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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힘 (암 05: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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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가복음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 아주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은 누구나,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이든 아니든, 언제나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1년에 한번씩은 꼭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뺀 유대인들의 삶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침공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던 BC 587년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외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 제일 먼저 점령한 것이 성전입니다. 무너뜨린 것이 또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의 핵심, 심장을 먼저 무너뜨려야 그 나라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80년 동안 바빌론에 끌려가 포로로 있다가 풀려나서 자기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의 심장이, 다시 예배할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생 끝에 겨우 BC 520년에 자그마한 성전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짓지 못했습니다. 이 성전이 계속 유지되다가, 예수께서 나신 시절에 성전이 다시 건축이 되어서 휘황찬란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다시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서는 헤롯왕가를 세워서 대리통치를 합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헤롯 왕과 그 아들들을 ‘분봉왕’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직접통치가 아닌 간접통치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헤롯 사후에는 결국 간접통치가 잘 안된다고 생각한 로마는 총독을 파견해서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헤롯 왕은 이스라엘의 민심을 얻기 위해 성전 재건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BC 19년에 성전 재건 작업에 착수해서, AD 63년에 완공했으니까, 꼭 80년 동안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63년까지 산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마 성전이 완공되지 못한 어느 시점에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몰아 성전을 숙정하셨고, 또는 랍비들과 토론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언덕에서 성전을 드나드는 수많은 내방객들과 성전 순례자들을 보면서, 제자들과 이런 얘기를 나눕니다. 제자들이 먼저 질문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성전 뜰에 사람들이 가득한데 우리가 지금까지 듣는 것은 전쟁 얘기뿐입니다. 앞으로도 큰 전쟁이 있다는데, 이렇게 전쟁이 많으면 종말이 오지 않겠습니까? 언제 종말이 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전쟁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싸우고, 아들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딸은 어머니를 배신하고, 서로 배신 배신하면서 죽음을 향해 내닫고, 가정도 망하고 개인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는 그런 때가 온다. 그러나 그런 때가 온다고 해도, 이 세계의 종말이라고는 믿지 않고, 참고 견디고 끝까지 나와 함께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얘기를 오늘 마가복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 장면을 제가 이렇게 재생해 봅니다. 헤롯이 80년에 걸쳐 지었다는 그 예루살렘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우선 성전의 경내가 얼만지 살펴보겠습니다. 성전 뜰이 얼마나 넓었는지 가로 360미터, 세로 460미터였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죠. 가로 360미터, 세로 460미터, 이게 얼마나 넓었느냐? 지금 생각해보아도 굉장히 넓은 것 같습니다만, 당시를 생각하면 그 이상입니다.

자그마한 도시 예루살렘 전 시가지 땅의 6분의 1을 성전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시 전체의 6분의 1이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성전은 엄청나게 넓었을 것이고, 유대 백성들이 1년에 한번씩 순례를 오면 전부 수용할 만큼 넓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큰 성전 안에 또 그만큼 큰 성전 뜰이 있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이 뜰을 바라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헤롯이 재건한 예루살렘의 성전은 굉장히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당시 역사 기록을 보면, 당대에 건축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름다운 성전! 그 성전에 금빛 나는 성전, 은빛 나는 성전 등 온갖 찬사를 다 붙였습니다. 그 성전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는 숫자가 있습니다. 성전에는 기둥이 있었고, 그 기둥을 세웠던 대리석으로 된 주춧돌이 있었는데, 주춧돌이 얼마나 컸느냐 하면,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세로가 12미터, 가로가 4미터, 높이가 6미터였다고 합니다. 이게 주춧돌 하나의 크기였습니다. 이 정도의 주춧돌들 위에다 수많은 기둥을 세우고, 성전을 세우고, 지성소를 세우고 그리고 주변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엄청난 성전 뜰을 만들고,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까 시편 84편을 교독했습니다만, 그 교독문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전 뜰을 보면서 했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 보다 낫습니다. 그러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살겠습니다.” 아름다운 뜰, 아름다운 성전!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허물어라. 내가 3일 만에 다시 짓겠다.”라고 말하니,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유대백성, 특히 예루살렘 주민들 사이에, ‘혹세무민하는 자칭 메시아 예수를 잡아 죽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 아름다운 성전을 누가 무너뜨립니까? 80년 동안 지은 성전을! 