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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라기의 저주와 십일조2 (말 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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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교독한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다시피한 구절들입니다. 특히 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는 말씀은 오늘 여러분들이 십일조에 관해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모름지기 여러분들도 한 두번쯤은 이 표현을 직접 해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10절의 말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는 이 구절 역시도 오늘 복받는 비결로 인용되어지는 또 하나의 유명한 구절입니다.

먼저 질문부터 하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일조에 관해서 아직도 명쾌하게 정리가 안 되신 분 계시는지요?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강조하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던지,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면 축복을 받는다던지 하는 말들에 대해서 아직 판단이 안 서신 분...??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질문하는 내용은, 오늘 읽은 본문이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는 말씀인가? 아니면 십일조를 바치되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말씀인가? 더 나가서 십일조를 내면 축복 받는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인가..? 과연 여러분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또 어떻게 들으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 질문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려울수 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일조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말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되어지는 많은 말들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고는 가늠 잡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답변이 없으니 우선 이것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교회를 나왔을 때, 그 때의 교회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같은지요? 아니면 어딘가 좀 변해진 모습인지요..?

질문이 더 복잡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모두 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교회의 모습은 저의 청년때와는 달리 많이 변해진 모습입니다.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한국교회는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라던가 또는 십일조를 하면 축복 받는다던가 하는 말들이 없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십일조니 축복이니 하는 말들은, 무슨 3박자 축복이니 뭐니 하는 그런 말들이 생겨나던 70년대부터 그러한 말들과 더불어 확산된 말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이 성장됨으로 높아진 의식이라고 한심한 말들을 하더군요. 모름지기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한국교회가 오늘과 같은 현실로 변질되어진 다음에 교회를 나오신 입장이라서, 필경은 “교회는 본시 이런 모양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작년에도 말씀드렸듯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 안에는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 신앙요건이 있습니다. 즉 십일조, 십계명, 성수주일, 이 세 가지는 섣불리 손댈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들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중 오늘의 본문을 따라 우선 십일조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되어지는 십일조에 관한 대체적인 말들은, 십일조를 바치되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그 중 더러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바치면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 말은 이미도 한국교회 저변에 흔하게 번져있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차고 넘치도록 축복 받는다는 말인데 과연 그런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말라기서 하면, 대개 십일조에 관한 교과서처럼 생각들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작년에, 오늘 읽은 본문의 앞부분을 강해 할 때도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만, 이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말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은 아닙니다. 당시 패역한 이스라엘 제사장들을 경고하는 여러가지 그릇된 일들을 지적하는 중에 이 십일조 부분이 따라 들어온 것이지 결코 십일조를 말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은 아닌 것입니다. 중복되는 말입니다만, 십일조라는 말이 나오면 오늘 대개의 신자들은 말라기 3장 9절과 10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특히 온전한 십일조와 축복이라는 말을...

여러분! 말라기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일차적으로 한국교회 현실을 직시하셔야 됩니다. 즉, 한국교회 현실을 밝히 알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그동안 교회를 다니시면서 교회에 열심적으로 봉사하고, 그래서 교회에서 좀 알아주는 바가 되고... 좀 더 쉬운 말로 교회다니는 재미가 붙은 이들은, 지금 아무리 목청을 높여 설명을 해도 마이동풍격이 될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지금 그런 입장에 있지 않는가를 점검하시면서 이 강해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말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기득에 이용하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그들의 패역을 지적하고 경고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는 유독 십일조만을, 그것도 오늘 읽은 3장 9,10절 부분만을 취해서 강조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말라기서가 십일조를 말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면 그동안 이 말라기서를 들어서 십일조를 말한 자나, 바친 자나 한결같이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과 행위를 한 것이고, 더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와 성경, 무지한 사람들의 어리숙한 종교심을 이용한 종교사기에 해당되는 행위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10절을 다시 읽고 몇가지 더 생각한 다음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 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 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 가운데 몇 가지 특기할만한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온전한 십일조, 그 다음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 다음 나를 시험하여, 그 다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여러분! 이 여러 표현들 가운데 십일조를 강조하는 자들은 듣는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쏠리도록 말을 할까요?

다시 말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들은 어디에 목적을 두고 말하고, 듣는 이들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듣습니까...?

또다시 말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조하는 이들은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라는데 목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 복 받는데 목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십일조를 열심히 바치는 이들의 관심과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십일조를 온전히 계산하는데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복받는데 관심과 목적이 있습니까?

