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주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 (욥 19:1-29)

첨부 1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19장은 욥기 중에 절정을 이루는 장(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에서 8장이 금반지의 보석이라고 한다면, 욥기에서는 19장이 바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보석과 같은 장입니다.
욥은 빌닷의 말을 듣고 마음에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번뇌와 고통이 더해졌습니다. 2-3절에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욥기를 공부하는 동안 18장까지 욥의 친구들이 다섯 번씩이나 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가 비난으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답지 않게 냉혹했고, 무자비했으며, 친구답지 않게 속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심한 비난에 대해서 그들이 정죄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무지와 실수로 인해 잘못하여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하자.”

사람이 아무리 선해도 허물이 있는 법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도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말합니다. “내게 허물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징계를 받을 사람은 나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책망함으로 나에게 고통을 더해 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의 내용은 “너희는 내가 고통 속에서 불평한 말들을 모두 헐뜯으려 하고 그것을 악용하여 나를 치려 하지만 그 불평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너희가 그 불평을 정죄하고 나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했던 것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욥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 커서 그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굴복되어 그물에 둘러싸인 것처럼 꼼짝할 수도 없었고 또 빠져 나올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욥에게 어려움을 주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싸워야 했습니다. “나를 굴하게 하신 것은 그의 손이었다. 나를 에워싼 것은 그의 그물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처럼 나서서 나를 칠 필요는 없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맞붙어 싸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욥이 당하는 고통이 거두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을 호소했으나 평안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왜 환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결백함을 밝혀 줄 것을 하나님의 법정에 호소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호소에 대해 형벌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7절을 보세요.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했습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 그의 백성들로부터 귀를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도 없으시고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시인들도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이여, 어찌 잠잠하시나이까?”라고 몸부림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욥이 얼마나 불평했습니까? 본문 8절 이하를 보세요.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고통이요 불행이었습니다. 11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하나님이 욥을 원수같이 보신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이 그를 원수 같이 보신다고 생각하여 불평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원수같이 보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절대로 그렇게 대하시지 않으십니다.

12절에는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그를 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군대에게 포위당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10절에는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했습니다.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까? 욥은 거의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10절 하반에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했습니다. 소망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그 앞이 캄캄했습니다. 8절에서는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13-21절에서 그의 주변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십시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욥의 고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멀리 떠납니다. 아는 사람이 외인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친척이 그를 버렸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그를 잊었습니다. 계집종이 그를 외인으로 여깁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도 가까이 하기를 싫어합니다. 동포들도 혐의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업신여깁니다. 일어나면 조롱합니다. 가까운 친구들이 그를 미워합니다. 그를 사랑하던 사람이 그와 대적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욥의 몸이 얼마나 쇠하여졌습니까? 육신의 힘과 아름다움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멸시했을 때라도 만일 건강했고 또 평안했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스스로에 대해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 피부가 뼈에 붙었구나.”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그의 육신이 시들어 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죽과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었습니다. 그의 잇몸과 입술밖에는 상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이 사실 이렇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친구들에게 동정을 간청합니다. 본문 21절에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나는 정말 슬프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내 영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얻어맞았으니, 나는 말할 수 없는 재앙에 빠졌구나” 했습니다.
사실, 친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서로가 불쌍히 여기고 동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동정대신 비판과 비난, 책망으로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욥도 안팎으로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책망도 참아내기 어려운데 너희까지 고통을 더해 주느냐?”하는 말입니다.

이제 욥기 19장 23-29절은 욥의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기 양양한 증언과 기쁨이 넘치는 확신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25절을 다 같이 읽으십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우리는 욥과 그 친구들과의 대답 속에서 이보다 더 무게 있고 중요한 구절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와 하늘에 대한 많은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말하는 그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을 나타냄”입니다(히 11:14).

우리는 여기서 욥의 신앙 고백을 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창조의 주이시며 모든 종교의 으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알며, 살아 계신 구속자를 믿고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다가올 세상의 생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스스로 위로했던 것이지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 환난 가운데서 벗어나거나 이 세상의 행복을 되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본 대로 욥은 그의 길이 막히고 앞날이 암담하고 소망이 나무 뽑히듯 뽑혔다고 말했고 이 생에서의 위안이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시편 49편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하고 말합니다.
바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욥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음부의 권세에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 자신을 딛고 일어서게 되었고, 자신에게 빛을 주었으며 또한 할 말을 주었습니다.
이제 나중에 욥기를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느끼시겠지만 이 부분을 고비로 하여, 욥에게 어울리지 않는 까다로운 불평 같은 것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소망이 그의 영혼을 진정시켰고, 그 폭풍우를 가라앉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닻을 내렸으므로 이제부터는 그의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욥이 이와 같은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욥은 고통의 절정에서 세상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향하던 눈을 돌이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세상 사람에게 호소하던 말을 중단하고 즐거운 환호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욥은 구속자의 영광을 믿었고 그 자신도 거기에 참여할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그는 일어서실 것입니다. 또 후일에 땅 위에 오실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자의 성육신을 말합니다. 땅으로부터 들리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말합니다. 땅에서 일어나실 것이라는 것은 그가 부활하실 것을 말합니다. 또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땅 위에 나타나실 것이라는 말은 “그가 구름 타고 오실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 눈으로 그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는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때 원수들은 그 발 밑의 티끌처럼 될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의 신앙은 최고의 승리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보기에 모든 상황이 절망적인 상태였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욥의 믿음은 문자 그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과 희망은 고난 중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인 구속자를 확실히 모시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인간적인 중상 모략 그리고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안다”는 말은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나는 육체와 환경에서 그토록 비천에 처하고, 그토록 경멸을 당하고, 그토록 비참하고, 그토록 역겨운 처지에 있다. 말하자면 무덤가에 서 있는 사람과 같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나의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영광스런 특권으로 알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자의 확신은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 중에 디모데후서 1장 12절을 보세요.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내가 알고 확신할 때 힘이 있습니다. 영국의 래클 경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연습이 다 된 후에 연주일 전에 오케스트라와 총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오라토리오 중에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할렐루야 합창 후에 나오는 소프라노의 아리아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라는 곡을 소프라노 가수가 불렀습니다. 그 가수는 정확한 음정과 박자,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 표현 그리고 적절한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노래를 불렀고, 많은 청중이 “야, 참 잘한다”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래클 경이 갑자기 지휘봉을 멈추고 노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노래 부르던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관중들까지도 놀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이때 래클 경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너, 정말 내 주가 살아 계신 것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가수가 그런 것을 생각이나 했었겠습니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그저 당황해서 “예, 예…”하며 대답했습니다. 래클 경은 “그러면 다시 불러”하면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소프라노 가수는 음정, 음색, 호흡, 박자, 감정 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아까는 ‘참 잘한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던 많은 청중들이 이번에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었다고 합니다. 꼭같은 사람이 꼭같은 노래를 불러도 확신을 가지고 부를 때 이처럼 감동을 준 것입니다. 확신에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도 절망도 딛고 일어설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특히 오늘 세례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 욥이 가졌던 확신을 가지시고 이 어려운 세상을 믿음과 확신으로 이겨 나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