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보시는데 (욥 24:1-17)

첨부 1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도 욥의 답변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볼 때 잠시 흥한다고 할지라도 얼마 가지 않아서 곧 멸망하게 되고, 있던 자리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느 면으로는 사실이지만 욥은 여기에 대해서 동의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했습니다.

욥은 전능자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일도 심판을 피할 수가 없고, 지금 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가 없으며 앞으로의 일도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므로 악한 세대가 하나님에게서 감추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때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모든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눈 아래 있으므로 이 악한 세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죽음도 미리 아십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이 그들의 처벌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서 미리 죽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욥은 악인이 흥하는 이유를 알아보려 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모르심이 없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옛날 선지자들도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하박국 1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시편 73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은 악한 사람이 형통하고 패역한 사람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선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특별한 사건 속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진리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지 의심할 수 있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그리고 선하심이 손상을 입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왜 원망했습니까? 이처럼 악이 성해 가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편에 서서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욥기 29장 8절에 보면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천장에 붙었었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이 모른 척하시는 것 같으니 “이거 너무 하십니다”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죄를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인데 여기에서 ‘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13절에 보면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했습니다.
악인이 아무리 요란스럽게 그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빙긋이 웃으십니다. 그의 날,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그 날에는 흔적도 없이 다 없애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심판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 시기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인내를 연단하게 되고 그의 나라가 속히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읽어보게 되면 욥은 두 종류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지만 그런 죄악 속에서도 여전히 흥하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법과 권세를 잡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전도서 3장 16절에 보면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장 공정해야 할 재판소에서 악이 자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법권이 완전히 독립이 되어 있다고 해도, 사람이 제한된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의로운 재판을 하는 것이 어려운데, 하물며 사법권이 집권자의 시녀 노릇을 하게 될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대로 학대받는 자가 흘리는 눈물이 무시당하고,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기 때문에 공의가 박멸되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2절 말씀에 보세요.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악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개인의 재산을 탈취한다는 말입니다.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그렇게 빼앗지 않았습니까? 조상 적부터 물려받은 포도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며 나봇이 말을 듣지 아니하니까 다른 죄목을 걸어 죽여 버리고 결국 빼앗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산 독재자들이 이렇게 개인의 재산을 소위 국유화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까? 권력과 금력이 결탁을 해서 억울하게 국민의 재산을 탈취하는 일이 없습니까? 이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계표를 옮겨 자신들을 정당한 주인으로 만들고, 이처럼 그릇된 방법으로 소유하게 된 재산을 그 후손들에게 안전하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신명기 19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또한 신명기 27장 17절에 보면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공의와 법을 핑계삼아 개인의 소유를 탈취한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가 다윗 왕에게 비유를 들어 이야기했던,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새끼를 빼앗는 부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가난한 고아에게 돈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단지 자기 소유의 나귀 한 마리밖에 없는데 그들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그것을 빼앗습니다. 그 나귀 주인은 그들과 다툴 힘이 없기 때문에 고스란히 빼앗기고 맙니다. 어디 가서 호소도 못하고 호소해 봐도 아무도 듣지도 아니하고 묵살해 버리고 맙니다.
살림 밑천이라고는 소 한 마리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혼자된 여인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그 여인의 전 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는 부채나 조금 밀린 임대료를 이유삼아 그 소를 볼모잡습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을 개인적으로 학대합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 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백성들을 속이고 우롱하며 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더구나 위로를 빼앗긴 불쌍한 백성들 위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랑자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해서 아예 멀리 도망가도록 만들고 불쌍한 사람들이 달아날 때 비웃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촉루낙시에 민루낙이요/ 가성고초에 원성고라”는 옛 시가 기억납니다. 예나 지금이나 방식만 다르지 꼭 같은 원리의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불쌍하고 세력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고생을 합니까?

둘째로 6절 이하에 약탈자가 있습니다.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법과 권세를 손에 잡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약탈자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악을 자행합니까?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분명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15장 3절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5장 21절에는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욥기 34장 21절에는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했습니다. 시편 94편 9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보나 숨어서 하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과 겉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는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속지도 만홀히 여김도 받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흔히 자기가 자기를 보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거울이 생기고 이 거울이 발전해 왔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 보기를 좋아하고 또 보통 자기가 잘 생긴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 일에 관심이 큽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잘 보이기 위해서 얼굴에 화장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하면 다 기뻐하고, 비난하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여론을 들으려고 합니다. 국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정보원을 각처로 파송합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도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론을 듣고 좋지 않은 반응이 있을 때는 고치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지, 좋지 않은 말을 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여 잡아다가 고생이나 시킨다면 정보원의 의미가 없습니다.

공산 독재 아래에서는 반대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좋아서가 아니라 죽기 싫어서 안합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국민의 기탄 없는 여론을 듣고 참고해서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지, 택시 운전기사가 손님과의 대화 중에 불평을 했다가 잡혀가서 고생을 하게 되면 다시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칠 수 있는 길은 막히고, 한편으로 고쳐야 할 것은 점점 굳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나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 스스로가 잘난 줄 생각하고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칭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사람이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옛날 바벨론 왕 벨사살은 스스로도 자기를 높이 보았고 모든 신하들과 국민들도 그를 역시 높이 보았습니다. 큰 나라의 제왕이요 금은 보석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위가 높았습니다. 하루 저녁은 천 여명의 손님들을 초청하여 큰 연회를 배설했습니다. 술과 많은 음식을 만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그릇까지 가져다가 술을 마시며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연회장 담벽에 이상한 손이 나타나 글씨를 쓰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 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바벨론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크다고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얼마나 무게가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나 계시며 하나님께는 높은 데, 깊은 데, 먼 곳, 가까운 곳이 따로 없습니다. 어디나 무엇이나 다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졸지도 않습니다. 또한 사람은 현재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같이 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을 살피십니다. 사적인 생활, 공적인 생활, 사회 생활, 문화 생활, 직장 생활, 정치 생활, 인간의 모든 활동 상황을 살피십니다.

에스겔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느 곳으로 인도했는데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는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벽을 헐라”고 말씀하셔서 그 구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큰 문이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라” 하시므로 그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안에서 온갖 더러운 벌레와 더러운 짐승들과 우상들이그 방의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이 그 우상에게 분향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만 실상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며, 이 사람들은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담으로 쌓아 놓고 문으로 꼭 닫은 다음 ‘내 속을 누가 알아보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은 모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비밀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 139편에 시편 기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눈이 악인을 감찰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노아 때의 모든 사람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감찰하시고 보응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아합 왕과 이세벨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런 눈으로 압살롬을 보시고 헤롯을 보시고 느브갓네살을 보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만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도 하나님은 이런 눈으로 보시고 뭇솔리니, 히틀러의 동조를 하나님께서 보신 대로 보응하셨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눈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는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짓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짓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한 시편 51편에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이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도 보십니다.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억울한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선한 사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눈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는 것을 의식하십시다. 요셉은 사람은 보지 않지만, “내가 어떻게 이 큰 악을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습니까?”라며 어려움을 각오하고 그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악이 번창한다고 해서 거기에 동참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보시고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박조준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