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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레미야서에서 무엇을 설교할것인가? (렘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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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에서 무엇을 설교할것인가

I. 들어가는 말

굳이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예언서 설교에 인색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언서 설교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인지, 아니면 못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언서도 설교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언서 설교를 위해서 먼저는 예언, 예언자, 예언서에 대한 간략한 이해와 대선지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의 역사적 배경과 전체 구조를 살펴보고, 각 예언자의 핵심 메시지를 간추려서 오늘의 상황에 대한 예언자의 설교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II. 선지서 이해하기 위한 기초 지식

1. 성서의 예언은 예언(豫言)이 아니라 예언(預言)이다

우리는 보통 예언이라 하면 앞날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 때문에 예언을 예언(豫言)으로, 다시 말해서 '장래 일을 미리(豫) 말하는 일(言)’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어의 '예언'(prophecy)이라는 말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리기’(a declaration of something to come)로 뜻풀이가 되고, 흔히 ‘내일 일을 미리 말하기’(예측, 예고, foretelling/prediction)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구약 성서의 예언에서도 이러한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약 성서의 예언은 물론 신약 성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장래 일을 미리 말하기' 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전하기' 라는 뜻이다. 즉 성경의 예언은 한자말로 ‘맡길 예(預)’와 ‘말씀 언(言)’의 결합으로 말 그대로 '맡겨준신 말씀' 이라는 것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전달하는 자’이다.

2. 예언자는 저술가가 아니라 선포자이다

구약 성서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한다. 이 예언자들은 전기 예언서에 등장하는 주전 8세기 이전에 활동한 문서 이전 예언자들과 후기 예언서에 나타나는 주전 8세기 이후의 문서 예언자들로 나뉜다. 문서 이전의 대표적인 예언자들로는 사무엘(삼상 3:2), 나단(삼하 12장), 미가야(왕상22장), 엘리야(왕상 17-19장, 21장; 왕하 1-2장), 엘리사(왕하 1-2장) 등을 들 수 있다. 문서 예언자들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라는 세 명의 대예언자와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다. 요나, 미가, 나출,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라는 열두 명의 소예언자들이 있다. 주전 8세기 이전에 활동한 예언자들이 남긴 신탁(예언)은 독지적인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만 기록으로 남겨져 있기에, 그들은 문서 이전의 예언자로 불리운다. 이에 반해 문서 예언자란 명칭은 그들의 신탁이 글로써 정리되어 그들의 이름으로 묶여져 남게 된 예언자란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가 저술한 것이라기 보다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이 상당시간 흐른 뒤에 수집 기록 정리된 것이다. 즉 예레미야의 신박이 모아진 것이 오늘의 예레미야서인 것이다. 예언자들은 원래 저술가가 아니다. 그들은 말씀의 선포자이다. 그들은 특정한 상황에 처한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3. 예언서는 인간의 자서전도 위인전도 아니며, 역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서에는 예언자의 경험, 행동, 또는 고난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서전이나 위인전의 주요구성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언서의 중심 주제는 예언자의 운명이나 생애가 아니다 .만약 예언서가 예언자들의 삶을 그린 글들의 모음이라면 예연서는 예언자의 말이나 행적을 연대순으로 배열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예언자의 출생과 죽음에 대하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언서는 인간 아무개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에게 붙잡힌 예언자 아무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예언서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예언자의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지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서는 한 예언자의 자서전도 아니며, 위인전도 아니다. 예언서는 예언자들을 통한, 그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모아진 것이다.

2. 예레미야(주전 627/6-585년)

1) 활동 시기와 출신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의 통치 제 13년, 즉 주전 627/6년에 소명을 받았다(렘1:2-3, 3:6). 그는 대략 650년 경에 태어났고(1:6), 약 585년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예언 활동 기간인 주전 627/6년에서 585년 간의 40년 동안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성소 단일화 개혁(621년), 앗수르 세력의 몰락과 바벨론 세력의 상승, 이 과정을 저지하려는 이집트의 노력, 그리고 예루살렘의 첫 번째 함락(587년)과 주전 587년의 예루살렘의 최종적인 파괴와 같은 쓰라린 사건들을 경험한다. 그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경험한 유일한 예언자였다.
그는 자신이 제사장은 아니었으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힐기야가 아나돗의 제사장이었다(1:1). 예레미야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아나돗이다(참조 왕상2:26). 따라서 그는 이사야와는 달리 수도 예루살렘 출신은 아니었고, 아모스나 미가와 같이 시골 출신이었다.

