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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이 아니다. (호 0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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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남자가 한번 영원한 자기 사람으로 선택한 아내를 버리고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즘은 이혼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사실 당사자에게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서로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고, 이제는 도저히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불신이 있기 때문에 이혼을 합니다. 그래서 이혼한 가정의 당사자나 자식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암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제나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로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듯이 이제부터 너희들과 나는 남남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내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시내산 위에서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 가운데 강림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무더운 광야의 성막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다윗을 통하여 굳건한 나라를 세우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아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불법으로 하나님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도둑떼들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찰들을 불러서 이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경찰은 당시 강대국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해서 이렇게 버리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약 이들이 버림받는다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자체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모든 구원계획을 완전히 버리시느냐? 아니면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것은 버리시는 것이지만 인류에 대한 구원계획은 변함없이 진행하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1. 로암미라 하라.

우리가 지난 부에 살펴 본 바와 같이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삼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계속 부정을 저질러서 이제는 세 번째 사생아를 낳게 되었습니다.

8-9절,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아마 그 당시에 호세아의 아내 고멜의 음란한 행실은 상당한 소문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도대체 ‘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몇 명까지 자식을 둘 것이며 얼마나 신기록을 세울 것인지 그리고 이 바보 같은 선지자는 언제까지 이 여자를 자기 아내로 두 고 있을지 관심을 많이 가졌을 것입니다. 드디어 고멜이 세 번 째 사생아 아이를 낳았습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호세아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고멜에 대하여 버럭 화를 내면서 ’이제 너는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다. 집에 있는 짐을 다 싸가지고 여기서 썩 나가라‘고 소리를 지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사자인 호세아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의 단어는 ‘암미’라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 어떤 보증과도 같은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은혜를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암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로암미’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의역입니다. 원래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고 나도 더 이상 너희들에 대하여 내가 아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관계는 깨어지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고멜이 세번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호세아가 계속 부부관계를 깨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마음을 돌이켜서 돌아오지 않을까?’해서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섹스피어의 사대 비극 중에서 햄릿이라는 작품을 보면 햄릿이 자기 아버지를 독살한 범인으로 현재 왕인 삼촌과 왕비인 어머니에게 혐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대들을 불러서 궁중에서 연극을 하게 하는데 그들이 한 것과 비슷한 장면을 연기하게 합니다. 왕이 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의 귀에 독약을 부어서 죽입니다. 그러나 그 연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자신들이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세 번째로 음란한 짓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음행을 보았어야만 합니다. 그 여자가 하는 짓은 바로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모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자백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사생아 아이들을 내어놓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범죄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흘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동안만 우리에게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 중에서 버림받지 않을 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뭔가 부족하고 무서운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 고멜처럼 악한 정욕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멜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세 번째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너는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다면 저희들 중에서 모두 걸려서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단지 그들이 음란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실 때에 이들이 부정한 자들인 줄 알고 택하셨고 그들이 모두 다 고멜같은 자들인 줄 알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은 자기들이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호세아는 고멜이 음란한 성향이 강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택했습니다. 그러나 고멜의 문제는 자기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호세아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고 한번도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결혼에는 막대한 신부대금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이혼을 하려고 하면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고멜은 호세아가 감히 그런 돈을 돌려주면서까지 이혼을 할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가 한번 두 번 참았던 것은 이렇게 음란한 줄 알고 결혼했기 때문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호세아가 두 번씩이나 사생아를 낳았는데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완전히 바보로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버림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기들이 연약하다는 것만 인정하고 눈물로 나아오면 열번 스무번 넘어져도 절대로 하나님께서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설사 징계를 해서 바로 잡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바보로 생각하고 이제는 완전히 당당하게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암미’라고 부르니까 하나님이 무슨 봉이나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자기 욕심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받은 것은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 한 절대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우리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를 무슨 담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은혜를 주셔야 하며,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위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감히 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들을 위하여 투자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브라함때부터 약속하셨고, 모세가 구원했으며, 여호수아의 정복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약속과 역사를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리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습니까? 어제까지 ‘암미! 암미!’라고 하면서 부르던 자들을 하루아침에 ‘로암미’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발목 잡히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라도 버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격없는 자가 구원받았으며 하나님께서 한없는 은혜로 우리들을 참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위험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당당한 자격이나 되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치면서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늘 부족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잘한 일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이 일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체로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자격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왔으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택하신 것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믿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아무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을 인정하고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우리 안에 있는 음란한 성향이나 죄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몰아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연약해도 쓰러지거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속에서 고멜처럼 아무리 음란한 욕구가 치솟아 오른다고 해도 자신의 그런 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구하면 절대로 넘어지거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고 자신이 오래 믿은 것을 자랑하면서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그는 이미 깊은 죄악에 빠져 들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암미’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무슨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과 합침으로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움받으실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헌금을 바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큰 오해입니다. 요즘 하나님이 너무나도 어려우시고 또 그 종들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이 돈으로 좀 하나님을 도와야 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악할 뿐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도움 받으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데 하나님께서 곡식을 주셨고 또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으며 직장을 주셨습니다. 당장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이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다 드리는 의미에서 헌금을 바치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요. 그 전부가 하나님에 대한 소개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엄청난 분이십니다. 이렇게 한 민족의 역사 전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다 소화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개인도 하나님을 완전히 다 알 수 없고 그의 은혜를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 수백만 명에게 은혜를 주시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아주 돈 많은 훌륭한 사람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더 이상 굶지 않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부자가 고아원에 와서 한 아이를 아들을 입양했다면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부자도 고아원 전체에 있는 아이들을 아들로 입양한 일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부자가 있다면 그는 정말 부자일 뿐 아니라 그의 사랑은 엄청나게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아원 하나가 아니라 한 노예 민족 전체를 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왕도 이런 왕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돈이 많다고 하는 재벌들도 이런 식으로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입양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해야 겨우 표시가 날 정도로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부모나 선생들은 똑똑하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을 훈련시켜서 세계 정상급의 선수로 만들어내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도저히 이 세상에서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최고로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 개인은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암미’로 삼으신 것은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얼마나 큰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 이신지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체로 만족하고 더 이상 변하려고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과는 중대한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주시면 없이 지내야 합니다. 만일 자기들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업신여기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시면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렵게 하시면 어려운 상태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무한히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실망시키시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구원하시며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인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악용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되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징계하시고 그 존전에서 쫓아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은 겸손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교만한 순간부터 우리들의 지위는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한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이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산성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완전한 때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이방인들을 땅끝에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이방의 빛으로, 선교사로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루셨던 것과 같은 자비로운 방법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듯이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닮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셔서 이스라엘 열 지파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지속적인 구원

