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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 4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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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28세에 사회주의 혁명 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가 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를 포함한 세 사람이 기둥에 묶였는데, 그는 가운데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최후의 5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5분을 어떻게 쓸까 고민했습니다. 2분은 형장에 같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하는데 쓰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정리하는 데 2분, 그리고 1분은 하늘과 땅, 산과 들판을 둘러보는데 쓰자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과 인사를 하고 가족을 생각했는데 2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3분이 남았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지난 28년이란 긴 세월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정말 인생을 가치 있게 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금속성이 났습니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3분을 예정대로 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 손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난 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형 순간에 느낀 시간의 소중함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생을 스스로 물으며 살았습니다. '이 5분을 어떻게 쓸까?'
우리도 항상 그와 같은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고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인디애나 주의 석회석 채석장에서 9년 간 일해온 릴리엄. E. 콘스터불이라는 사람은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들이 있었으며, 채석장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지금까지는 인생을 덧없이 살아왔다. 앞으로는 좀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해보기로 하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해보고 싶어하고 아울러 보람이 있는 일은 변호사 일이라고 생각하여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인디애나 대학에 입학하여 학교에 다니는 한편,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채석장에서 하루에 8시간씩 계속 일을 해나갔습니다.
1966년 그는 인디애나 법대를 4점 만점에 3.95점으로 졸업하여 그가 하고 싶은 변호사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단 30분 동안이라도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이 변호사가 된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채석장에서 9년 동안 일한 것이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금은 주의 일을 하기에 너무 늦었다거나 늙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흰 캔버스 위에 색을 입히고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자화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건 나이가 몇이건 간에, 불행하고 스스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초상은 여전히 인내심을 갖고 그 그림을 완성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안경줄을 배꼽까지 내려뜨린 할아버지가 옆자리의 진주 목걸이를 한 할머니에게 나이를 묻습니다. 예순 둘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감탄합니다.
'좋은 나이요. 나는 예순 일곱인데 내가 당신 나이라면 못할 게 없을 거요.'
40살 때 나는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는 50살이고, 10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못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데 나이 때문에 망설여진다면 10년, 아니 딱 5년 후 내 나이와 그때 가질 생각들을 먼저 헤아려 보기로 했습니다. 뭐든지 시작할 때가 가장 빠릅니다.
미국의 샤갈’로 불리는 리버만이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여든 한 살에 그림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리버만은 아홉 살 때 단돈 5달러를 들고 미국에 이민을 와 맨해튼에서 과자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리버만은 일흔 네 살에 은퇴한 후 노인정에서 바둑을 두며 소일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둑 파트너가 약속을 어겨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봉사요원이 말했습니다.“그림을 한번 그려보시지요”
리버만은 화실을 찾았고 그때부터 10주간 교육을 받고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나이 여든 한 살 때의 일입니다. 화가 리버만은 일약 ‘원시의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로 불렸고 그림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는 백 한 살에 스물 두 번째 개인전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시도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그 어떤 일도 늦은 것은 없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그 시점이 가장 빠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깊은 생각과 철저한 준비 끝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면 그 때가 언제이든 가장 빠른 것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꾸물거린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불러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나오는 일이 없습니다.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끝나는 것입니다. 꾸물거리는 것과 신중함과 다릅니다. 꾸물거리는 것은 게으름의 일종이고, 잘못 밴 습관의 하나입니다. 버릇처럼 꾸물거리다 한번 시간을 놓치면,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되도록 빨리 시작하십시오. 빨리 착수할수록 빨리 성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을 하다 보면 의외로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결코 편치 못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게으름을 경계하고, 버릇처럼 내일로 미루며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지런해야 빨리 시작할 수 있습니다. 빨리 시작해야 가장 먼저 앞쪽을 내다보는 시야도 트이고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생깁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지나간 삶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고 잘못된 선택 이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축복일 것입니다. 잘못된 결정으로 휘청거리는 사업을 그 결정 이전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통 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람이 그 쓰라린 기억을 씻어낼 수 있도록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학업 성적이 뚝뚝 떨어지면서 어느덧 중요한 시험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한 학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는 데 정신 없이 바빠서 인생의 민감한 시기에 있던 아이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이제는 다 자란 아이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아픈 마음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어릴 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입니다. 내가 다시 한번 결단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다가 중단한 말씀묵상, 아침 운동, 선교 헌금, 영어 공부, 중보기도 사역….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험프리는 인생의 말년에 암과 투병했습니다. 그는 항상 새 출발의 정신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암과 투병하면서도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았습니다. 험프리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은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역경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극일 뿐이다. 역경은 '약간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는 문제'일 뿐이다. 사람들은 예배 때 축도만을 기다린다. 예배가 시작될 때 가슴 설레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나는 아직 한번도 고별연설을 한 적이 없다'.
새 출발은 항상 장엄합니다. 새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창공을 날 때가 아입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도 아닙니다. 새가 창공을 날기 위해 깃을 활짝 펼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돛단배가 먼바다에 출항하기 위해 돛을 활짝 펴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웁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출발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시작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 부활하신 주님의 첫 말씀은 '왜 울고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은 책망이 아닙니다. 격려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새 출발의 선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은 포로 수용소에서 짐승보다 못한 혹독한 취급을 받으며 나날이 생명을 연장해나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삶의 자리에서 그들은 “비록 지금은 어두운 밤이라 할지라도 내일 아침에는 태양이 떠오를 것을 나는 믿는다. 비록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셔도 하나님이 계심을 나는 믿는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700년전 이스라엘은 나라의 멸망과 포로생활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위기로 보여질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 성벽도 파괴되고 모두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현실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포로생활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새해’라는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역시 ‘새 날’에 대한 기대도 없었습니다.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신앙적 위기감과 절망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유민이 아닌 포로의 신세일 뿐입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저버린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여겼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홍해를 가르고 건져내었다. 지금 너희는 과거의 추억에만 사로잡혀있지 않은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이다. 전에는 홍해를 갈랐으나 이제는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내고 강물이 흐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위기를 끝나게 하시고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시고 포로를 귀환시키며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케 하시고 재건하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현실은 마치 사막이나 광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네 가지를 당부 하고자 합니다.