2) 전체 구조

예레미야의 전체를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1-25장:주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심판의 말
26-29장:거것 희망과 거것 예언자
30-33장: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구원의 말
34-38장:왕과 백성에 대한 마지막 경고
39-45장:예루살렘의 몰락과 살아 남은자의 운명
46-51장: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말
52장:부록(왕하 24-25장에서 유래)

3) 예레미야의 핵심 메시지-한국 교회를 향한 예레미야의 설교

① 성전 설교:“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7:11)

예레미야 7장은 그 유명한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 26장에서도 다시 한 번 언급된다. 7장은 성전 설교의 내용이고, 26장은 그 성전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을 기록해주고 있다. 26장 1절에 의하면 이 설교는 여호야김 왕의 즉위 초, 즉 주전 608년에 행해졌다.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주전 609년은 충격적인 한 해였다. 이때 유다의 미래를 약속해주는 상징으로 보였던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하여 전사한 것이다(왕하 23:29-30).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야웨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를 볼 때 요시야 왕은 유다 역대 왕 가운데 최고의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전사는 한 개인의 죽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유다라는 한국가의 운명이 뿌리채 흔들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희망의 상징이었던 요시야의 죽음 이후 백성들은 당연히 불안감에 사로잡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야웨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보루로 생각했다. 이는 주전 621년에 단행한 요시야의 종교 개혁(특히 예배 성소의 단일화 정책)으로 지방의 모든 성소들은 파괴되었고, 예루살렘 성전만이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왕하 23:5).
'또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버렀으니 이 산당들은 부윤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편에 있었더라'(왕하 23:8).

이제 유다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은 예루살렘 성전 하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대는 시온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야웨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한 장소인 시온을 택하셨고, 그곳에 현존하시기에 시온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나라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안전한 곳이라는 것이 시온 신앙의 골자이다. 이러한 신앙은 시온 시편이라고 불리우는 시편 가운데 하나인 시편 46편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 성 (시온 성)안에 계시니, 그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동틀녘에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민족들이 으르렁거리고 왕국들이 흔들리는데, 주님이 한 번 호령하시면 땅이 녹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시 46:5-7, 표준새번역).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유다 백성들은 '야웨의 전이라, 야웨의 전이라, 야웨의 전이라'(7:4)라고 노래하며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든다. 이들은 성전에 들어와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7:10)고 확신한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설교를 한다. “야웨의 전이라”는 청중들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7:8-10).

예레미야는 윤리적인 부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안전 의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을 비난한다. 그는 예배와 윤리를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당시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온갖 부정한 행태에 대한 각성도 변화도 없이, 그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재물을 많이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야웨가 계시는 ‘야웨의 전’(히)으로 보았지만, 예레미야에게 이 성전은 야웨 하나님이 이미 떠나버린 건물인 ‘이 집’(히)에 불과하였다(7:10). 예레미야의 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도적의 굴혈’로 본인 것이다. 성전을 찾는 사람들이 거룩한 성전을 그들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강도의 은신처' 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야웨는 이미 당신의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다는 것이다. 온갖 부정한 일로 더럽혀지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머물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 성전이 은신처와 피난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건물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야웨 하나님이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하나님이 떠났다. 그곳은 더 이상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전을 포기하실 수도 있다. 예레미야는 이 성전 설교에서 죄악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전에 안주하시며, 그들에게 변함없이 구원을 허락해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성전을 포기하시고 더 나아가 그 성전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성전은 어떠한가? 부정한 돈을 세탁하는 것과 같이 세상의 온갖 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탁해주는 '죄의 세탁소'로 전락된 것은 아닌가?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부패와 연류된 사람가운데 교회의 중직자들이 약방의 감초(?)같이 끼여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부인할 수 없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삶의 변화도 없고 회개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은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 예레미야가 한국 교회를 들여다본다면 이미 하나님이 떠나버린 성전들은 없을까? 교회는 성도의 삶을 무조건 인정하며 죄를 덮어주고 위로만 하는 곳이 아니다. 잘못된 삶의 태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바로 잡아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야 거룩한 하나님이 그 교회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강력한 도전이 되고,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지친 사람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되어야 한다.

