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단 03:13-18)

첨부 1


작년 이맘 때, 그러니까 2003년 11월 16일이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오늘도 2부예배가 마치면 곧바로 시작하겠습니다만 작년에 추수감사잔치 폐회예배 때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똑같은 제목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1년 만에 똑같은 본문, 똑같은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느냐? 사실 그 때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설교하면서 참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너무 귀한 본문인데, 너무 귀한 교훈이 여기 들어있는데 10분만 설교하라니 너무 아쉽다. 그래서 내년 추수감사절 때 꼭 이 본문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설교해야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다시 한 번 설교할 정도로 귀한 교훈이 여기 들어있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감사의 자세에 대한 너무나도 귀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감사는 어떨 때 하는 것인가? 감사는 어떤 상황에서 할 수 있는가? 참된 감사란 무엇인가?를 너무도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기 전에 먼저 다니엘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봅니다.

다니엘서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니엘이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이야기’ 부분으로서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간 이야기,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간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 부분에 나옵니다. 또 7장부터 마지막 12장까지는 다니엘이 본 각종 묵시와 환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과 묵시가 워낙 특이하고 신비해서 마치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나온 묵시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를 묵시문학으로 분류합니다. 아무튼 이 뒷부분의 묵시는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앞부분의 이야기 참 재미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서 1장 1절을 봅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 3년 때(주전 605년 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유다왕 여호야김을 비롯해 많은 유대인들을 첫 번째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1차 바벨론 포로기인데 이 때 느부갓네살이 아무나 다 붙잡아 간 것이 아니라 유다인 중에서 귀족계층에 속하는 젊은이들, 또 그 가운데서도 외모로나 지적 능력으로도 뛰어난 사람만을 뽑아 잡아가 이들을 왕궁에 잡아두고 바벨론 언어와 각종 학문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왜 이들을 뽑아서 가르친 것일까요? 이들로 하여금 자기 민족과 신앙을 버리고 바벨론 왕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어 바벨론을 위한 충복들로 써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의 똑똑한 젊은이들을 뽑아 동경제국대학 같은 최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관리로 삼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보내 장교가 되게 한 것도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할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 뽑혀간 네 젊은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바벨론 식으로 바뀌어서 벨드사살, 그리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사람들이 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말도 유대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바벨론 언어인 갈대아어를 쓰게 하고 학문도 바벨론의 학문만 가르치고 음식도 왕이 직접 하사한 진미와 포도주만 마시게 했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바벨론인들이 숭상하는 신상을 만들어 낙성식을 하였고 누구든지 그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타죽게 하겠다고 영을 내립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이들 유대 젊은이들의 언어를 바벨론식으로 바꾸고 지식을 바꾸고 음식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결국 신앙까지 바꾸어 철저하게 바벨론을 위해 충성하는 신복으로 만들려는 음모인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1:8). 그들은 이것이 단순히 음식만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까지 바꾸어 놓으려는 음모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열흘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은 이들의 얼굴이 오히려 그것을 먹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해 보인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신앙이 승리한 것이지요. 하지만 바벨론 사람들이 이런 소년들의 모습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습니다. 결국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자들은 다 풀무 불에 던져 죽이자는 말은 이들 젊은이들의 정절과 신앙을 꺾어보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서는 그냥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마치 다니엘 당시 바벨론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험난한 시대입니다. 온갖 우상과 불신이 판을 치고 물신주의와 부도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나를 더럽히지 않고 순결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혼탁하고 죄악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언어생활이나 우리의 지식, 사고방식이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아무 것이나 먹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 곳이나 가서도 안 됩니다. 아무 일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이 작은 데서부터 우리를 더럽혀 죄로 오염시키고 죄악된 세상에 휩쓸려 살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야금야금 작은 것부터 시작해 신앙의 순결함을 더럽히고 결국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을 우상숭배와 불신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유혹하며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걸고 신앙의 정절과 먹는 것의 정절을 지킨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앙은 오늘 우리가 어떤 신앙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신하들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고해바칩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당장 그들을 끌고 와 극렬하게 불타는 풀무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했는데 죄인들을 끌고 와보니 바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안 나왔지만 느부갓네살이 이 때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에 노해서 끌고 오라고 했지만 끌려온 사람들을 보니 자기가 그토록 아끼고 총애한 세 젊은이들이었습니다. 1:18-20에 보면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나은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정작 이들을 풀무 불에 집어넣어야 할 상황이 되니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신하들이 이 세 젊은이를 시기해서, 이방인들이 왕의 총애를 더 받는 것에 질투가 나서 꾸민 계교인 것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이미 명령은 내려진 것이고 왕의 체면 상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15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이들을 회유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절하면 살려주겠지만 절하지 않으면 당장 너희를 극렬한 풀무 불 속에 던져 넣겠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를 풀무 불 속에서 건져낼 신이 어디 있겠느냐?” 이 말은 아무리 너희가 섬기는 여호와라는 신이라 할지라도 결코 너희를 내 손에서, 저 극렬한 풀무 불 속에서 건져 내지 못 할 것이라는 조롱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용광로에서 철이나 금을 녹일 때 풀무로 산소를 계속 불어넣어주면 온도가 최소 1,400도 이상 올라간다고 합니다. 포스코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무슨 뜻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피운 풀무는 용광로에 풀무로 뜨거운 열을 가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 풀무 불을 ‘극렬한’ 풀무라고까지 강조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수 천도까지 올라간 것 같습니다. 당시에 큰 죄를 지은 죄수들을 이런 용광로에 집어넣어 태워 죽이는 화형이 성행했다고 하는데 사람 몇 명을 한꺼번에 던져 넣을 정도면 얼마나 큰 풀무 불이겠습니까? 22절에 보면 이 풀무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사람을 던져 넣으려고 붙잡고 있던 사람조차 그 불꽃에 타 죽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은 여호와 뿐 아니라 그 어떤 신이라 할지라도 절대 너희를 내 손과 풀무 불에서 건져내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한 것입니다. 이 말은 수 천도의 풀무 불 온도를 과신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신한 참으로 교만한 말입니다.

