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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저울 (단 05: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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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종말론적 기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단지 끝나는 것으로 마는 것이 아니라 평가와 심판, 또는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했습니다.

끝나는 것은 인생뿐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정리하고 계산을 맞춰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양한 경험과 깊은 사색으로부터 어느 정도 결론을 얻은 전도서 기자는 말하기를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전 3:1-2).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아 그것은 피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우리의 운명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가령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곧 닥칠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겠지요.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 앞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지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한 준비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하나 이야기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해에 농사가 잘되어 풍년을 맞았습니다. 얼마나 큰 풍년이 들었는지 기존의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면서 한껏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부자가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도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진리는 거역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최소한 여러 해 동안은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이 다가오겠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테러의 대상이 된 것도 아니고, 죽을 나이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죽음이 사형선고를 받았거나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이 다가왔다고 느낄 때처럼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전혀 예고 없이 뜻밖에 찾아오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 부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죠.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여러 해 쓸 물건이 있다고 해서 그 물건 다 쓸 때까지 여러 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영혼을 도로 찾으셨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만큼 불완전한 계획은 없습니다. 목숨이란 우리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언제 죽을지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정말 멋지게 인생을 계획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오늘밤에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그래서 별세신학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도 아무렇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당황하고 부끄러움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다면, 여러분이 뒤에 남겨놓은 일들이 어떻게 될까요? '아, 아침 설거지 안하고 왔는데...' '아시아 식품 외상값 안 갚았는데...' 이런 분도 계시겠지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도 있을 것이고, 그동안 남들에게 숨겨왔던 부끄러운 일들도 만천하에 공개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죽게 될 줄 알았더라면 다 정리를 했었겠지요.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명망도 함께 얻었습니다. 부러울 게 없는 인생을 즐기게 되었어요. 어느 날 아침, 노벨은 배달되어 온 조간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의 제목이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사는 노벨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작성해 놓은 것이었는데, 실수로 그만 인쇄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놀라기도 했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기사를 읽던 노벨은 자신이 죽은 후 세상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게 될는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평가하는 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내놓을 만한 것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오히려 다이나마이트를 만들어서 인류에게 재난을 안겨준 인생이었을 뿐입니다. 그 잘못된 기사가 노벨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노벨은 다이나마이트의 발명자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애쓰고 공헌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온 세계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한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모든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심판에서 형편없이 부적합한 판결을 받은 한 사람을 봅니다. 벨사살 왕이지요. 그는 바벨론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에 의하면 이 벨사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두 번째 권력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그는 대바벨론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강한 존재였습니다. 믿어야 한다면 바로 자신을 믿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막강한 권력과 부귀를 누리며 천년 만년이라도 살고 싶을 인생이지요. 그런데 그날 밤에 그에게 종말이 임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비참하게 그 종말을 맞아야 했습니다.

인생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동반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벨사살 왕의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벨사살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그의 인생을 달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형편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항상 우리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지요? 왜냐하면 마지막에는 평가와 계산을 해야 하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만족하기보다는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 인생을 회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거두시는 순간, 우리는 그분 앞에 서서 우리가 살았던 동안의 일들을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예행 연습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오늘,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그 좋은 기회지요.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한 해였습니까? 아니면 그저 의미없이 세월만 허송했습니까? 다른 때의 일들은 제쳐두고,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살았던 모습, 말과 행동들을 가지고 한번 주님 앞에 서 보세요. 점수로 매긴다면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366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습니까? 얼마나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았나요? 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가져오라고 하시면 몇 개를 가지고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지난 1년간의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세요. 그만하면 됐다며 하나님이 합격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벨사살 왕처럼 형편없이 모자란 것이 드러나고 맙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2000년을 매우 유익하고 열심히 살았으니 다가오는 2001년도 안심하고 네 손에 맡기노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2000년을 땅 속에 묻어놓고 썩혔단 말이냐? 어떻게 너를 믿고 2001년을 또 너에게 맡기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 인생을 돌아보게 될 그 일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인 거예요. 우리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죽는 연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는데, 1년에 한 번씩만 죽는 연습을 해도 우리의 삶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죽는 연습한다고 해서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다거나 관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 보는 게 아니에요. 오늘밤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죽는 연습인 거예요. 하나님의 저울에 올라가 보는 것, 그것이 죽는 연습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모두 눈을 감고 지난 한 해 살아온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들리십니까?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당신이 그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라가야 할 순간입니다. 저울 위에 올라서십시오. 자, 이제 저울의 눈금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저울에는 여러 가지 눈금이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지 눈금이 보이지요? 좀더 세밀한 저울이라면 당신이 지난 1년 동안 몇 번 거짓말을 했는지 그 횟수까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 옆에 다른 눈금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1년 동안 당신이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는지를 말해주는 눈금입니다. 그 눈금은 어디만큼 가리키고 있습니까? 빨간색이라면 경고입니다. 초록색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시겠지요. 또 다른 눈금이 있지요? 당신이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는지를 나타내주는 눈금입니다. 아무런 감동 없이 한시간 앉아 있다가 돌아간 횟수도 나타나지요? 또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얼마나 선하게 또 의미 있는 곳에 사용했는지를 보여주는 눈금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배만 채울 줄 아는 사람을 위해서는 돼지의 그림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르지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는 몇 점이 나왔습니까? 또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는 몇 점입니까?

그 저울의 눈금들을 보면서 이 시간 조용히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저울에 나타난 당신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흡족해 하신다면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섭섭한 표정을 짓고 계시다면 용서를 구하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보고 '찍어 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는 말씀에, '주여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두루 땅을 파고 거름을 주어 내년에는 꼭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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