② 예레미야의 탄식:“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렘 20:18)

예레미야서에는 다른 예언서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탄원의 형식으로 된 예레미야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이 대화에 따르면 예레미야라는 한 인간과 그가 받은 예언직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사람과 사명 사이의 갈등은 어떤 예언서에서 보다도 크고 또한 너무 고통스럽게도 그를 내리누른다. 그는 자기의 사람됨과 예언직의 수행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독과 고난과 비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탄원과 원망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이 본문들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에 비길 수 있다하여, 전통적으로 '예레미야의 고백'(Konfessionen Jeremias)이라 부른다.
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다섯 본문이 예레미야의 고백에 속한다(렘 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8).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은 예레미야의 고백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 부르심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것을 거절하였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렘 1:5-6, 표준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설득시키신다. 하나님의 그와 함께하여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주겠다. 나주의 말이다'(렘 1:7-8, 표준새번역).

예레미야는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존재였으며, 이 붙들림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로서의 소명과 인간으로서의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이 마지막 고백의 서두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꾀어서, 그 꾀에 넘어갔고, 하나님이 자신보다 힘이 세져서 자신을 이기셨기에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해낸다(20:7). 하나님께 꼼짝없이 붙들린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언자의 입에 주신 말씀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가 전해야 하는 야웨의 말씀은 줄곧 ‘강포와 멸망’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동족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치욕과 모욕거리'가 된다(20:8). 이 때문에 차라리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하려고 결심도해 보지만(9절),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간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 속에까지 타들어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합니다' (9절, 표준새번역).

그는 인간적으로는 포기하고 싶어도 하나님에 의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다가오는 핍박은 더욱 거세어지며, 이젠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조차도 그의 타락을 유도하며 그가 실수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10절). 이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적들에 의해 에워싸임을 당하며, 또한 얼마나 외롭게 예언자직을 수행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결혼조차도 포기해야 했다(렘 l6:1-2).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다. 철저히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그는 탄식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탄식은 점점 더 고조되어 드디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18절, 표준새번역)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하며 절규하며 탄식하는 장면으로 예레미야의 모든 고백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에 의하면 인간적인 면만으로 볼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이다.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렘 15:15). 그러나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참 예언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참 예언자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오늘도 참되게 말씀의 심부름꾼으로 제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괴로움이 더해져서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위로와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말씀의 심부름꾼들이 예레미야만큼 고통당하며 조롱을 받아보았는가? 오히려 조그마한 손해에도 얼굴을 붉히며 자존심을 들먹이며 마음상하기 십상인 것이 오늘의 우리 모습이 아닌가? 현대판 말씀의 심부름꾼들인 사람들이 이 땅에서 영광과 존경만 받고 있다면 예레미야를 보고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그대로 전하며 그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현실적 이익보다 손해가 더 많이 온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믿고 잘 따르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것만 가르쳐왔다. 그러나 인생의 방정식은 수학의 공식같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하나님을 적당히 믿고 세상과 지혜롭게(?) 타협하지 않는 한 그러한 만사형통은 불가능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를 때 고통이 따름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믿음 때문에 손해보는 것을 감수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그 고통과 손해는 정직한 삶이 치루어야 하는 대가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점을 그의 삶으로 설교한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벧전 3:17).

IV. 나가는 말

우리는 위에서 '대선지서에서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세 대예언자들의 메시지를 각각 두 개씩 추려보았다. 즉 주전 8세기 경에 활동했던 이사야에게서는 ‘예배 비판과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믿음’ 을, 주전 7세기 경에 활동했던 예레미야에게서는 ‘성전 설교와 예레미야의 탄식’을, 주전 6세기 경에 활동했던 에스겔에게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우상숭배와 사람을 찾습니다’를 정리해 보았다. 예언자의 메시지들은 오늘날의 상황과 시공간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직접하는 말씀으로 들린다.

차준희/순신대 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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