첫째.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18절 말씀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문맥을 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이전 일과 옛적 일은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8절 말씀을 두 가지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는 과거의 좋지 못했던 일은 최대한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과거의 좋았던 일은 최대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과거의 좋지 못했던 일은 최대한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주를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내가 나를 저주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의 좋지 못했던 기억을 끊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저주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기억을 끊어줍니까? 내가 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내가 끊는 것입니다. 내가 끊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아무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좋지 못한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내가 새로운 인생, 넉넉한 인생을 살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반대로 과거의 좋은 일은 최대한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명절에 친척들 만나면 섭섭함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섭섭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섭섭함을 자주 느끼는 분이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사람은 대개 부족한 존재이지만 악마적인 존재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대개 좋은 기억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그 기억들을 간직하면서 무엇인가 섭섭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을 지워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생각을 조금 달리 하면 섭섭한 일보다 고마운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매사를 섭섭하지 않게 보기로 작정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짜 문제는 섭섭한 일은 오래 기억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고마웠던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섭섭한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되고, 고마운 일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 보면 상처투성이의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생각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많아지고 우리를 통해 창조적인 일이 일어날 기회를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이제까지는 피해자인줄로만 생각했지만 내가 가해자였을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시야를 넓혀서 생각을 하는 순간 나 자신의 존재가 회복되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 다음에야 마음에 속에 놀라운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평안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일은 기억하고, 나쁜 일은 잊기를 원하십니다.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하셨는데 '생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결과만이 주어질 뿐입니다. 성공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주어집니다. 미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얻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진해나가야 하는데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일'이 '새 날'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을 소망하며 사십시오.
19-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니라.'
인생은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약속을 믿으며 사십시오.
18절을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지만 19-20절을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전에 있었던 일의 경험과 그 그림자를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자녀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으십시오. 때로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가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까지도 멋지게 활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 속에서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심령에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과거의 안 좋은 경험은 참고만 하십시오. 과거의 안 좋은 경험을 믿으면 의심 많은 인생이 됩니다. 경험을 의심으로 발전시키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과거의 좋은 경험은 내일의 믿음으로 발전시키십시오. 그런데 과거의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찬 새 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신뢰하며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시험에 빠질 수 있고, 몸을 불사르도록 충성하고 헌신 봉사하는 사람도 시험에 빠질 수 있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절대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내일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그 새로운 일의 결과는 형통함과 풍성한 축복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새 일이 나를 통해 행해지도록 준비하는 심령이 되십시오.

셋째, 새 날을 바라보고 새 일을 빨리 시작하십시오.
성공 비즈니스의 신화적 인물인 로스 차일드가 미국에서 사업을 확장할 때 부사장을 불러서 질문을 합니다. “미국의 대규모 지사를 설립하고자 하는데 자네는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부사장은 심각하게 생각한 후 “한 보름 정도가 걸릴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지사장을 불러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한 사흘 정도가 필요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답이 성에 차지 않던 로스 차일드는 장래가 촉망되는 평사원을 불러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원은 활기차게 대답했습니다. “회장님, 이 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이 젊은 사원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최대의 갑부 윌리엄 줄리어스였습니다.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내일을 기대하고 마음으로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도약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 날’을 바라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새 일’을 믿음 안에서 확신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일어서서 ‘새 날’과 ‘새 일’을 하나님과 함께 일구어 나갑시다.

넷째,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 가며 사십시오.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제일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절대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답을 바라서도 안됩니다. 절대 충성하고 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만나도 우리는 무조건 찬송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실지라도 찬송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나를 잡아 잡수신다고 해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추호도 하나님 앞에 보상을 바라거나 어떤 권리 주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찬송하라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입술을 주셨다고 하는데, 그 입술로 원망하고 불평이나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원망은 안해도 입에서 항상 달라고 하는 말만 나와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을 닥쳐도 찬송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은 못해도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의 목적을 100% 달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며 봉사할 때 복을 지나치게 생각한다거나, 보상을 지나치게 생각한다거나 봉사와 헌신 뒤에 숨겨진 어떤 의도와 목적이 전혀 없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충성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고상한 충성을 한다고 해도 그 충성의 최종 목적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충성에 목적과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을 위해서 흘린 땀과 피눈물은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반드시 보상해주신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보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창조의 목적에 어긋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인간들을 어쩔 수 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상을 목적으로 삼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의 적절한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의 원리 하에서 하나님이 틀림없이 보상하신다는 사실만을 알고 묵묵히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는 모습만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며 사시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사시고, 이웃을 나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삼지 말고 어떻게 하면 저를 이해하고 저를 섬길까 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웃은 우리와 같은 처지의 나그네이고, 우리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 돕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항상 믿고 새로운 일을 기대하며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십시오. 그렇게 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루빨리 새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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