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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새 피조물 (욥 4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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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새 피조물(욥기 41:1-34)

오늘 주신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40장에서는 하마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41장에서는 악어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악어의 놀라움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와 우주적인 주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욥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10-11절에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때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육지나 바다의 괴물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저항하거나 그 앞에 설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미생물로부터 큰 짐승이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자기 소유로 가지고 계시고 순간 순간 그들의 생명을 보전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릴 때도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이여, 나를 하나님의 기구로 최대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교만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적인 교만, 지적인 교만, 물질적인 교만, 심지어 신앙적인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 이르러도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슨 일을 맡든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봉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만물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실 때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소용없이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의미가 있고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꼭 필요하시기 때문에 보내 주셨는데, 중요한 것은 각자가 하나님이 우리를 왜 무엇 때문에 보내 주셨는지 그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사명감입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루를 살아도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파사 나라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에스더를 보세요. 에스더가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자각하지 못했을 때는 왕궁의 규례를 어기는 것이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동족 유대인이 12월 13일을 기해서 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사명을 깨우쳐 드렸습니다. “당신이 바로 이때를 위하여 왕후가 되신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당신이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손을 의탁해서 이 민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 집은 망할 것입니다.” 이때 에스더는 큰 충격을 받고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자각하였고 “그러면 내가 왕 앞에 가겠사오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들어갔고, 멸망 직전의 유대인이 구원받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명이 이렇게도 중합니다. 모세를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24절 이하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20장 22절 이하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에게 온 백성을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사명)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짐승 중에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들에 핀 꽃 가운데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물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온 천지 만물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이 조화는 아름답습니다. 이 조화가 깨어질 때 세상에서는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맙니다.
가령 합창에서 화음을 아름답게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화음이 깨어질 때 불협화음이 되고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아니라 불안과 소란을 줍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악어든지 용이든지 고상한 군마와 마찬가지로 찬탄을 받을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어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다른 모든 피조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떻게 우리 눈으로 볼 때 악어가 아름다워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아름다워 보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누구를 보나 무엇을 보나 사랑의 눈으로 보십시다.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반역하여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자연의 기능이 손상을 입게 되었고 나머지 피조물과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을 보세요. 아름답습니다.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스러운 것을 아름답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솜씨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땅에 속한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므로 이런 지배권을 갖기에 합당했습니다. 아담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었을 때 그 지배권을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에게 반역함으로 그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의 주권자에게 반역해도 자연히 권리를 몰수당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죄가 없었다면 악어와 호랑이가 소나 개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유순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지배권은 첫 아담으로 인해 몰수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지배권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인간을 대표하고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가 되셨습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들짐승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을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 이외에 누구에게든지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진다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루에 세 번씩 동편 창을 열어 놓고 기도하다가 문자 그대로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자들이 다니엘을 잡아먹을 터인데 사자들이 다니엘의 발 아래 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은 회복의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이 됩니다.

이사야 11장 6-8절 말씀을 보세요.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 보면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했습니다. 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인류의 조상을 누가 유혹했습니까? 사단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 원수 사단과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이미 보았지만 사단은 교만합니다. 사납고 잔인합니다. 사람에게 불행을 일으키고 파멸을 가져오는 힘이 있습니다. 사단을 내어쫓아야 우리가 평안히 살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야만 복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사단을 몰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단을 몰아 낼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사단이 맥을 못 쓰고 달아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 바랍니다. 그때 마음속에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가득 차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마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시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나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그 사명을 따라 삽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물을 하나님의 눈으로 아름답게 보십시다.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보십시다. 우리는 다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마귀와 싸워 이김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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