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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을 떠나는 생활 (욥 31: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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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장은 욥이 지금 말할 수 없는 환난을 겪고 있지만, 그래서 친구들은 욥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의 값으로 벌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나눈 하나님의 말씀에는 욥이 이성 관계에 있어서 깨끗하게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더럽혀지고 넘어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괜찮아”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대해서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병에 장사가 없는 것처럼 인간의 심령을 죽이는 죄라는 무서운 병에도 장사가 없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권세를 누리는 사람도, 돈이 많은 사람도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죄의 올가미에 걸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죄는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첫째로, 욥은 세상 재물을 탐내어 거기 마음을 쏟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4-25절을 보세요.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욥은 자기가 결코 이 세상의 재물을 탐내어 마음을 쏟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기의 기업이라고 여기거나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돈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버는 것과 쓰는 일, 저축하는 일과 헌금하는 일, 투자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돈이 인간에게 궁극적인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말씀한 곳은 없습니다. 잠언에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하여 허무한 것에 주목하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돈이 죄악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돈을 가진 사람이 악하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부한 자는 미워하신다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부당한 소득, 재물을 모으려는 데 그릇된 동기, 부유한 사람들의 자기만 알고 남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태도는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가장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부자가 많았습니다. 아브라함, 욥, 솔로몬, 요시아, 바나바, 빌레몬, 루디아 같은 사람들은 부자였습니다.

욥은 부자였지만 재물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황금으로 자기의 소망을 삼지 않았습니다.” 황금을 신뢰하여 자기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어리석었습니까? 아닙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재물이 그에게 기쁨을 주는 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재물이 마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실한 표징인 듯이 생각하는데 이것도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실상 재물 자체는 불확실한 것이며, 그런 물질에게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더욱 허망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약하기 때문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 재산을 신뢰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주 어렵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욥은 부자였지만 재물에서 만족을 얻지 않았습니다. 25절에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했습니다. 그의 많은 재물이 그의 인격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많은 것과 인격이 훌륭한 것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힘과 그 손의 능력으로 그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신명기 8장 17절에 보면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했습니다.
재물도 하나님 때문입니다. 욥은 그 많은 재산 때문에 만족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어도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의 손해를 보면 혈압이 오르고 속병이 나고 심지어 충격을 받아 죽든지 심하면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욥기 1장에서 갑자기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욥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도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했습니다. 공수래 공수거란 말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살았다고 해도 갈 때는 다 놔두고 빈손으로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종종 잊어 버리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필수적인 요건들에 만족하고 삶의 방식을 단순화하는 데 주력하게 되면 자족의 삶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불만을 조장하여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지 못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만족은 결코 세상적인 것이 넉넉한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의 어떤 현인은 “적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히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삶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자족의 생활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지금에 만족치 못하고 부하려 하는 사람은 예기치 못한 함정, 시험,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지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잠언 28장 20절 이하에 솔로몬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돈에 대한 사랑이 악으로 변할 위험이 있을 뿐입니다. 돈을 가지면 사람이 많은 선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돈이 있으면 악을 많이 행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기적으로만 쓸 수도 있고, 곤란에 빠진 이웃의 부르짖음에 대해 관대하게 대답해 줄 수도 있습니다. 돈은 힘을 주는데 그 힘은 언제나 이중성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악을 위한 힘도 될 수 있고 선을 위한 힘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아니하면 탐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패망으로 인도 될 것이 분명합니다. 황금주의, 물질만능주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살인마입니다. 배고픈 늑대들과 싸우듯이 우리는 이것에 대항해서 싸워야만 합니다.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부한 사람도 부한 사람 나름대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잘 아시고 계십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한 거래와 현명한 계획을 통해 부하게 되었으면 결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크게 축복을 받을 것이며 그리고 큰 책임을 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물질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려고 힘쓰심으로 모든 부를 유익하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물론 힘든 일이지만 부한 사람은 마음을 높이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크게 되고 높아지고 많아지고 유명해지면 과거에 비천했던 것을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사실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마다 과거의 비천했던 모습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재물이 있다고 해서 자기가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찍이 세네카는 “돈은 사실 누구도 부하게 만든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둘째는 욥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십계명에 보아도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무슨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했습니다. 