더군다나 3일 만에 짓겠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메시아를 자처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자칭 메시아 중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만도 스물아홉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자칭 메시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에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의 봉기 때문이었습니다. 식민통치에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유대 땅에서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수님 죽고 난 훨씬 이후까지 수많은 독립운동이 있었고, 그중에는 무장 독립운동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로마제국을 유대 땅에서 몰아내려는 독립운동이 각지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는 할 수 없이 마지막 수를 쓰기로 결정합니다. 티투스라는 장군을 보내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을 무너뜨리기로 하고, AD 66년에서 70년까지 전쟁을 벌였습니다. 로마의 뜻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심장을 부수라. 유대인의 혼이 있는 성전을 파괴하라. 유대인의 영을 산산조각 내라. 주춧돌 위에 기둥 하나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부숴버려라.” 건물이 다 부서지는 판에 사람이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AD 70년 유대에는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무너졌고, 유대민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다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세우기까지 2천 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 떠돌아다니는 민족으로서 소위 디아스포라라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성전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은 망한다. 여기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고 좌절하고 서로 고소하면서 완전히 죽는다.” 그러나 이 성전이 무너진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2천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왜? 성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함께,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를 들어 저의 생명이 끝난다고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개인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저의 역사는 목사로서의 역사든, 한 가장으로서의 역사든, 제가 죽는 날에 모두 끝납니다. 그러나 제 역사의 끝이 저와 함께한 여러분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나라를 통치하라고 위임을 받은 사람이 임기가 끝났다고 그 나라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는 사람의 생명의 마감과 상관없이 계속됩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임기 동안에 모든 역사를 이루겠다는 망발은 독재를 불러올 뿐입니다. 역사를 주관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시는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끝이 있으면 끝에서 다시 시작하시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유대 땅, 성전, 구약, 율법, 종교가 다 끝장이 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끝이 나면 십자가를 통한 새로운 복음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영원한 구원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 말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대전쟁이 일어나서 3년 동안에 완전히 망한 다음에야 제자들은 이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끝나가는 유대 역사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부활에서 증명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 세상에 펼치려고 목숨을 걸고 선교전선에 나섰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역사는 끝납니까? 아닙니다. 저는 가장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제의 인생을, 역사를 마치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납니다. 그게 예수님과 함께하는 첫 번째 고백이자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제 역사가 끝날 때 주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한 죽음과 행복한 죽음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복된 생명의 역사, 이 두 가지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고 바로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이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이걸 고백하는 사람은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4.19 때를 기억합니다. 4.19 함성 속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사람, 재산도 많고 힘도 많고, 세상을 다 쥐었다고 생각하던 사람, 이기붕 씨, 그 이기붕 씨 일가가 집단 자살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힘만으로는 결코 역사를 이끌어가지 못하는구나! 오늘 구약 본문 아모스서의 표현을 따른다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야 합니다. 정의가 흐르지 않으면, 민심을 다독이고 하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넘쳐흐르지 않으면, 그 집은,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 좋던 이스라엘의 성전과 그 뜰은 로마 군대에 의해서 초토화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한 채 부르는 찬송, 살찐 송아지, 제사, 정의와 상관이 없는 성전, 그 모든 을 하나님은 역겨워 하시며, 다 무너지게 하십니다. 그 훌륭한 성전이 무너졌을 때의 좌절은 어떠했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끔찍한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서른 네 살 된 여성 한 분이 일곱 살과 다섯 살 난 자식 둘을 아파트 옥상으로 끌고 가서 집어던져 죽게 했고, 세 살 된 자식은 끌어안고 몸을 던져 죽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원인은 가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문에 난 것을 봤더니, 애들이 그 어머니에게 “엄마 나 죽기 싫어. 살고 싶어.” 하는 소릴를 주민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죽기로 결심한 엄마,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 자식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결국 네 사람의 생명이 끝났습니다.

