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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캄캄한 밤이라도 (욥 3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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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이라도(욥기 35:1-16)

오늘도 계속해서 엘리후가 욥에게 한 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욥기를 통해서 본대로 욥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극심하다 보니 육신도 물론 고통스럽지만 마음속에도 여러 가지 번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도 헤롯의 잘못을 말한 것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게 되었고 그 고생이 심하다 보니 마음에 여러 가지 번민이 생겨서 그의 제자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까지 한 세례 요한이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까? 고통이 정말 심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같이 교회를 섬기던 전도사님을 통해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시다가 마음에 갈등을 느끼는 것을 본 당국에서는 “며칠 동안 집에 다녀오시오. 그래서 부인도 만나고 좀 쉬시다 오세요. 목사님 같은 분이 이런 곳에서 고생을 하시게 되어서 정말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합니다. 댁에 돌아가셔서 며칠을 쉬시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정리해 보세요”라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을 오랜만에 만나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이제 하루 있으면 다시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신사참배 한 번하면 살 수 있는데 그저 머리만 숙이고 마음으로는 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이런 유혹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사모님이 훌륭하셨습니다. 남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채고 “목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힘을 내세요. 가족도 귀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정성껏 모시면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하셨고, 목사님은 결국 믿음을 지키다가 영광스럽게 순교하셨습니다.

주 목사님이 남긴 말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시간의 고난은 참기가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고 배겨 내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1.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3.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아멘

본래 욥이 고난을 당하기 시작한 것은 욥의 번영에 대한 사단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의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욥의 아내를 통해서 욥에게 그의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에 대항해서 그가 비록 매우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가 어떠한 고난을 당하여도 그 자신의 경건한 성품과 태도를 지켜 나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한 고통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다시 말하면 “나는 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 보려고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 범죄했다 한들 이보다 더 고생할 수야 있겠는가?”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엘리후의 답변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절대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 이하를 보세요.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 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5-8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행복이 우리 인간들의 행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시편 16편 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것은 무한한 겸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시편 8편 4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했습니다.
144편 3절에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했습니다. 그 다음 절에 보면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을 보살펴 주시는 것 자체가 황송한 것뿐입니다.

더구나 지난 시간에도 생각했지만 사람은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사야 3장 8-9절에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슬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찐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우리가 심고 또한 그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은 서로가 의존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이나 악에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자신이 불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줍니다. 반면에 한 사람의 경건함은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은 그의 이웃들에게 축복이 되는 반면에 불신실하고 불경한 사람은 그 이웃에게 큰 부담이 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인간에게 고난이 계속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에게 고난이 닥칩니까?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되면 부르짖기는 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 종종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품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 것이 다 기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 중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비로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는 까닭은 올바로 기도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경건한 믿음의 기도, 회개의 기도, 그의 종이 되기를 갈망하는 기도만 들으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기도에는 아무런 약속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했습니다. 이사야 1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했습니다.
잠언 28장 9절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하고 정직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희생 제물은 바로 우리의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왜 우리가 구해도 응답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보세요. 사람들은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대개는 내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나 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요셉이 어려운 일을 계속 당하게 되었습니다. 13년간이란 세월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우리 형들 때문에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구나!’ 생각하고 형제들에 대한 불평과 원망만으로 가슴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고 그 마음은 불행했을 것이고 기회만 있다면 원수를 갚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요셉의 형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형들에 대한 원망이나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자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고난 중에 돌아가는 것은 고난 중에 해야 할 첫째 의무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참된 지혜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밤중에 노래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현재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과거의 노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구원함을 받는 최선의 방법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편 63편 7절에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했습니다. 다윗이 계속적으로 닥쳐오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온유하심과 자비를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03편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밤은 대개 역경의 때를 상징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예수를 전하다가 잡히어 매를 맞고 상처가 나고 옥에 갇히게 되었고 밤이 되었습니다. 온 누리가 어두워지는 밤도 밤이려니와 사실 바울과 실라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어려운 역경의 밤이었습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잡수셨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요 인류를 속죄하는 길이기는 했지만 인간성을 가지신 주님께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여 나가 버렸고 가장 베드로가 신뢰하던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신 주님의 가슴은 어두웠을 것입니다. 주님은 만찬 석상에서 일어나시고 찬미하며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셨습니다. 밤중의 노래였습니다.

밤중에 부르는 노래는 어쩔 수 없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역경 중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순경 중에 모든 것이 형통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 중에 밤중에 앞이 캄캄할 때 진정한 감사의 조건을 찾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원망스러운 생각은 사라지고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믿음이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안심하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과 과학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과학은 갈 길이 분명하고 증거가 확실할 때 움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질 때 그 갈 바를 모르며 그 이유를 모르면서도 따라 갑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신앙이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나가시는데 베드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그는 “제 발을 절대로 닦을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의 하는 것을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했습니다.
신앙이란 지금은 알지 못하며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장차 알 수 있는 날이 오며 그것을 또한 믿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해답을 얻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후에 해답을 얻는 것이 믿음입니다.

밤중에 노래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기도하고 노래했더니 진동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결박이 풀어졌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자결하려던 옥사장은 바울의 만류로 달려와서 그 앞에 부복하였고 그 날 밤에 그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모든 의심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의 노래는 이적을 불렀습니다.
역경이 변하여 선으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역사의 두 가지 요소가 있다면 그 하나는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경 중에 찬송하는 성도의 믿음일 것입니다.
밤중의 노래는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밤중의 노래는 감사한 후에 해답을 얻는 믿음의 노래입니다. 밤중의 노래는 이적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주위 환경이 아무리 캄캄해도 노래를 부릅시다.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끝으로 엘리후는 욥에게 인내와 소망을 가질 것을 권면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나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고난을 극복해 나가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없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되는 것을 다 물을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분명한 해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 갈등과 번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을 때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욥의 경우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것은 때로는 신비하여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이 이런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욥기 17장 15절에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했습니다. 19장 26-27절에서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시련과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일의 시비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의 심판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들은 어둡고 신비로울 수 있으나 결코 불확실하거나 의혹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건들 속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목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가련한 사람을 못 본 체하시는 것 같은 때가 있으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에 이르려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없는 웅덩이와 애굽의 감옥에 갇혔던 요셉의 경우와 가나안 땅에 있던 야곱의 경우와 큰 역경과 재난에 처했던 욥의 경우에 하나님은 모른 척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과 불로 통과할 때가 있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풍요로운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시편 66편 12절에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십니다. 시련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 시련과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훌륭한 처방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믿음과 소망과 인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과 그리고 그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시련과 어두움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때에, 그의 방식대로, 그의 백성들을 건져 주십니다. 비록 그때가 지체될지라도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9편 10절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견디기 어려운 고난에 처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 팔로 이끌어 주실 줄을 믿습니다.

고난 당할 때 약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난 당할 때 캄캄한 밤에 노래하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체험하게 하소서. 아멘.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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