전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낸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얼마 지내는 동안에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을 시켜서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본래 인간은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물질로 만든 어떤 형상으로 대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인간은 여러 가지 미신에 타락하고 맙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기도를 드리는 분은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잘못된 하나님의 영상이 새겨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가령 천주교의 교황은 타락된 하나님의 영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우상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의 무오를 주장합니다. 교황의 말씀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황도 사람입니다. 교황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사람치고 잘못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손자들을 보면서도 훈계하거나 벌하지 못하는 마음 약한 노인처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또는 하나님을 아주 무서운 분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조그만 실수를 해도 당장 벌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사업이 실패하거나 몸에 병이 들거나 환경이 어려워지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무서운 분이라고 하면 우리가 접근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어린 소녀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인상을 말했는데 “하나님은 거리에서 교통을 정리하는 교통 순경 같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범하지 않나 해서 늘 지켜보고 계신 분이죠”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차를 몰고 거리에 나가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교통 순경입니다. 운전을 한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핸들을 잡고 있는 동안 푸른 셔츠를 입은 순경이 나타나 손을 흔들면 괜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 순경들은 교통을 정리하고 지도하기보다도 어느 차가 교통 법규를 어기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다가 잡아내는 것이 하는 일 같아요. 마치 거미가 줄을 쳐 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벌레 하나가 걸리면 부르르 나와 잡는 모습 같아요. 교통 법규를 어기기 쉬운 지점에 꼭 지켜서 있어요.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잡는 것이 목적인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저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면 믿을 마음이 안 생겨요. 그리고 무서워 살겠어요? 그저 말 한마디 실수해도 벌이 무서워서 잠을 잘 수 없을 테니까요.

우리 하나님은 그런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색하고, 옹졸하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며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 칼빈이 말한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대한 정치가로 오인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국을 통치하시고 사람들을 이용하셔서 그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무자비하게 그를 떼어버리시는 분으로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치만 보면서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형식으로 외모로 섬겨 이사야가 한 말대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먼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특수한 사정으로 그 동안 말로는 민주주의라고 해왔지만 실제로는 독재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국민들이 민주화를 염원했고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희생을 했습니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 민주화 작업이 시작된 것은 다행이 아닐 수가 없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론도 중립을 지켜야 되겠고 경찰도 군인도 중립을 지켜야겠고, 공무원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윗사람 눈치만 보고 자기 몸 다치는 일을 피하고 윗사람 좋아할 말이면 속에도 없으면서 입에 침을 발라 가며 말하는 일은 지양될 것이고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우상화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경배와 영광을 피조물에게는 바친 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해와 달을 숭배하리 만큼 우매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보이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욥이 그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욥은 우상숭배의 죄를 멀리 했습니다. 그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았으며 엎드려 절하지도 않았고 태양을 경배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눈이나 마음이나 입술로도 이 일원 숭배의 죄로부터 멀리 했습니다. 욥은 육체적 간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간음에 대해서도 자기 눈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늘의 광선을 쳐다볼 때마다 믿음으로 그 빛을 투시하며 그 빛 너머 광명하신 아버지를 바라보리라는 것이 그 마음의 언약이었습니다.
욥은 열심을 다하여 자기의 마음을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몰래 꾀임을 받아서 햇빛과 달빛 가운데도 신령한 영광이 있으며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욥은 남을 해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불구 대천의 원수라고 해도 그가 해 받을 것을 바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에 바리새인들은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에게 가해진 피해에 대해서 보복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파죽으로 몰아 넣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9절을 보세요.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고의로 원수를 갚거나 그를 해롭게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해로운 일이 생기면 넌지시 기뻐하고 소매를 가리고 숨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은 보통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미워하던 사람에게 흉한 일이 밀어닥치고 그의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지만 그는 그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잠언 24장 17-18절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 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욥은 그의 원수들에게 궂은 일이 생기도록 마음속으로 빌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30절에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욥은 만일 자기가 그런 일을 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 대해 죄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혀로 범죄치 않기 위해 조심했습니다. 그의 입으로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는다고 해도 그때문에 내가 그에게 악한 뜻을 가진다면 내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복수를 하고 싶은 심한 충동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보복하라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도 (사울을 엔게디 굴에서 만났을 때, 아비새와 같이 사울의 진에 이르렀을 때, 시므이가 저주할 때)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물질에 종이 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말고, 원수를 갚지 않아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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