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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호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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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뜨거운 사랑(호 11:1-11)

요즘 우리 나라는 총선을 치루면서 후보들이 상대방을 깎아 내리기 위하여 군에 갔다 오지 않은 것이나 세금을 내지 않은 것 심지어는 전과 기록까지 들추어서 비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람과 비교하느냐 하는데 따라서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다른 평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상태가 문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형편이 없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스스로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혼동이 무엇인가 하면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하는 사람인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는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못한 생활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를 두고 엄청나게 고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상태가 소돔과 고모라에 비해서 조금도 나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의 상태에 대하여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멸망은 기정 사실인데 방법을 두고 고민을 하십니다.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게 하느냐 아니면 유황불로 모두 멸망하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빚어지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는지 그 근본 부르심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기대하신 가장 분명한 목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호세아서의 극치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실 때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들이 아니라 결심하고 등을 돌리는 망나니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고 돌이키지도 않는 패륜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985168;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부르시는 목적이 있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선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하나님의 그 선한 뜻에 비교하여 평가해야지 다른 것과 비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무서운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의 심정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민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세번째는 이스라엘의 미래입니다. 앞으로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주 짧은 한 장의 말씀 속에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어떤 심정으로 부르셨는지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1절,&985170;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불러내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들을 불러내었다’고 해서 마치 진짜 아들을 부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원문에는 ‘아들로 불러내었다’라고 하여 전치사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아들로 삼기 위하여’ 불러 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아들로 삼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은 작고 귀엽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나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 그들을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귀엽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는 전혀 귀엽지 않은 아이도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귀여운 데가 전혀 없이 완전히 밉상 덩어리일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에 마음에 그리는 상(image)이 하나씩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아무런 뜻없이 부르시지 않습니다.부르실 때에는&985168;이 사람이 반드시 이런 모습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어떤 그림을 가지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셨던 그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들’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들로 삼기 위하여 부르셨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모형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전수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유별나게 가까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과 같았습니다.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만 가지고 있는 비밀을 전수해 주었고 아들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와 아들은 철저하게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하나님을 흉내내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모든 귀한 것을 물려 받아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대로 이 세상에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참 흥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하셨을 때 마태는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 2:15,&985170;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떠난 것이나 예수님께서 헤롯을 피하여 애굽에 있다가 돌아가는 것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을 일꾼이나 잡역부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들로 삼기 위하여 부르셨으며 그들로부터 아들같은 행동을 기대하셨습니다.

언제 그처럼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고 아무런 능력이 없을 때입니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것을 로마서 5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롬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를 가르켜 하신 말씀입니다.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죄인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참 죄를 짓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할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아들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은 제가 목회자가 된 후부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은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싫어하던 짓만 골라서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술이나 퍼 마시고 우상에게 찾아가서 절을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던 일만 골라서 할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부시럭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닮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닮은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부르심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절,&985170;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원문에는 ‘선지자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이 부를수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그들이’은 선지자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계속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세상으로 떠내려 가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은 아들이 되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기를 쓰고 아들이 될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에게 분향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하고 바알같은 신들을 좋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욕심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하나님을 닮게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잘되고 싶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더 크게 역사하셔서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우상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 세상에 살면서 욕심을 버리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더 채우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자기 욕망을 표현해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욕망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3절,&985170;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부분은 완전히 엄마가 아기의 걸음마를 가르치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엄마는 아기에게 새로 걸음마를 가르칩니다. 한 발 한 발 움직이도록 하다가 넘어지려고 하면 붙들어 주고 안아 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그들을 고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치료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법을 가르치셨고 그들이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려고 하면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힘든 것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하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물론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우지 않고 매일 누워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그 아기는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없이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는 한이 있어도 걸음마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힘들게 하시고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따라갔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985170;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아마 그 당시에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때 어떤 줄을 가지고 당기면서 걸음마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줄’입니다. 이 사람의 줄과 비교되는 것이 목에 씌우는 멍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처럼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기고 마치 아기를 훈련시키듯이 사랑의 끈으로 당기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이 말씀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원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많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늘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주셨고 하루 하루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불안한 것이 싫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놓고 안정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렵게 하신 것은 영적인 걸음마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걸음마에서 모두 실패를 했습니다.

