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마음에 안들 때 (욘 04:1-3)

첨부 1


여러분, 통금을 기억하십니까? 한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통금시간이 있었습니다. 밤 12시가 되면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일체 통행이 금지되었던 것이지요. 요즘 젊은 분들은 무슨 그런 게 다 있었느냐고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밤에 돌아다니면 잡아가는 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법입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그러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 11시 반이 넘으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쩌다가 12시가 넘어버리면 꼼짝없이 경찰이나 방범대원에게 붙잡혀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4시가 되면 풀려나 집에 갑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정부에서 그런 식으로 국민들의 삶을 통제했던 것은 정부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그만큼 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수준이 낮았었나 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 가운데서도 요나의 신학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나가 낮은 수준의 신학자라고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이유는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개하고 그분의 용서와 재신임을 받은 직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의 낮은 신학수준이 얘깃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1. 수준 낮은 선지자

요나가 분노한 이유는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바보같은 선지자입니까? 선지자가 그 정도였다면 구약시대의 영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겠지요. 구약의 계시가 신약의 계시에 비해서 열등한 것은 아니지만 계시라는 것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할 때,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의 차이는 계시의 점진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계시는 원시적이고 초보단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원수를 대하는 태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원수를 진멸하라고 하시면서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고 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양이나 소까지도 모두 죽이라고 하십니다. 또 원수들의 멸망을 위한 기도 같은 것도 신약의 분위기나 사상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당시의 사람들의 수준에 맞도록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그 수준이 매우 높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할 만큼 되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수용하시고 용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보이고 있는 태도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했고 그래서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히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었음에도 요나는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나 스스로 말하기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당시 요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정확하고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를 요나가 수용할 수가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성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끊임없이 예수님께 반항하고 대적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이 세리나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친구처럼 지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세리나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어야 했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시니까 밸이 꼴려서라도 예수님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겠어요?

요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니느웨가 멸망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인종청소를 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이 나의 행복의 이유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고 또 못된 생각입니까? 신약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구약에서 주신 윤리가 저급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조항들을 보면 얼마나 인간적이고 약자를 배려하는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물건을 전당잡고 돈을 빌려 줄 때 그 집에 들어가서 전당잡을 물건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돈 빌리는 사람이 물건을 자기 손으로 가지고 나와서 빌려주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 포함되어 있는 사상이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그 사상과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그 행위 자체만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잘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웃을 원수 대하는 것같이 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원수는 미워하더라도 이웃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시가 완전히 나타났을 때 그것은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요나가 분노한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이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생각입니까? 불과 며칠 전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던 것이 누구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서 폭풍의 위험과 물 속에 던져지게 된 위기에서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자기가 용서받아서 멸망당하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용서받은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를 가리켜 이중잣대라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사람들, 제발 우리 주변에 없었으면 좋을 사람들입니다.

요나는 자기와 니느웨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자신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합당하지도 않는 이방인들이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교만과 독선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깨달을 수 없도록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아하, 하나님이 이방인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쓸데없이 이방인들을 용서하시는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실패였습니다.

2. 하나님, 실수하셨군요!

이처럼 하나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안 들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첫째로 과거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했고 좋았는가를 다 잊어버리고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는 언제나 불공평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과거에 그렇게 잘해 주시던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비록 지금 좀 섭섭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토라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했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자녀 삼아 구원해 주신 은혜가 가장 크고, 또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의 길로 인도하시고 좋은 것으로 베풀어주신 일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지 않았습니까? 그 은혜들을 생각하면 역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섭섭하고 하나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은혜들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요? 욕 중에서도 큰 욕이 뭔가 하면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는 말입니다.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하지요.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은혜에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된다면 정말로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거두어 가셔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려달라고 죽기살기로 매달리던 시절이 언제였느냐는 듯이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애초에 하나님 말씀 안 듣고 도망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러실 줄 알고... 이렇게 큰 실수를 하실 줄 알고 하나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내가 옳았잖아요?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어야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했다가 이게 무슨 꼴입니까?' 지금 요나는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렸다고 따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회개했던 것이 안해도 되었을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지난번에 했던 회개를 취소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때 했던 회개 취소합니다. 없던 일로 해 주세요. 그때는 내가 큰 죄를 지은 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잘못이 아니네요.'

우리에게 아주 위험한 상태는 무엇인가 하면 잘못을 범해 놓고서 그것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잘못을 해놓고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예요. 잘못했다고 생각은 되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삶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 하시는 일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진짜로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요나 보기에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틀린 이유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실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았습니다. 옳았던 요나의 판단은 니느웨 사람들의 씨를 말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낮은 수준의 신학, 낮은 수준의 믿음, 성숙하지 못한 삶 때문에 하나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 생각에 하나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100%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하고 자기 고집을 세우는 것은 우리도 이 요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으시지요? 하나님이 참 답답한 분으로 생각될 때가 있으시지요? 그럴 때 먼저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과거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놀랍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신실하시고 좋은 분이신가를 확인해 보는 일입니다. 바로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금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낮은 수준의 믿음과 성숙하지 못한 인격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께 분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도 늘 기쁘고 감사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으면 즉시 우리 모습을 확인하고 주님의 뜻에 우리 뜻을 맞추어 가는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하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