게 되었다”는 대목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듣고 있던 아하수에로 왕은 깜짝 놀라면서 “아, 그러면 내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인 모르드개에게 무슨 상을 준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비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고 했고, 왕은 “아, 그래? 이런 법이 있나? 그러면 무슨 상을 주어서 그를 표창하면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날이 밝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어오는 사람은 하만이었습니다.

하만은 왕에게 모르드개만은 자기가 마련해 놓은 높은 형틀에 목 매달아 죽이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서 들어오던 차였습니다. 이때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을 보는 순간 하만을 의심하게 되었고 지혜있게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만, 짐이 존귀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때 하만은 왕이 존귀케 하려는 그 사람이 당연히 자기인 줄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대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대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관을 취하여 그 사람에게 입히고 씌우신 후 그 사람을 말에 태워 성중에 다니며 그 모든 백성들 앞에서 반포하시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할 것이다’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왕은 “아, 그거 참 좋겠구만. 자, 그러면 하만 자네가 이제 말한 대로 내가 타던 말을 끌고 나와서 모르드개를 그 위에 태우고 성내에 가서 지금 자네가 말한 대로 하게.” 이 말을 듣는 순간 하만은 맥이 탁 풀렸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습니까?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만의 계획은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 않은 것이나 역대 일기를 읽게 된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결국 유대 민족은 살게 되었고 음모를 꾸몄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신이 준비해 놓았던 나무에 높이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뭐랬어요?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했습니다. 악인의 악한 계획이 그를 재앙 속에 빠지게 합니다. 8절에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는 시편 9편 16절 말씀대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합니다.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시 64:8). 악인의 범죄함에는 그를 얽는 덫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멸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죄인은 그의 죄로써 연료를 준비하고 하나님은 진노로써 불을 마련하십니다.
“그 강한 걸음이,” 그의 강한 노력이 “곤비하여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뜻한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애써 빠져나가려고 할지라도 더욱 단단히 묶일 것입니다. 악인의 종말은 패망입니다. 그리고 “그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일 것”입니다.
악인을 쫓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은 사람이 추격자로부터 도망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신다”고 했습니다(벧후 2:9). 악인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본문 11절 이하를 보십시오.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 올 것이며 그 힘은 기근으로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 가고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했습니다. 다른 데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놀라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왜 악한 자가 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종말을 유익하게 하실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미리 정하시고 계신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릴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익하게 할 정시각에 도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정한 시각보다 일찍 오시지도 않으시고 늦게 오시지도 않으십니다.”
랑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의 손이 길다 할지라도 성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은 그들의 손보다 더욱 길고 힘이 강합니다.” 의미 있는 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아가시기가 피곤하십니까? 모든 일을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다. 새로운 인내의 힘을 얻게 될 줄을 믿읍시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이를 갑니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한 번연은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자신의 순례의 길을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어둡고 무서운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자신을 돕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밤에 자기 주변에서 숱한 악마들이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했습니다.
번연은 그런 환경에서도 자기의 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아주 무서운 그곳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손에는 성령의 검을 들었고 기도의 병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번연은 이전 보다 더 강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침이 되었을 때 지난 밤에 걸어 온 길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자기가 지나온 그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자기를 붙들어 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서 이 세상의 일들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똑똑히 모르지만 그때는 구원의 은혜를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맙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의인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여 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장중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안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하나님은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피곤하여 지친 사람에게 소생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물과 불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힘들어서 맥이 빠지고 낙심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소망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악인의 손에서 건져 주십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캄캄할수록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지쳐 쓰러질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 악한 세상을 살아가며 믿음으로 싸워 나중에 의젓이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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