2. 현재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5-7절 사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5절,&985170;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우리말 성경에는&985168;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앗수르 사람의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부정 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985168;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겠으며 앗수르 사람들이 그들의 왕이 되지 않겠느냐?’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원래 노예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애굽이 아니고 앗수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믿는다 하면서도 제 멋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는데 원래 상태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로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7절,&985170;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무슨 데모를 하는 장면같습니다.모두 다 바닥에 주저 앉아서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뜻을 돌이키는 자는 일어서라고 해도 한 사람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결심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물러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룩’이 너무나도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자신의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으로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무엇이든지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지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예 마음을 결정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아직 죄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은 체질이 맞지 않아서 견디지 못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만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아남지 다른 것 때문에 온 사람들은 지기 발로 걸어나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늘 죄! 죄! 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6절,&985170;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는 순간 그들에게는 칼이 찾아옵니다. 그들의 빗장은 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공격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헤가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심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도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넘어지고 연약해서 실수하는 것은 아무리 넘어지고 자빠져도 하나님께서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결심하고 하나님을 버릴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을 거두어버리십니다. 그러면 마음껏 악의 세력이 공격을 하게 됩니다.

내과 의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몸에 사실 암을 일으킬 요인들은 많이 있는데 암의 발생을 억제하는 힘이 있어서 암이 발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요인이 맞아떨어져버리면 그때는 암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잘 해서 잘 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도 하나님을 그들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을 넘어서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의 손을 거두어버리시고 그때 바로 앗수르 군대는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실수하고 범죄해도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인정했더라면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는 하셔도 망하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끈을 스스로 끊어버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이 망할 때가 되면 그렇게 자신감을 생길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계산을 되어버면 틀림없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란 요인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두고 깊이 고민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그들의 삶 속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앗수르에 망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8절,&985170;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985168;아드마’와&985168;스보임’이 어떤 곳이냐는 것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면 유명하지만 아드마와 스보임이라고 하면 잘 모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 상태는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아드마와 소보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무서운 성적인 타락과 무정과 부태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동성연애와 같은 변태적인 성 행위가 만연되어 있었고 착취와 학대가 가득했습니다. 사실 드러나지만 않았지 그들과 소돔과 고모라는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생각하면 그들은 유황불로 멸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985170;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이 돌고 돕니다.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처럼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붙들어 주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지 않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엄청난 갈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불 붙듯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 속에서 뭔가 하나라도 건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살려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만한 것이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재판장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재판장이 피고인을 불쌍히 여겨서 그를 살려 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를 살려 줄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때 재판장은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를 살려 줄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거대한 빙산의 한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 사회의 죄는 바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성적인 죄와 불의와 부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를 IMF로 치신 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특혜 조치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단 하루라도 유황불로 멸망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서 건질 자라를 건지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말씀을 듣기만 하면 변화될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대단히 불안정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면 다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도 이곳이 좋은 사람들은 이곳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왜 롯의 아내가 소돔을 탈출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까?

그가 좋아하는 것이 모두 소돔에 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돔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곳을 떠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과 함께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결단을 내리십니다. 9절,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부패한 본질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우리의 죄짓는 본성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드마와 스보임같은 진노로 하시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부담으로 돌리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무슨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진노로 그들을 찾아가지 않고 그들 가운데 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 안의 어떤 계획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고 아들을 십자가에 다심으로 이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보임이나 아드마같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쒸우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퍼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자유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3.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정한 기간 동안 노예상태로 버리신 다음 어떻게 하십니까? 다시 그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10-11절,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전부 자신의 부담으로 돌리신 후에 큰 소리―사자같은 큰 소리―로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그러면 포로되어 간 모든 곳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새같이 비둘기같이 거역하지 않고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큰 소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누구든지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온 세상 끝에 있는 사람들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다 듣고 포로된 곳에서 돌아와 자기 집에 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됩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주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자를 먼저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은혜로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오순절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에서 몰려 온 자들이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그들이 회개하여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원래 택한 백성들이 아닌 우리들까지 사자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떨면서 이 존전에 나아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성을 두고 깊이 고민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다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긍휼이 불일듯 하셔서 우리를 불로 멸망시키지 않고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책임을 아들의 십자가에 돌리시고 큰소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옛 이스라엘처럼 행하는 것을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떨며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위엄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복음의 위대한 부르심에 떨며 나아오는 자만이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교해야 할 원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받은 노예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걸음마를 배우는 것입니다. 걸음걸이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줄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아버지의 겸손입니다. 결국 이 겸손을 배우지 못한 자는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답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걸음마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청난 고민가운데 세워진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의 답답함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꼼짝을 못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하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누리고 싶은 것도 많지만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처음 느꼈던 그때를 잊지 맙시다.&985168;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때 주님이 어떻게 찾아오셨는가?’하는 것를 생각하고 결코 이 사랑의 줄을 끊지 마십시오.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이 답답함이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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