하나님께서는 지금 부패한 이스라엘을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 전체가 취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10절,“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버리시겠다고 해 놓고서 금방 또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구약 예언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은 조금 전에 로암미라고 말씀하셨던 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지금 로암미는 멸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변화되는데 실패했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 전체를 포기하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입양을 해서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만 크게 망신을 당하고 그 계획이 실패했다면 ‘다시는 내가 이런 짓을 하는가 봐라’하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 문을 닫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끝까지 불순종하면 그 사람은 버리시지만 그 계획을 취소하지 않으셔서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 이 타락한 백성들을 버리신다고 해서 구약 성경 전체가 파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언약이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단지 스스로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은 자들만 그 자리에서 쫓겨 날 뿐입니다.

이렇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받는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셨습니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오셨습니까? 온 이방 나라에서 불러 모으셨습니다.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10절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변하셔서 어느 때에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했다가 이제는 내 자녀라고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이방 족속들을 향하여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로암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향하여 ‘암미’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변절에 화가 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가 없었습니다.

11절,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이스라엘 민족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시 통일되어서 회복된 온전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한 두목을 앞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선 표면적으로 보면 분리된 두 이스라엘 자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몰론 이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스라엘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포로로 잡혀가서 혼혈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의 이스라엘은 사실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의 피라고는 그 전체에서 한 방울이나 두 방울 밖에 섞여있지 않는 완전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옛날 자기 조상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하더라는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육체적인 이스라엘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이스라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결국 육체적인 이스라엘 자손들과 정신적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한 두목을 앞세우고 하나님께로 나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허물어지고 온 인류가 하나되어 하나님께 나아온다는 뜻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한 두목’이라고 했는데 좋은 번역같지는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머리’로 되어 있습니다. 한 분을 머리로 한 한 지체를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정말 원수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은 회복될 수 없는 교만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중에서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둘째 가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했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열 지파를 떼어서 독립했고 이 찢어진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고 양쪽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양쪽이 다 망하고 난 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 찢어진 상처는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한 성령으로 말입니다.

오늘 교회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조직이 아니고 겸손의 영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정죄하는 감정을 성령으로 눌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두목 밑에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르엘의 날이 크다’고 했는데, 여기 ‘이스르엘’은 4절의 이스르엘과 다릅니다. 4절의 이스르엘은 예후 왕가를 멸절한다는 뜻의 멸망의 이스르엘인데 여기서 이스르엘은 원래 히브리어 뜻대로 ‘심는다’는 뜻의 이스르엘입니다. 이제는 한번 심으면 영원히 뽑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셨다가 뽑았던 것과는 달리 새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굳게 심기울 것이며 결코 뽑히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르엘의 날이 크다’라는 것은 다시는 이들이 뽑히지 않고 그곳에서 크게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그들을 열매맺게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사람의 수를 의지하고 조직을 의지한다면 우리도 뽑힐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무엇이라고 말하기를 원하십니까? 2: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서로 이런 말로 위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확신이 없어질 때마다, 어려움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지려고 할 때마다 서로 당신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형제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매라고 하면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겸손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로암미였다가 암미가 된 것을 생각하고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갑시다. 그리고 계속 변해 가십시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서로 더 사랑하고 더 좋은 관계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충만하게 나타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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