어쨌든 오늘 한국교회는 참으로 복잡한 현실입니다. 십일조에 관한 한 말하는 자와 그 말을 따르는 자의 중심과 목적이 각각 다른 입장에 있으니 말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십일조)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 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에 보면,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즉 온전한 십일조=축복, 이런 공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모름지기 이 말씀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말씀처럼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말할 때 축복은 으레히 공식적으로 따라 붙는 말이고, 들을 때 역시도 같은 공식선에서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와 축복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생각을 고정시키는 결정적 표현이 있습니다. 즉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때 성도들의 십일조로 축복의 근거를 삼는 그런 하나님이실까요? .. 어쨌든 성경이 그렇게 되어져 있으니까 다른말 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표현, 즉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을 놓치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십일조..! 오늘, 축복 받는 원리로 가장 흔하게 되어지는 말.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될 점은, ‘온전한 십일조’와 ‘십일조를 온전히’ 라는 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 차이에서 오는 의미를 구분없이 사용함으로서 십일조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한국교회에서 ‘온전한 십일조’ 또는 ‘십일조를 온전히’ 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돈 계산을 철저히 해야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또 그렇게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친절한 지도자는 십의 일조로는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고 적어도 십의 이,삼조 또는 별도수입의 십일조까지 해야 온전한 십일조가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점잖은 지도자는 신앙이 함께한 십일조가 온전한 십일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사실 얼핏 듣기에는 ‘별도십일조’를 말하는 이들 보다는 좀 성경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 말 역시도 돈 계산만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데 바탕을 둔 말이기 때문에 결국 거기서 거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선지자가 경고한 “온전한 십일조”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인지 다음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 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 엇이 유익하리요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 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먼저 14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러분들이 이 말라기서에 되어진 말씀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전체에서 되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그들의 행위를 아셔야 합니다. 여기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푸념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두어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당시 제사장이라던가 이스라엘 전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를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있을만한 일입니다만, 그들은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목적과 가치, 소욕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이 현실에 주일날 교회 나가거나 교회생활에 충실치 못하는데 있어서 가장 흔한 이유 중 하나가, 장사나 사업을 하는 이들 중에서는 주일날 놀게 되면 매상이나 수입에 상당한 손해를 보기 때문이고, 직장인들 같은 경우에는 휴일날 근무하면 특근수당이나 근무평점에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 나가는 것이 현실에서는 분명한 손해가 되므로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주일날 교회 나가는 것 보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실제 수입에 도움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교회에서 고리타분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가족들끼리 야외에 놀러 가는 것이 실질적인 행복이고 가치라 생각하는 경우처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애써 지켜서 하나님께로 오는 축복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수단으로서 현실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전 제가 아는 목사님이 어느 변두리 교회에서 소위 ‘은사신유집회’를 하신다 해서 인사차 그곳에 들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매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요즘은 이런 집회에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아서 신명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더군요. “요즘은 의료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웬만한 병은 모두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한가지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때, 그야말로 어디가서 일 할 곳조차 없어 살기가 어렵던 때에, 소위 ‘삼박자 축복’이라는 이론이 뜨기 시작했고 당시 가난하고 희망이 없던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 축복론은 그야말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삼박자 축복론은 당시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안목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이론으로서 급기야는 이단시비까지 받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이 축복론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단시비를 시기와 질투에 의한 비난으로 일축해 버렸고, 반대로 축복론을 갈망하는 수요는 점차 늘어서 결국 이 축복론은 한국교회 전체로 급속히 확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축복론이 한국교회를 휩쓸던 때, 한국경제가 부동산 투기바람을 타고 서서히 부흥되어지던 시절에, 현실적인 계산에 빠른 사람들은 십일조나 연보를 내면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축복을 받는다는 환상적인 말보다는 부동산 투기에 머리와 자금을 투자하는 것이 진짜 부자되는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해서 점차 그 너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아직도 가난중에 있거나 사회의 경쟁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축복론에 매달려 있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동산 투기와 아울러 그 일이 잘되기를 하나님께 빌던 사람들, 그래서 이제는 살기가 웬만해진 사람들에게 닥쳐진 또 다른 문제, 즉 돈이나 병원에서 해결 받을 수 없는 질병들에 시달리게 되자 그것들을 위해 기도원 등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게 되고, 이들을 노린 사이비 능력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사회가 언제나 그렇듯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어설프게 신유능력을 주장하는 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교회를 노린 새로운 이론의 신상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요즘 확산되고 있는 ‘귀신론’인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기독교 안에 항상 새로운 듯이 등장하는 이단사설들은 이미 과거 시대에도 존재했던 말들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설들이 그 시대마다 인간들의 무지와 요구를 따라 역사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과거 출애굽 1세대들도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이런 것들이 비록 신비롭기는 하지만 홍해가 가로 막혀 있는 현실에서는 그런 역사의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애굽사람 밑에서 종살이나 하면서 가마곁에 앉아 빵 부스러기나 음식 찌꺼기를 먹고사는 것이 더 실제적인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죄성을 가진 모든 인간들의 기본 심성입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해보아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현실은 이루어지질 않고... 여기 14절 후반에 보면 그렇게 되어져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 이 유익하리요”

