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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 (사 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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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이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고 했을 때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목숨을 걸고 밤낮 삼 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사십 일이 지나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 요나의 경고를 듣고 온 니느웨 성이 무엇을 했습니까?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금식하며 부르짖어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그들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소집하고 함께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께서 친히 물리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무엇보다 먼저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금식,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라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금식은 어떤 것인가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릇된 금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함께 살피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은 무엇입니까?

1. 마음을 찢으며 애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다 금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 금식이며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서 스스로 일정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금식입니다. 음식이 없어서 먹지 않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굶주림입니다. 또 경건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하는 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으니'(요엘2:12)

2.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피압제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은 참 회개로 이어져야 하며 참 회개는 모든 사람을 불의와 불법의 사슬로부터 풀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인 행위인 금식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힘있는 자들의 착취와 억압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었고 또 배척을 당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8장 6절, 7절 말씀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흑암의 결박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는 “억울하게 묶인 이를 풀러줘라”는 말입니다. 사람 억울하게 얽어매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멍에의 줄을 끊어 주어야만 합니다.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금식하며 절약한 음식을 이웃에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3. 이웃을 구제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참된 금식이란 참 회개로 말미암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금식이란 이 험한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삶의 연대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연대를 사도 바울은 '위로'라는 말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언제 어디서나 기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 바울도 마게도냐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마치 막다른 골목에 갇힌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그를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와 고통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심한 좌절감을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7:5-7)

4.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만 보이는 것입니다.(마6:18)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금식에 나타난 종교적인 위선의 탈을 벗겨버리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말씀에는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의무 사항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아주 분명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머리도 흐트러뜨리고 슬픈 기색을 띠면서 그렇게 초췌한 모습을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6:16,17)
예수님께서는 금식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외식하는 자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되는 은밀한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사실 금식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을 갖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금식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나 베드로처럼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이 세상의 고통의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역사의 현장으로 담대하게 뛰어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올바른 금식은 그 어떤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서의 어떤 상급에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올바른 금식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하나님의 역사를 깊이 체험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금식 그 자체,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야말로 그 어떤 상급보다 귀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올바른 금식은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내 유익만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온전히 맡김으로써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풀기 어려운 문제나 지기 힘든 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금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합시다! 그 옛날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그랬던 것처럼 금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합시다! 그 옛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식하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자비로운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릇된 금식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입니다.(마6:16-18)

어떤 여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매일 하루 한 끼씩 금식합니다.”“참 잘 하셨습니다. 그럼 언제 금식을 하십니까?”“예, 아침에 금식을 합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남편이 한 마디 거듭니다. “‘아휴 목사님 말도 마세요. 이 사람은 요 아침 금식한답시고 점심때가 되면 다른 사람의 두 배 세 배 먹어요. 그래서 금식을 해도 살이 안 빠집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믿음 때문에, 기도하려고 금식하는 줄 알았는데 살을 빼려고 금식을 합니다. 요즈음 이런 것을 금식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다이어트를 위한 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굶식‘입니다. 그래서 밥만 굶는다고 다 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식도 바르게 해야지 잘못 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은 16절에서 잘못된 금식의 예를 드신 것입니다. 방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경우말고도 평상시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금식을 했는데 문제는 그 금식을 할 때 “나 금식합니다”하고 티를 내며 사람들에게 과시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금식을 주님은 ‘외식하는 금식’ 즉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겉으로 꾸미는 금식이라고 책망하시는데 그 구체적인 사례가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나옵니다. 먼저 ‘얼굴에 슬픈 기색’을 냈습니다. 금식을 하면 자연히 배가 고프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배고픈 표정을 한 번 지어보기 바랍니다. 일단은 얼굴을 찌푸리게 되어 있지요?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웃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연히 얼굴을 찌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게 됩니다. 하지만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표정, 너무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 지금 금식하느라 너무 힘들어”라고 알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금식을 하면서 회개도 하게 되는데 이 때 정말 슬픈 것이 아니라 억지로 슬픈 표정 지으며 금식을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금식일 수 없습니다. 또 이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안 그래도 찌푸린 얼굴인데다가 금식을 알리기 위해 분장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5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펴서 그 위에 앉았는데 나아가 이 먼지와 재를 머리에 뒤집어씀으로서 거의 분장 수준으로 원래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잠깐 TV를 보니 연기자들이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훌륭한 연기자들은 연기할 때 감정을 잡으니까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연기가 안 되는 사람이 억지로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려니 정말 힘듭니다. 눈에 침을 찍어 바르지를 않나, 눈에 인공눈물을 집어넣지를 않나 정말 가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고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관이었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겉모습으로는 금식을 나타내고 자랑하되 그들의 속마음에는 참된 금식의 마음과 자세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금식을 하면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칭찬 받을지 모릅니다. “저 집사님은 금식을 참 자주 해, 벌써 사십일 금식을 몇 번이나 했대. 와, 대단하다.” 이럴지 모릅니다. 실제로 저는 종종 이런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목사님, 저 요즈음 금식기도 합니다.” 여러분, 금식한다고 목사나 성도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혼자 금식하세요. 말하면 능력이 떨어집니다. 더군다나 “저는 40일 금식 여러 번 했습니다. 저희 목사님은요 40일 금식 몇 번 한 신령한 분이예요” 하는 분들도 계신데 이렇게 자랑하지 마세요. 목사도 나 금식한다, 40일 금식 중이다 이런 이야기 성도들에게 할 필요 없습니다.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저는 가능한 한 40일 금식은 하지 말고 최대 39일만 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40일 금식한 분들이 가는 곳마다 “나 40일 금식했다”고 마치 자신도 예수님처럼 40일 금식했으니 예수님과 동격이라도 되는 양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은 앞서 자선이나 기도의 경우에서 하신 말씀과 똑같이 16절에서도 이런 금식은 외식하는 금식이며 이런 외식하는 금식을 하는 사람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우리의 구제나 기도나 금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티가 안 나야, 사람들이 몰라줘야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상급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칭찬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칭찬이 없다,” 이것이 칭찬 상대성의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줄어든다.” 이게 바로 상급 상대성의 원리입니다.

