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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이 지나가고 (욥 4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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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 지나가고(욥기 42:1-17)

우리는 그 동안 욥기를 생각하면서 크게 세 가지 문제에 부딪쳤었습니다. 사실 그 누구도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오늘 그 마지막 시간에 그 대답을 찾게 되고 모든 것이 정상화되는 것을 보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는 욥과 같이 경건한 사람이 그처럼 안절부절하며 불평에 가득 차서 투덜대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을 볼 때, 더구나 하나님과 언쟁을 하며, 그에게 불손하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정말 우리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이처럼 실족하였었지만 그가 완전히 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기 정신을 되찾고 회개함으로 자신의 정상적인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욥은 자기가 어려움 속에서 견디기 어려워서 잘못 말했던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의 한 말을 취소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생각이 너무 달라서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에게 낭패감마저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그처럼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서 말할 수 없이 고생하고 있는데 따뜻하게 위로하기보다도 오히려 욥을 책망하고 저주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될 때, 또한 그들이 물론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피차 상호간에 혹독한 비난으로 응수하는 것을 볼 때, 유감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욥기 마지막 장에서 그런 유감스러운 생각이 끝나고 언쟁이 꼬리를 감추고 서로의 비난이 모두 용서 받아 잊혀지고 하나님에 대한 희생 제사와 기도에 동참해서 용납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욥과 같이 그처럼 탁월하게 경건하던 사람이 너무 비참하게 고통을 받으며, 그와 같은 아픔을 당하고 그토록 혹심한 질병과 가난으로 견책을 받으며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정말 욥이 하나님 앞에 무슨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때문이 아닌가 하고 욥을 집중 공격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정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욥은 그 모든 질고에서 고침을 받으며 이전보다 더욱 존귀하게 되고 사랑을 얻어서, 전에 소유했던 것보다 배나 되는 재산으로 부요하게 되며, 그의 고통 당한 마음이 위로를 받게 되며, 전에는 고통과 인내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이제는 크나큰 번영의 본보기가 됩니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와 비난에 대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31장 40절에서 끝이 나고 그 이후로는 욥이 그런 취지로 더 이상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욥의 말은 40장 4-5절에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는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여기서 자기의 어리석은 행동과 무모한 말에 대해서 철저한 겸손을 나타내며, 그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극심할 때 실족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들어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됩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피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심과 그 권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욥은 그제서야 하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반박이 아니라 순종의 모습으로 대답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권세와 지식과 통치가 무제한적이란 진리에 동의를 표하면서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신 말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진리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5절에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하며”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 그리고 온전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불경스레 발언한 사실이 얼마나 철없는 행위였는지를 깨닫고 그 양심에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첫 마디가 ‘지식 없는 말로써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가 누구냐?’였습니다. 딴 말씀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가 죄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제가 그토록 무지몽매한 인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말씀은 저의 폐부에까지 닿았고 제 죄를 목전에 나열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부인하기에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악한 죄였습니다. 저는 지식이 없는 무지한 이치를 은폐시킨 것입니다.
저는 무식하게도 저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자 하며 제 자신의 정당성만 너무 과하게 고집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욥은 고백합니다.

이것은 욥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아주 깊기 때문에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는 하면서도 왜 그렇게 하시는지 그 목표가 무엇인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너무 놀랍기 때문에 그 뜻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며,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견을 낸다는 것은 완전히 우리 자격 밖의 일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중에 있지만, 하나님의 신비가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거기서 만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욥이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은 그 기본자세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 동안은 하나님께 따지는 자세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심히 어려운 질문을 저에게 더 이상 퍼붓지 마세요. 저는 하나님께서 제기하신 수천 가지 질문 중에 한 가지도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훈계를 청할 수 있도록 저에게 허락해 주세요. 그것을 저에게 거절하지 마시고 저의 어리석은 행위와 자만을 책망해 주세요”하는 뜻의 말입니다.