자기가 사는 곳도 아닌, 인근의 아파트에 올라가서, 그 아파트는 좀더 행복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입니다, 거기서 나 보란 듯이 자기와 자녀들의 죽음을 세상에 공표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몹시 가난하고, 게다가 3천만 원이나 되는 빚을 져서 헤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의지할 데 없고 찾아갈 데 없기 때문에 죽습니다.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이 어머니와 다른 어머니들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전쟁 중에 남편 잃고 혼자가 되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들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들 그래도 키우고 공부시킨다고, 집에서 콩나물 길러가지고 매일같이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나가 팔고, 닭 몇 마리를 사서 계란을 내고, 무, 배추 몇 다발 가지고 시장에 나가 팔아서 자식들 먹이고 학교 보냈습니다. 자기의 허리를 졸라매고 온갖 고생으로 자식들들 위해 한평생을 사신 부모님들, 제 주변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식들을 자기와 함께 죽음으로 끌고 가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세대의 차이입니까? 사고방식의 차이입니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이런 사람들을 도울 수 없고, 이런 사람들은 왜 갈 곳이 없습니까?
인간의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버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김으로 창조 받은 인간이 죽으면,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행복하게 죽기를 간구하십시다. 한순간이라도 더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지금의 생명이 끝난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다시 시작하신다는 것을 오늘 이 시대의 사람이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에게 충성하라. 그대들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지금 환란을 당해도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약속입니다. 충성할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한테서,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에게서 나옵니다. 성령에게서 우리에게로 흘러옵니다.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상류에서 하류로 흐릅니다. 제가 돌아본 바로는 우리나라 산천의 물은 항상 북에서 남으로 흐릅니다. 아마도 한반도의 북쪽이 높은 모양입니다. 북쪽이 상류고 남쪽이 하류입니다. 제가 유럽에서 살 때 라인 강에를 갔는데 강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느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잘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왜 유럽의 강물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나? 나중에 안 이야기입니다만, 유럽의 중심에 알프스라는 거대한 산맥이 있어서 모든 물은 알프스를 등지고 흐릅니다. 알프스의 북쪽은 그대로 북쪽을 향해서 흐르고, 알프스 남쪽은 그대로 남쪽으로 흐릅니다.
그런데 알프스에서 발원한 차가운 물은 남쪽 하류로 가면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 데워집니다. 그 일을 기억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 북에 있는 차가운 물이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하더라도 남쪽에 따뜻한 성령과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남으로 흘러온 그 물은 변하여 따뜻한 물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인생을 북에서 남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남에서 북을 향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지형의 차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흐르는 물을 따라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 성령은 마찬가지로 오늘도 쉬지 않고 흐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성령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하나님 나라 안에서도 그 성령은 계속 생명수로 흐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한부분이 되어 오늘도 살아갑니다. 오늘 살아가는 이 순간은 성령의 생명의 물길의 흐름 속에 있는 한 부분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 그 말은 “생명 충만”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닙니다. 오늘은 내일, 미래에 이루어질 그 나라가 미리 와 있는 오늘입니다. 미래가 오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미래의 영원한 생명의 물결이 오늘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미래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희망의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절망의 끝이고,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생명 역사에 빠지는 것입니다. 방언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허깨비를 봤다고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진실로 생명의 주가 오늘 우리의 연약한 역사 속에 힘찬 생명의 강물을 흘려보내고 계십니다. 그걸 믿으시면 오늘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것입니다. 끝나는 역사 속에서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이 힘 있게 여러분한테 다가옵니다. /박종화 목사


 (2005-05-09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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