여러분!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세상적 물질관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와 같은 타산적 불평은 누구나에게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어쨌든 말라기 당시 제사장들은 방금 본 14절에 되어져 있듯이 그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입장에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현실은 그들 표현대로 서글픈 현실이었습니다. 원인이 어디 있었든지 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 현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라는 말을 하면 여기에는 누구나 다 그렇다고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실제 생활에서 최우선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습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아무래도 여러분들의 현실적 최우선은 일하고 돈벌고 그것이 실생활에 최우선일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일은 자연히 차선에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자기네들 표현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번거롭고 번패스럽기만 할 뿐이지 하나님을 아무리 열심히 섬겨 보아야 자기네들 바라는 소욕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들은 그 가운데서 자기네들 보다 더 잘먹고 잘 살고, 더 나아가 마음대로 사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역하는 편이 더 실질적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그런 생각들이 급기야는 하나님께 드려진 온전한 제물과 헌물들을 가로채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자! 여기서...

이 말라기서의 기록은 당시 제사장들의 부패를 말하는 것이므로 오늘 우리들 현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대로 제사장들은 실제 자기 현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르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는 서글픈 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물질적 축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명령을 지키는 것을 차선으로 내려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신앙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은 여전할 수 있습니다. 역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 해서 주일날 교회 나가기 보다는 그 날 직장근무를 한다던가 장사를 한다던가, 또 아니면 가족끼리 놀러를 간다거나 할 때 그것이 이 현실에서 실질적인 것이고 또 이 세상에서는 그런식으로 살아야 소위 남들과 같이 사는 것이니까, 하나님 명령을 따른다면 결국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현실이 서글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모두 하나님 명령을 따른다는 말을 최우선에 갖다 놓지만 실제로는 당시 제사장들 처럼 이 현실에서 사는 방법을 최우선에 갖다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쨌거나 여기서의 중요한 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거나 그 명령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긴 믿되, 그 명령을 따르긴 따르되, 그것이 우선이냐 차선이냐 하는 점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비록 형식이나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제사를 철저히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자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개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온전한 제물을 제사장들에게 바쳤습니다. 이 표현을 중시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백성들은 온전한 제물을 바쳤습니다. 십일조도 철저히 계산해서 바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현실에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 할 때 대개가 이 말을 평신도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 표현도 기억하시면서...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당시 일반 백성들은 온전한 제물, 철저한 계산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결코 그들이 부정한 제물, 계산이 온전치 못한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적도, 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제사장들 보다 신앙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제사장들의 철통같은 감시의 눈과 엄격한 율법의 적용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반 백성들이 제물을 가져 올 때 그것의 온전성을 감별하는 일은 제사장들이 필히 해야할 특권이었습니다. 만일 제사장들이 실수로 백성들에게 온전치 못한 제물을 받아 그 피로 제사를 드리게 되면, 제사장이 먼저 죽게끔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실수로 부정한 피를 제단에 드려도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이미 오랜 옛날에 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잘 안 되시면 구약성경 느혜미야서를 깊히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제사를 잘 못 드려도 제사장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반 백성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사장들은 온전한 제물, 즉 점도 흠도 없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만, 일반 백성들의 제물이나 헌물, 십일조 등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1장 8절과 13.1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 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 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 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 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 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 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절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제사장들 수중에 온전한 제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제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백성들이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온전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명령에 따라 제사를 드리긴 했어도 온전한 제물로는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 명령을 따라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가긴 해도 자칫 이들과 같은 상태일수 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 즉 율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잇속을 철저하게 챙겼습니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적용시켜 온전한 제물을 바치도록 하고, 막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값어치가 없는 병들고 다리 저는 병신 제물을 드려 백성들 앞에 눈속임을 해서 온전한 제물은 돌려치기 하고...

