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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욥 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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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생각하게 될 욥기 22장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정직한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 친구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것은 욥에게도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생각한 대로 욥은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흥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서 상선벌악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의를 위해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세상에서 아무리 악인이 흥왕한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계획은 악인의 계획과 판이하다고, 악한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아서 세상에서 건강하고 수를 누리고 물질적인 번영과 세상의 명예를 얻는다고 하여도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자기가 원망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엘리바스는 욥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의사 전달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본의 아닌 오해를 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서 엘리바스가 말한 것은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그 말은 너무 참된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도움을 입고 계시다면 그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정당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불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훌륭한 행위를 통해서 도움을 끼쳤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로마서 11장 3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욥기 35장 7절에 엘리후도 욥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욥기 41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의 의로움과 온전함이 하나님에게 진정한 이익이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공로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경건은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도 어떤 이득도 드리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의 경건이나 정직, 그리고 율법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세상적인 재간, 학식, 세상적인 술책으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여기서 사람이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라”라고 한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경건은 우리들 자신에게는 매우 유익합니다. 전도서 10장 10절에 보면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에 보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했습니다. 잠언 9장 12절에 보면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경건과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는 여러 면으로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하나님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서 도움이나 이득을 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것에 무엇을 더 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은 하나님께 어떤 이득이나 도움을 끼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만 합니다. 햇빛이 빛나는 데 촛불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자신의 계획과 방어 그리고 신용에 대해서 그 스스로에게 유익합니다. 그는 자기의 지혜로써 스스로를 즐길 수 있고 그의 삶을 풍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못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그 분은 우리의 봉사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없다고 해도 영원히 행복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 보면 “하나님은 의인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스스로 즐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친구들이 없이 혼자서는 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움이 더해지는 법입니다.
비록 우리의 봉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에게 어떤 도움이나 즐거움을 드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청하시며 격려하시고 받으시는 것은 그의 겸손때문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 때문에 위협을 느끼시거나 시기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하는 일을 제어하거나 책망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때로는 그 신하의 세력이 커져서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세상의 방백들이 정책을 쓰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인간의 힘이 너무 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번창함을 막으시는 것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사단은 우리 인간의 조상에게 찾아와서 유혹할 때,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으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과 경쟁하는 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식의 나무를 금해 놓은 것이라고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악랄한 암시요,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책망하십니다. 왜요?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두려워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책망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예를 가리우며 하나님의 세력이 위협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께서 트집을 잡아 그들과 송사하며 그들을 대적할 기회를 살피시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압제했습니다. 헤롯 왕이 베들레헴 근처의 모든 어린애를 살해한 것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박해한 것은 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의를 남용하시지 않으십니다.

욥기 35장 5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 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의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5-8).

이제 5절 이하에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이 얼마나 악한 가 하는 것을 마치 검사가 범죄 사실을 고발하듯이 말합니다. 그 동안 욥의 친구들은 세부적인 말은 하지 않았었는데 엘리바스는 여기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고도의 많은 범죄와 비행을 들면서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욥이 실제로 그런 죄를 범했다면 그들이 욥에게 말하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오래 말의 요점을 피해서 이야기해 왔고 욥에게 너무 지나칠 정도로 부드럽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 상심할까 두려워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그로 하여금 더욱 자기 변명을 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제야말로 욥에게 태도를 분명히 할 때입니다. 우리는 비유로 욥을 책망했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욥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비유로 하여 돌려서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악한 자가 바로 욥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그처럼 악하지 않으면 그처럼 어려운 일을 당할 이유가 있겠느냐?”하고 말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엘리바스가 여기서처럼 욥을 잘못 책망하는 것은 그를 강탈한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욥에게 큰 죄를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명성이 그 재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일, 시기하는 일, 나쁜 추측을 불러일으키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공의와 사랑 그리고 우정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환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는 못할망정 그를 노하게 하여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더욱 야비하고 교활한 일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비방하기 위해서 책망을 퍼붓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욥기를 처음 생각할 때 보았던 1장에 기록된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은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은 사람입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이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세상 사람, 그것도 그의 가까운 친구에게는 세상에서는 가장 악한 사람 중에 하나로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명을 쓰더라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욥이 한 대로 우리의 호소를 사람에게 하지 말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145편 18-19절을 함께 읽으실까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욥을 매우 포학하고 부당한 사람이라고 책망합니다. 꼭 같은 사람인데 미움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를 선하게 보셨는데 사람은 그를 악하게 보았습니다.
욥은 가난한 사람에게 잔인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적은 친절도 베풀지 않았고, 그의 권세를 이용하여 그들을 해치려 했다고 말합니다. 욥은 그 형제들에게까지 엄청난 빚을 갚도록 요구했고 폭력으로 빼앗았으며 귀한 물건을 볼모로 잡았다고 억측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리 욥은 그 이웃을 까닭 없이 감금하고 그들이 지불할 능력이 없다 하여 노예로 삼았으며 파산한 소작인과 빚진 자들의 옷을 빼앗으려고 그들의 의복을 벗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출 22:26; 신 24:13)에서도 금지된 것입니다.
또한 욥은 가난한 자에게 심지어 초라한 나그네와 불쌍한 과부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는 갈한 자가 청할 때에 한 잔의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고 목말라 죽을 지경까지 내버려두었다”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극도로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자기 손으로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는 것도 금함으로 베푸는 것을 아꼈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누구를 해한 일이 없었던 혼자된 여인이 이제 위로를 구하기 위해 그의 집 앞에 왔을 때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어 그녀를 슬프게 했다고 말합니다.
공의를 묻기 위해 찾아온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돌려보냈다고 하면서, 그들이 풍성한 가운데 너를 방문했을지라도 그들을 억지로 짜내어 빈 채로 돌아가게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악한 것은 고아의 팔을 꺾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욥보다 더 악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엘리바스의 결론은 10-11절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아주 훌륭한 말씀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1절을 보세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우리 인간이 평안을 그처럼 원하고 있으면서도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지 못한 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만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만나기가 무서워졌고 싫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범한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이 땅에도 하늘 위에도 죄인이 평안히 있을 곳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꼬임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마음에 불안이 왔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혔습니다.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가려 보았지만 얼마나 갑니까? 사람이 힘으로 죄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 지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단번에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돌아가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양(羊)의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몸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우리의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 아무리 큰 죄라고 하더라도 주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모두 용서하여 주시고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될 때 우리에게는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과 화목하세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교제를 맺고 더욱 가까워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리고 2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이 말씀은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한 후에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라. 그리고 그의 다스리심에 따르기로 작정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 계속 거할 수 있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도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 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했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났던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체면도 염치도 없지만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잘못된 자리에서 떠나 돌아오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장막에서 불의를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때에 다시 흥하겠다고 했습니다.

24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25절에서는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육신적으로 말하면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받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25-28절입니다. 같이 읽고 기도하십시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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