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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폭풍 속의 자비 (욘 0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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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선을 뒤집어라

여러분, 생선 좋아하시지요? 특히 바닷가 출신들은 생선을 참 좋아하시더군요. 저는 생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구운 생선을 접시에 올려놓은 모습은 참 먹음직스럽지요. 젓가락으로 그 생선을 발라먹다가 한쪽 면을 다 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 생선을 뒤집지요? 그러면 완전히 새 생선을 갖다놓은 것처럼 되고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먹게 됩니다. 그런데 배를 타는 사람들은 생선을 먹다가 한쪽 면을 다 먹은 다음에 우리처럼 절대로 생선을 뒤집어서 먹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놓고 가운데 있는 뼈를 발라내고 밑에 있는 살을 먹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겠어요? 그런데 배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편하게 생선을 먹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먹으면 더 맛있을까요? 그래야 영양분의 손실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자기들이 잡은 생선에게 예의를 표시하기 위해서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진짜 이유가 뭔가 하면, 생선을 뒤집으면 배가 뒤집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배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배가 뒤집힌다는 것은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두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배타는 사람들의 특징이 하나는 억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굉장히 미신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수산업 하시는 분을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라는 말에 그분의 대답이 뭐였는가 하면, 어머니가 날마다 자기를 위해서 불공을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는 이유는 뭔지 아십니까? 위험한 배를 타기 때문에 아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하루에도 수천 마리의 생선을 잡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루에 수천의 살생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업보를 면하도록 불공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기가 막히지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지만, 그분들로서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생선을 뒤집으면 배가 뒤집힌다고 믿고, 생선을 잡기 때문에 불공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탔던 배의 사공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배를 타고 늘 모험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는 배가 뒤집히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선이었습니다. 배가 뒤집히지만 않게 할 수 있다면 생선 안뒤집기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용왕님께 처녀를 제물로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 사람들이 정말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서 배가 뒤집으려고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생선을 뒤집기 때문에 배가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배가 뒤집히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배를 뒤집으려고 하시는 이유는 오직 요나가 그 배에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만 바다에 들어 던지면 폭풍이 멈추고 배는 뒤집히지 않을 것입니다.

2. 죽어야 하나? 죽여야 하나?

이제 뱃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살아야 할 것이냐, 아니면 요나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이냐 하는 것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천주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번은 수업시간에 수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엄마가 아기를 낳다가 그대로 아기를 낳으면 죽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아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아기가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엄마가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간에 토론을 벌였지만 대부분 엄마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내 수사님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엄마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목숨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도 아니고, 누가 그 가정에 더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도 아니라,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살기 위해서는 아기를 죽여야 하는데, 아기가 사는 것은 엄마가 죽으면 된다는 논리이지요. 그것이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굉장히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수긍은 잘 가지 않는 얘기입니다. 죽느냐 죽이느냐의 원리를 너무 융통성 없이 적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원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중의 하나는 '절대로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경쟁해서 이기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입니다. 저는 경쟁해서 이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를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을 하면서 자기가 이기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한다면 다를 것이 없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일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면서, 심지어는 교회일을 하면서도 나의 유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피해를 필요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우리의 양심과 가치관과 신앙에 따라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뱃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그것과 비슷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는 요나를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내던지는 대신에 온 힘을 다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요나만 바다에 던지면 자기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데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게 노를 젓고 있습니다.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너무 양심적이지요? 그 뱃사람들이 그렇게 인간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니었을 것 같아요.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멀리 스페인에까지 가서 식민지를 개척한 이 페니키아 사람들은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아주 이기적이고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힘들게 노를 젓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인 요나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를 죽였다가는 자기들이 더 큰 재앙을 만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었을 때 뭐라고 하는가 보세요.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14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때와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시다고 생각할 때와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운전을 할 때는 과속을 할 수도 있고, 신호를 어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내 뒤에 경찰차가 따라오고 있으면 과속을 할 수가 있던가요? 신호를 어기고 갔다가는 뒤에서 당장 싸이렌이 울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렸어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경찰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처럼, 이 뱃사람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면전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잘못을 했다가는 당장 벌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3. 폭풍 속의 자비

마침내 이 뱃사람들은 요나와 그들이 동시에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나를 태운 채 항해를 하면 할수록 폭풍이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이 사람을 죽였다고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으로 간주하지 마시고 제발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요나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습니다. 이것을 본 뱃사람들은 더 놀라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기들을 죽이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기들 식으로 어떻게 했겠지요. 그리고 하나님께 맹세를 했습니다. 무슨 맹세였겠습니까? 이제 돌아가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하지 않았겠어요?

이 사람들은 폭풍을 멈추시고 요나 죽인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도 발견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목적이 오직 요나를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었다면 왜 배 하나를 뒤집지 못하셨겠습니까? 그 사나운 폭풍 가운데서 배가 뒤집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건을 다 버리고 배를 가볍게 했기 때문입니까? 뱃사람들의 항해술이 뛰어났기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그 뱃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폭풍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폭풍이 몰아닥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를 다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이원도 목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정말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 폭풍 같은 사고 가운데서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뱃사람들을 향한 자비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자비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목적은 다른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말을 안 듣고 도망가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니느웨와 상관없는 이 뱃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간 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순종을 사용하셔서 또 다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지요.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요나 있는 곳에 이방인의 구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도 그랬고, 니느웨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두 번 다 요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요나를 그 도구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가는 곳마다 이방인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요나가 가는 곳에 이방인의 구원이 있었다면, 오늘날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위해 여러분을 사용하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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