자! 이제 이 쯤하면 과연 도적질은 누가하고 있는지 짐작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십일조 이야기로 돌아가서 10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 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 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 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 이 말씀을 일단 문자적으로 요약해 보면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는지 시험해 보라”는 말씀으로 되어 집니다. 즉 “너희들이 하나님만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십일조를 정성껏 그리고 온전하게 드려 보아라. 너희들의 생활에 실제적인 손해가 되던 안 되던 그런 것은 따지지 말고 하나님 말씀하시는 대로 열심히 해 보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너희가 알 것 아니냐?” 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으로서, 오늘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십일조와 관계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이렇게만 보면 십일조에 관한 한국교회의 말들이 얼핏 맞는 것처럼 생각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음 측면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즉, 십일조를 믿음으로 진실되게 하면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인가?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이 미래형으로 되어진 말씀인가? 아니면 과거형으로서 “이미 지난날에 그렇게 했었다면”이라는 뜻으로 되어진 말씀인가? 하는 점에서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말씀이 십일조를 성실껏 하면 축복을 주신다던지 또는 이미 지난 과거의 놓쳐버린 기회를 상기시키는 과거형으로 되어진 말씀이라면, 오늘 이 본문을 들어서 십일조를 내면 축복 받는다고 하는 말들은 완전한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말씀은 잠시 후 다시 드리기로 하고,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들어 십일조를 강조할 때, 강조하는 자가 일반 신자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라는데 목적을 두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성도들이 복받기를 바라는데 목적을 두고 말하겠습니까? 반대로, 일반 신자들이 이 본문으로서 십일조에 대한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데 귀를 기울입니까? 아니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는다는데 귀를 기울입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쪽에 있었는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이 본문을 보면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했는데, 왜 하필이면 물질로 계산되는 십일조인가? 하는 의문은 전혀 없었는지요?

인류사를 놓고 보면 물질과 돈은 누구나에게 골고루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닌데 말씀입니다. 차라리는 어느 기도원에 올라가서 소나무 뿌리하나 뽑아 보는 것으로 시험해 보라던지, 아니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금식이나 기도로서 시험해 보라던지 하시질 않고, 왜 하필이면 십일조인가? 말씀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대로 바치게 되면 누구나 그만큼 자기 실생활에 손해가 되어지게 됩니다. 이 당시에 제사장들을 비롯해서 전 이스라엘 민족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제사드리고, 십일조 드리는 것보다는 그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 실제로는 더 복되고 유익되다 생각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물질이 자신들에게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전체 역사에서 일상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반에 종종 표현되어 있는 “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할 때, 바로 그들이 이 명령을 등한히 여기고 물질을 의지하는데서 되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의 십일조로서 나를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과연 물질을 의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십일조에 관계된 하나님 모든 명령에 올바로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가름짓는 의미로 되어진 말씀으로서, 너희가 내 말에 온전히 순종하면 너희 삶에 필요되어지는 모든 물질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로 복이라는 말씀이 되어진 것입니다. 3장 7절로 소급해 올라가 보겠습니다. 누가 좀 큰 소리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예-감사합니다. 너희 열조의 날, 말하자면 조상때로 부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규례, 이것은 모세 율법을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너희에게 명령한 규례’라고 할 때, 이것은 그 모든 조목조목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너희들은 통상적으로 내말을 듣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규례, 혹은 모세의 율법으로 표현되어지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일차적으로 그 조목조목을 지키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지 않는다는 것과 지키지 못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이 표현이 좀 어려울 듯 합니다만, 어쨌든 이 말의 뜻을 필히 이해해야 누구든 저주의 율법신앙을 벗어 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시 율법은 인간들로 하여금 조목조목 지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나중 기회가 닿으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거니와, 에덴동산의 선악과, 모세의 율법,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이 모두가 인간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지 아니 듣는지의 기준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 노아방주에 들지 않은 사람들,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민족,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들의 이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말씀드려서 오늘 주제로 삼고 있는 십일조 문제도 당시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불순종의 증거로 제시되는 여러가지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그들은 과연 누구의 말을, 또 무엇을 믿었는가? ..일단 여기서는 과거 출애굽 1세대들만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애굽에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430여년 동안을 잘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나중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애굽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 보다는, 모세 보다는 애굽을 더 의지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의복이 헤지지 않고 신발도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네들 현실에서 확인하면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애굽사람들의 빵부스러기와 고기가마 곁에서 종노릇하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심지어 마늘과 부추를 먹지 못해서 자신들의 정력이 쇠하여 진다고 땅을 치고 통곡까지 했습니다. 당시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애굽 사람들에게 종노릇 해주고 얻어먹는 빵과 고기를 먹는 생활이 더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 보다 애굽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는 생활이었습니다. 마치 머리가 한참 모자라는 어느 부인이 남편이 넉넉히 벌어다 주는 생활비로 아이들과 집에 앉아 살림하는 것이 무료하다 해서 자신의 아이들은 유료 유아원에 보내고 자신은 남의 집 파출부를 다니면서 그 돈으로 아이 보육료를 내는 것이 오히려 보람있는 생활이라고 목에 핏발을 세우는 것처럼.