2. 형식에 치우치는 금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 행위에 불과한 형식적인 금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징계하십니다.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저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범죄와 그에 따른 징계, 금식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반복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금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금식의 마력에 빠져서 습관적으로 슬픈 기색을 띠고 머리를 흐트러뜨렸습니다. 저들의 금식이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저들의 삶이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기는커녕 금식하면서도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또 온갖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저들의 금식은 다만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이사야 58장 4절, 5절 말씀입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3. 악한 목적을 위한 금식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행23:12,13)
4. 거짓 경건의 방편으로 금식하는 것입니다.(왕상21:9-13)
5. 불평하며 금식하는 것입니다.(사58:3)
6. 금식 중에 오락을 즐기는 것입니다.(사58:3)
7. 금식 중에 타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사58:3)
8. 금식 중에 다투며 싸우는 것입니다.(사58:4) 등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금식에 관한 두 가지 극단주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금식만능주의로서 금식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키워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애들이 뭔가 사달라고 할 때,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금식투쟁을 하곤 합니다. 엄마 아빠가 안 해주면 “나 밥 안 먹어” 하며 떼를 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에도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굴복시키고, 금식만 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금식기도라고 해서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14장 12절에 보면,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금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 금식이란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는 구실로 자신의 내면 세계로 도피하는 신비주의적인 삶의 모습도 아닙니다.
정반대로 금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냥 기도도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요란하게 금식까지 하며 기도를 하느냐는 금식 무용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금식은 만능이 아닙니다. 그저 나의 간절한 소망을 겸손하게 아뢰는 방법일 뿐입니다. 또 금식이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냥 간절히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필요한 것도 다 포기하고 그야말로 내 생명까지 걸고 기도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이 너무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 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길게 무리하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평생 신앙생활 하면서 단 한 번도 금식기도를 해보지 못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할 때 금식과 더불어 꼭 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바로 기도입니다(눅 2:37). 밥만 안 먹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그것은 금식기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의 자복이 있어야 합니다(느 9:1-12). 금식을 하는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회개입니다.
세 번째는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욜 2:12). 회개는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은 진정으로 내 마음 속에 애통하는 심정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겸손해야 합니다(대하 7:14). 금식을 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금식 때 꼭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꼭 성경을 읽으면서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안 읽고 금식기도를 하면 그 금식이 바른 길로 인도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 다녀와서 이상한 헛소리를 하거나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 심지어는 이단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경우에 금식을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 자복할 때입니다.
둘째로 국가나 민족적인 위기가 닥쳐왔을 때입니다.
셋째로 개인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큰 걱정이나 슬픔이 있을 때입니다.
넷째로 나 자신뿐 아니라 친구나 다른 성도나 이웃이 어려울 때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35편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남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니 그 기도의 효과가 내게 되돌아옵니다.
다섯 번째로, 교회에서 사역자를 임명하거나 성직을 줄 때, 교회가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먼저 광야에 나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고(마 4:1-2).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 온 교회가 먼저 금식한 후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냅니다(행 13:2-3).
특히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 안하고 파송하니까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다른 길로 이탈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금식기도에는 분명히 크나큰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바른 금식기도, 적절한 금식기도를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고 능력과 은혜가 넘쳐흐르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금식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고난없이 영광없고, 십자가 없이 부활 없듯 금식기도 없이는 갖가지 변화와 신비한 체험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인생 문제로 더 고민하지 말고 한번 하나님 앞에 겸비히 엎드려 금식기도에 참여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에 신비한 체험의 주인공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모든 믿는 이들이 일어나 금식기도하며, 참회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주신 약속들을 다시 붙잡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칠 때에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께서 보여주실 결과들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게 하시며, 주님께 속하여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세상 근심으로 가득하고 눈앞의 이익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선한 삶을 살지 못하고,이웃을 사랑치 않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소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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