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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에 대한 믿음의 사람 (애 03: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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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성도들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수수꺽기는 왜 하나님이 자기를 믿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떨쳐 버리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더욱이 믿음이 좋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예상외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볼 때 항상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독립 애국지사들의 자녀들이 가난의 고통에서 살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순교자들의 자녀들에게 계속되는 고통의 나날을 주시는 것을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 가운데 한 목사님의 경우를 보면, 그가 스스로 쓴 글을 보면 하나님은 왜 그에게 그런 고통을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그는 어린시절 동생이 불꽃놀이를 하다가 심한 화상을 입고 죽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동생이 벌목하는 현장에서 쓰러지는 나무에 치어 비명에 가는 슬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때는 그 누구보다도 처참한 경험을 당하였는데, 가족은 공산당에게 학살당하고, 자신은 23번이나 끌려가 구타당한 끝에 인민재판을 받고, 그는 구사일생이 아니라 백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년전에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있던 동생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후 사랑하던 딸마저 위암으로 부모의 곁을 떠났고, 이어서 동생 내외가 함께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아픈 심정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참담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울고 있다...옆을 보면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같고...과거는 회한과 슬픔 뿐이고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라고.... 바로 이 목사님은 대학생 선교회의 김준곤 목사님이십니다. 그토록 훌륭한 목사님에게 잇달아 일어난 비극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
각하게 됩니까? 왜 하나님은 당신의 귀한 종에게 그런 고통스러움을 안겨 주시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고통은 누구에게나 삶과 함께 있는 법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예외 일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고통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과 함께, 그 고통에서 자기를 바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왕왕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또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고통이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신앙의 성숙도가 구라파 교회들에 비하여 뿌리가 없다는 말을 듣는 이유가 바로 이런것입니다. 교인들 숫자는 많으나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런데서 기인되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고통은 일반적으로 동일하게 옵니다. 그리고 실패도 꼭 같이 옵니다. 어떤 면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이 항상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에게 볼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예레미야는 역사상 가장 큰 고통을 경험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평생동안 연속적으로 고난당하는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온갖 박해를 무릎쓰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했지만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를 거짖 예언자라고 구박하고 모욕하고 구타하고 투옥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되어 처절한 고통을 당하다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불탔으며 거리는 무참히 죽은 시체들로 메어졌습니다. 심지어 부인들은 극도의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직스러운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고통의 현장을 보면서 슬픔의 탄식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라고 후세의 사람들이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보는 시각이 문제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 때 아픔을 느끼지 않고, 실패를 맛보지 않고, 그저 만사형통으로 잘되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오면, 그것을 고통이라고 보고, 그 고통은 곧 불행한 것이라고 그렇게 보아서 고통이라면 무조건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고통이 자기에게 오면, 곧 자신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달라야 할 점이 있습니다.

2. 고통의 현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속에서 부르십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들로 만드십니다. 고통 없이 세상을 살 수 없지만 그 고통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더 큰 가치(구원)를 위하여 자신이 고통의 멍에(십자가)를 스스로 메었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부르는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자기를 보게 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땀과 눈물의 결정체입니다. 땀과 눈물의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보람되고 가치있는 것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보석도 공예가의 땀과 고통스러운 인내에서 비로서 값진 가치의 보석이 나오듯이 고통을 격은 후 사람도 성숙한 사람이됩니다. 그러므로 믿음만 좋으면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고통을 불행으로 보는 시각에서 고통의 다른면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성남에서 맹인교회를 목회하는 김성환 목사님의 경우를 보면,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실명을 했습니다. 얼마나 그의 고통이 심하였겠습니까! 몇번이고 삶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후 정상적인 부인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어서 오늘까지 목회에 전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생에 있어서 고통이 부정적인 요인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더 깊게 만들고, 보람과 감격과 감사를 낳게 합니다.

3. 믿음의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고하였습니다.(3:25-28) 본문대로 보면,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메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불가항력(不可抗力)으로 자기에게 오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는 말은 그것을 일찍 깨닫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을 비관 속에서 다 소진하기 전에 젊어서 <인생을 살아갈 힘>이 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시119:71) 하나님은 고통 속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고통의 십자가로) 영광스러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고통을 통해서든지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원하는 자녀로 만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사이비적 신앙입니다. 우리가 고통없이 세상을 살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었던 신앙입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믿음이었습니다.

75세때에 친척과 고향을 떠나 그것도 아무런 보장도 없는 정처없는 나그네의 길을 나선다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수없는 나그네의 설음과 가난의 고통과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받치라는 인생의 최고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그리고 아내를 먼저 보내는 사별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 고통 속에서 동행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이 격지 못한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그런 고통의 과정에서 자기 내면에 있는 세속적인 찌꺼기가 소멸되어 순금 같이 단련된 인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고백하기를 '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정금같은 인격으로 단련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고통은 서재에 있는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요한 칼빈도 '고통이 없이 형통하기만 하고 근심거리가 없다면 믿음은 없어지고 말 것이며, 우리의 소망을 시험해 볼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일부러 즐기려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을 통해서 매우 값진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체험적 고백이었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영원한 섭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세계적 명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시력(視力)이 대단히 나빴다고 합니다. 그는 지휘자가 되기 전에는 바이올린 제일 주자였는데, 연주시에 악보가 잘 보이지 않아 언제나 고충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악보를 다 외웠다고 합니다. 눈이 나쁜 탓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케스타라의 특성이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다른 파트의 악보까지 다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지휘자가 사정이 생겨 연습장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대신 지휘를 할 수 있을까? 단원들이 논의를 하다가 악보를 다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를 앞에 내 세웠습니다. 그가 악보를 다 외우고 있었으니 얼마나 자신 있게 지휘를 했겠습니까?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로하여금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만일 그의 시력이 좋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섭리하시고 계신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파종이 없으면 수확도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본 사람들에게는, 기쁨으로 단을 걷우워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하여 감사를 낳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값싸게 좋은 것들을 얻으려고 합니다. 수고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고 잘 되기만를 바라보고 기다립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싸구려 믿음입니까? 물품도 싸구려 물품은 무엇인가 불량품이거나, 모자란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가를 지물하지 않고 얻으려는 심성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탄은 자기에게 절 한 번 하면 예수님에게 다 세상 권세를 넘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구디 질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하면서 메시야직을 완수하기 보다, 이왕 당신에게 넘겨줄 것인데 내게 한 번 절하면 다 넘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가치를 얻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무시한채 일이 쉽게 잘 풀리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눈물 없이 걷우워 드린 것은 다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게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를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옥한흠 목사님이십니다. 그가 목회중에 겪었던 것을 쓴 글을 보았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인중 40대 중년 부인집사님이 있는데 언제 보아도 웃는 얼굴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그에게는 전혀 걱정이 없이 사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엄마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견디기 어려운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집사님! 따님 때문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세요. 정말 힘이 드시지요?' 라고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은 환한 얼굴로 '목사님! 그가 얼마나 축복인데요, 그애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이해할 수가 있고요, 게으르고 싶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으니 제게는 큰 은혜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그렇게 물은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아직도 겉도는 믿음이 아닌지?..... 속 알맹이 없는 쭉정이 믿음들이 아닌지?.....고통 없이 믿으려고 한 믿음이 아닌지?..... 여러분! 진짜 귀한 믿음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진 믿음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무엇인가 숨겨 놓고 계시는 보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햇살뿐 아니라, 구름과 폭우가 있어야만 자연의 풍요로움이 있듯이 우리의 삶도 맑은날만 있어야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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