어쨌거나 이스라엘 민족들의 이러한 돌머리 같은 계산은 끝내 율법을 받는데서 결정적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의 돌판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간 사이 아론을 앞세워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며 광란적인 짓들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들의 이러한 행동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고리타분하게 하나님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그래서 제대로 씹을 맛도 나지 않는 만나라던가, 또는 무슨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그런 삭막한 행동보다는, 아무 여자나 남자들과 어울려 희희낙락하고.. 요즘 말로 하면, 노래방이라든가 카페나 이런데 가서 직성껏 놀아야 노는 것 같은 생각들을 갖는 것처럼... 그들은 그런 생활이 더 실질적인 행복이고 가치라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이 더 현실적 요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하나님보다는 물질 그 자체가 하나님이었던 것이고 그러한 생각들이 급기야는 금송아지(물질)를 만들어 섬기는 행위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일종의 반항적 시위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나 오늘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던가 의지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모습은 물질을 현실 생활에 직접적인 가치로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생각해 볼 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피차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들은 이 현실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대로 살기를 원하나 하나님께는 인간들의 그러한 모든 생각과 행위들이 죄악된 본성에서 주어지는 악행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때로는 깨우치는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은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 중에서 대표적 인물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중 선지서에 해당되는 책들을 보면 대개가 제사장들의 패역과 부패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하는 말라기서도 그 중 한책입니다. 3장 7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 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돌아 오라! ..어떻게 하는 것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제사장들의 항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돌아 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안식일날 모이라면 모였고, 제물을 드리라면 드렸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라면 나왔고, 찬송 부르자고 할 때 불렀고, 십일조든 연보든 바치라면 바쳤고,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정말 이런 딱한 노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해서 말씀하시는데 당사자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 하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의 이러한 반문을 일깨우고자 당시 그들의 많은 문제점들을 제시하는 중에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살펴보는 십일조 문제를 8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 십일조 말씀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도 앞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습니다. 제사드리는 것을 번페스럽게 생각해서 대충 드린다던가, 다리 절고 눈먼 것을 제물로 드린다던가, 자신들의 본처를 쫓아 내고 이방여자들과 혼인을 한다던가, 하여간 당시 그들의 패역을 일일이 지적해 나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모른다고 하니 이제 마지막으로 십일조 문제가 제시된 것입니다.

여러분! 말라기 선지자가 십일조를 들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 할 때, 여러분들께서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들을 하고 있었는지요?

모름지기 한국신자들이 이 말을 이해할 때 가장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마 이런것일 것 입니다. 즉, 봉급이라던가 또는 여타의 수입에서 처음에는 착실히 십일조를 떼어 놓았는데 이것을 주일 전에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곳에 써버렸을 경우, 또는 주중에 그만 인색한 마음이 들어서 내지 못한 경우, 전체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철저히 계산하지 않고 적당히 바치는 경우, 대개는 이런 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으로 생각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주 유치한 따짐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시 도적질이라 할 때 그 말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남이 알도록 하는 것이 도적질인가요? 아니면 모르도록 하는 것이 도적질인가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수입에서 십일조를 철저히 계산하지 못했거나, 안 했거나, 또는 철저히 계산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교회에다 모두 갖다 바치지 못했을 경우,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누구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 뿐입니다. 따라서 앞의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모르도록, 또는 여러분 자신이 모르도록 한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철저히 못하는 것은, 첫째 십일조에 대한 정신이나 계산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는 여러분들의 인색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못한 그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은 이미 자기 계산에 의해 그렇게 한 것이므로 남 모르게 무엇을 훔친 도적질과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에 어떤 이들은 이런 이의를 제기 할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중에 특히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자신이 취한다는 그 자체가 곧 도적질이다. 그러므로 방금 앞의 말은 엉터리 같은 괴변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3장 8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되도록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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