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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뜨거운 마음으로 (욥 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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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마음으로(욥기 32:1-22)

그 동안 우리가 나눈 욥기의 말씀은 욥과 그의 친구 세 사람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과의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32장부터는 새로운 친구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엘리후라는 분이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나 그의 세 친구보다는 나이가 적은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옆에서 인내하는 마음으로 잘 듣고 있었습니다. 선배들이 그처럼 광범위하게 그리고 박학다식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욥의 말이나 세 친구의 말이 끝나서 다시 이야기가 계속되지 않는 틈을 타서 퍽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그러면서 그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6절 이하에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여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오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했습니다.

엘리후는 아주 점잖고 겸손한 사람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러면서도 건방지거나 주제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얼굴을 한층 더 빛나게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엘리후는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매우 겸손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나는 연소하므로 당신들에게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하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실수한 것으로 판명되거나 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될 것 같아서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건의 경과를 모두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한 시비 판단이 그 마음속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이 남의 일이라고 하여 소홀히 여기지도 않았고 또 그것이 번잡한 일이라 하여서 물리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이 명백히 서 있었지만 그 일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엘리후는 겸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퍽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로 전후 좌우를 살필 줄 아는, 지혜 있는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엘리후는 그의 선배들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했고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연륜과 경험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많은 이점을 제공해 줍니다. 따라서 말을 하는 데도 성숙하게 됩니다. 이 말은 나이가 많으면 누구나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방면에 힘쓰는 사람에 한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내가 얻었다 함도 아니오”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2-15). 젊은이의 할 일은 계속 성장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엘리후는 욥과 그 친구들 사이의 대화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욥의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함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다가 말을 꺼냈습니다. 15-16절을 보세요.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했습니다.
그러면서 18절 이하에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했습니다. 엘리후의 심령은 한마디로 말해서 뜨거워졌습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며 그들의 마음은 금강석처럼 굳어져서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속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정자들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귀찮고 시끄럽다고 하면서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조국과 겨레의 앞날을 생각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서 택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빛 되신 주님이 이 세상에 왔으나 오히려 빛을 영접지 아니하고 어두운 데 거할 뿐더러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을 내려다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왜요? 저희의 지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해서 돌 위에 돌 하나 겹놓이지 않을 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파서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더냐? 그런데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는 너무 안타까워서 책망도 해 보고 달래보기도 하고 경고도 해 보고 위로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내 듣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권고를 따라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조롱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때문에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혼자 생각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아니 할 뿐더러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일만 당하니 이런 고생 더 이상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만 두겠다 생각하니 “중심이 불붙는 것 같이 뜨거워서 골수에 사무치기 때문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방주를 지으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대접받은 것이 아닙니다. 120년 간이나 방주를 지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고 공연한 시간과 재물의 낭비라고 빈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을 떠날 때 그의 친구 친척들은 그에게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롯이 소돔성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말씀을 듣고 그의 딸들과 정혼한 사위에게 가서 “빨리 너희도 떠나자. 이 소돔성에 이제 곧 하늘에서 불이 내려 심판하신다고 하신다” 했더니, 그들은 장인의 말,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긴 것 때문에 사자굴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 때문에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위시해서 야고보가 헤롯 왕의 칼에 죽었고 그 밖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의 순교를 하였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저의 많이 배운 학문이 저를 미치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뭐랬어요? “미쳤든 정신이 온전하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 전하는 일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임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엘리후는 “내가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 힘이 어디서 생깁니까? 우리의 마음이 뜨거운 데서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라야 됩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그처럼 생동하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오순절 때 저희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가슴이 뜨거워짐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힘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습니다.
본래 베드로 같은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했었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충만함을 받게 될 때 그 가슴에 뜨거움을 느꼈고 담대하게 생명을 내놓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공회에서 그를 불러다가 위협도 하고 경계도 하면서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했어요?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판단해 보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소.”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가슴이 뜨거워서 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가슴이 뜨거운 성도들이 모일 때 교회는 살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던 것은 지식 많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권력가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는 생명력이 넘쳐서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고 자신들만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끼치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이 불이 우리 가슴에서 꺼질 때 우리의 가슴이 식어지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 경고는 누구나 다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네 행실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하여 내겠다” 무슨 말씀이에요? 예수를 믿는데 뜨겁게 믿으란 말이에요.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닌 상태, 이것을 주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뜨거운 요소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국의 유명한 개혁파 목사였던 리차드 박스터는 “내 마음에 불이 붙기 전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내 마음이 뜨거워지기 전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뜨거움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없을 때는 저에게는 고통이요 고민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저는 말씀의 선포를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제 마음이 뜨거워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가슴이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도 터질 것 같음을 느낄 때 저는 이것을 성령의 역사로 믿습니다. 성령의 뜨겁게 하심이 없을 때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함께 가시며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말씀이 이 단에서 선포되고 성경이 해석될 때 마음이 뜨거워져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시편 39편 3절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도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죽어 가는 교회에는 “아멘” 소리가 작습니다. 기도가 끝나도 “아멘”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아멘” 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한나가 드린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한나는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옆에서 보기에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드린 기도를 기억하시지요. 뜨겁게 기도 드렸습니다. 그 기도에 응답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거기에 응답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도 뜨거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님을 섬기는 데도 뜨거운 마음으로 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야 무슨 일을 해도 힘겹지 아니하고 짜증나지 아니하고 감격과 감사 속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면 다른 이의 마음도 뜨겁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했고,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다른 것은 없어도 서로가 뜨겁게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사랑처럼 아름답고 귀하고 필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삶의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우울증을 없앨 수 있습니까? 적극적인 해답은 삶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와 같은 정열을 고취시킬 수가 있습니까?
큰 꿈을 가지는 일입니다. 이 꿈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응되는 대가가 있습니다. 높은 명예를 추구할수록 그 대가는 더욱 높아집니다.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희생 없이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 없이 유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헌신 없이 성취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정열을 가진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무엇이 되어 보겠다고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공부를 해도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해도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학생을 가르쳐도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해도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정치를 해도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이 뜨거운 마음은 무엇인가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위험과 고통, 방해와 공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정열이 있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이겨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뜨거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웬만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삶의 정열로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에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은 그의 위대한 계획을 위해서 일하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해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요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것이 사명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그의 자녀인 우리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성숙이 있습니다. 성숙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숙할 때 사회가 도움을 받습니다.

3. 희생이 있어야 성숙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긍정적인 사람을 미워합니다. 소극적인 사람들이 적극적인 사람을 반대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이 있는 사람을 몰아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이 꿈의 소년 요셉을 먼 나라로 팔아 버렸습니다.

4. 우리가 성숙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열매 많이 맺은 사람은 그러한 성공적인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정열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통해 우리 하나 하나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십시다. 예배 드릴 때 뜨겁고, 말씀들을 때 뜨겁고, 기도할 때 뜨겁게 되기를 바랍니다. 봉사를 할 때도 뜨거운 마음으로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삶의 정열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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