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대하여 귀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 선생님으로부터 주님께 대하여 들은 이야기가 수없이 많습니다. 최근 얼마 전에는 친구들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크심과 권세에 대하여 약간 알고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들은 것만으로는 하나님께 승복해야 할 만큼 제 스스로가 하나님께 굴복하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대하여 들은 것은 제 견해를 말하는 데만 도움이 되었을 뿐, 제 생각 자체에는 충분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로써 저에게 스스로 나타나 주셨습니다. 이제는 제 눈으로 주를 뵙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전에 관념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제 잘못을 참회하고 어리석게 말한 모든 것을 취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의 말씀과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그 백성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욥의 말은 “내가 지금까지 고통을 받아 온 후에야, 내가 이제껏 내 잘못에 대하여 훈계의 말씀을 들어온 뒤에야 겨우 나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뵙습니다”하는 말입니다. 매와 책망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주께서 시련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욥은 회개하는 중에 자기 스스로를 향해 눈을 돌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혹하리 만큼 엄중히 생각했고 그가 범한 죄에 대해서 슬퍼했습니다. 참된 회개에는 가슴 아픈 비통을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통회했습니다. 전에는 욥의 고난이 그를 재에 덮이게 만들었습니다. 2장 8절에 보면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죄악이 그로 하여금 재 가운데 앉게 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 어떤 외적인 고통 때문에 슬퍼했던 것보다도 더 그들의 죄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더러운 죄를 짓고도 죄인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이 그의 죄가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자 그가 깨닫고 얼마나 가슴 아픈 회개를 하였습니까? 시편 51편을 보세요. 다윗은 눈물로 베개를 적셨습니다.
이사야를 보세요. 그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뵙게 되고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발견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욥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께 대해서 귀로 듣기만 하지 말고 눈으로 뵙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아 유쾌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본문 7-9절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변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의로운 사람들이 일시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검은 구름에 가리우며 빛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혹평 속에 파묻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 모든 검은 구름이 걷히고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의로움을 빛같이 나타내며 저희의 공의로운 판단을 정오의 빛같이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욥의 의로움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것은 욥이 그와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공의를 굳게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노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친구이지만 엘리후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후가 다른 세 친구처럼 욥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있은 것이 아니라 중재자로서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중재하는 일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든 받지 못하든, 하나님에게는 칭찬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고, 욥의 친구들은 굴욕을 당합니다. 사실 우리는 논쟁이 벌어질 때 누가 정당한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하십니다. 고난받은 욥은 크게 기림을 받고 명예스럽게 됩니다. 수적으로 말하면 3대1의 열세였지만 하나님을 자기편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천 명이 자기를 대적한다고 해도 결과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언제 나타나셨습니까? 7절에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욥으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시고 그를 낮추시고 그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 다음 하나님은 욥이 올바르게 말한 부분을 인정해 주시며 그를 위로하시고 그에게 존귀를 돌리셨습니다. 그때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심판하고 정죄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인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찢으신 그가 치료해 주시며 치신 그가 우리를 싸매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때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셔서 그의 무한하신 자비를 따라 긍휼을 베푸십니다. 욥이 스스로 낮아질 때 하나님은 욥을 높이셨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십니다. 과거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욥에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은 욥을 자기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7-8절에 네 번씩이나 그렇게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내 종”이라고 부르시는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생각해 보았느냐? 그가 비록 곤궁하고 경멸을 받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내 종이며 그가 형통할 때보다 못지 아니하게 지금도 내게 친근하다. 그가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혈기의 지배를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구나 그가 나와 논쟁하며 내 하는 일을 불평했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철회했어. 그러므로 욥은 여전히 내 종이야”하는 말씀입니다.
사단은 욥이 위선자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악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용납하는 자들을 인정해 주실 것이며 그들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그의 반대자들의 행위보다 뛰어나게 “자기에 대하여 정당한 것을 말했다”고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여깁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축복의 기준을 세상적인 것, 보이는 것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이 인간의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종 욥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철저하게 지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을 괴롭히고 정죄한 그의 친구들이 먼저 욥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들이 욥에게 사과하게 될 때까지는, 하나님은 결코 그들과 화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동안 주고받은 비난은 너무 신랄했지만 이제는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끝으로, 10-17절 말씀에서 욥이 다시 회복된 것을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욥의 고난을 종국에 가서 어떻게 마무리하셨는지 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생각하는 서두에서 고통 중에 보여준 욥의 인내를 귀감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끝에서는 그 귀감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격려로서 그의 고난을 따라 오는 복된 결과와 고통 뒤에 회복된 번영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 후에 받은 놀라운 번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 나라의 영화와 복락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현재적인 고통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지만 저 하늘 나라에서는 마침내 영화와 복락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 이하에 보면 사도 요한이 하늘 나라의 모습을 보았는데 14만 4천의 구원받은 무리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 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눈물을 다 씻어 주셨습니다. 욥이 그 당시 동방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자였음에도 그의 나중 융성은 처음보다 갑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즐거움을 누리지만 하늘 나라에 가서의 즐거움과 만족은 이 세상의 즐거움과 만족의 배 이상이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욥은 시험을 잘 참았습니다. 그리고 옳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자비의 길로 돌이켰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욥의 고통은 사단의 시기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억제하셨고, 그의 회복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이루어졌지만 사단은 이를 반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욥이 왜 괴로워했었습니까? 육신적인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여겨져서 그렇게 아파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지지하시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암담하고 두렵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유쾌하고 소망을 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고난을 당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유리하도록 변상해 주셨습니다. 이자에 이자를 더하는 복리 이자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하나님 때문에 손실을 입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11절을 보세요.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 왔습니다. 욥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족도 재건되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도 욥과 같이 시험을 잘 참고 이겨서 모든 악이 선으로 바꿔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셉은 13년간을 노예로 고생했지만, 이것을 잘 참고 이겼더니 80년간 애굽의 총리로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 세상의 잠시동안의 고난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을 안겨 줍니다. 슬픔은 하룻밤 동안 지속되지만 기쁨은 밤이 없는 낮에 임합니다. 고통은 짧지만 안식은 깁니다. 투쟁은 짧지만 승리는 영원합니다. 십자가는 일시적이지만 면류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은 언젠가는 끊임없는 기쁨의 풍요로운 열매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오는 시련을 잘 참아 우리도 욥이 누린 결말처럼 생명의 면류관 받게 하옵소서.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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