이제 막 이들이 극렬한 풀무 속에 타 죽기 직전 참으로 절대절명의 순간입니다. 물론 눈 한 번 딱 감고 신상 앞에 절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느부갓네살 왕의 궁전에서 호의호식 하고 나아가 바벨론의 고위층 관직에 올라 평생 호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 이번에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벨론의 신 앞에 절하면 당연히 왕에게 더 칭찬 받고 더 큰 총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까짓것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되는 일입니다. 바로 이 때 느부갓네살의 회유를 들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6절을 보세요. 이 세 사람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회유한 것, 즉 지금이라도 신상 앞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는 말과 나아가 그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이 극렬한 풀무 불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이 일에 대해 왕에게 대답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우리가 당장 이 풀무 불에 던져져 타죽는다 할지라도 절대 왕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지 않겠고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극렬한 풀무 불 속에서, 그리고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을 확신하므로 왕의 말에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말입니다(17절).

얼마나 분명한 믿음과 확신입니까? 우리의 대적과 원수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을 때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변명을 하거나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 분명한데 왜 변명을 합니까? 원수와 대적들이 부인한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진답니까? 또 그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이 분명한데 뭐 하러 애써 설명을 합니까? 믿으면 그만이지요. 그만큼 이 세 사람의 믿음과 확신은 분명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그런데 이들의 믿음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에서입니다. 18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이 정금같이 빛난다는 말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세람이 바로 이 말을 한 순간 금으로 만든 우상 신상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신앙이 정금 같이 빛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찬란하게 빛나던 우상은 그 빛을 잃고 이 세 사람의 신앙이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 사람의 이 말이 도대체 어떤 뜻이기에 그토록 빛나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의 퀼른에 있는 한 지하감옥에 들어갔다가 벽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 지하감옥에 갇혀있던 어떤 이름 모를 유대인이 쓴 시였습니다. 그 유대인은 이미 처형을 당한 다음이었기에 지은이도 모르고 제목도 모르는 시, 투박하고 짤막한 시입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유대인은 지하감옥에서 큰 절망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고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도저히 살아나갈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태양이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고백입니까?

같은 신앙인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정말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조건부 감사’와 ‘무조건적 감사’입니다. ‘조건부 감사’란 하나님께 조건을 달고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많이 베풀어주시면 내가 감사할 것이지만 만약 내가 달라고 요구한 것을 안 주시면 감사도 없다는 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 형편이 좋던 나쁘던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늘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무조건적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감사를 하면서 살아갑니까? 우리의 감사 가운데 너무도 많은 감사가 바로 조건부 감사가 아니었습니까?

퀼른 지하감옥의 이름 모를 유대인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조건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감사는 조건부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줄 믿지만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내가 순교를 당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것이고, 결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감사를 그치지 않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조건 감사요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과 감사야 말로 정금과 같은 것이고 가장 수준 높은 믿음이요 최고수준의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 시간 기억하며 감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더욱 수준 높은 신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나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할 때 늘 이런 서약을 신랑과 신부에게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 모든 증인 앞에서 신랑은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토록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성실한 남편이 될 것을 지금 서약합니까?”(반대의 경우) 이 때 ‘예’라고 대답하지 않고 “글쎄요. 그 때 되어봐야 알지요.” 하는 사람은 남편 될 자격, 아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기쁠 때, 건강할 때, 부유할 때만 사랑하면 그것은 조건부 사랑이요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례자가 되어 여러분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 모든 증인 앞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구주로 섬겨 평생토록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실한 자녀가 될 것을 지금 서약합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과연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럴 때만이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신부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하나님 앞에 더욱 분명한 믿음과 수준 높은 감사를 돌리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2005-06-23 12:01)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