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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체험과 믿음 (단 0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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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과 믿음 (단 1:17-21)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듣고 아는 하나님과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만나본 하나님은 너무 다를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체험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저 멀리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안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과연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것을 들으시는지, 도대체 하나님이 내 형편에 신경이나 쓰고 계시는지, 하나님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신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계시기나 하는 것인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아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것,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바로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삶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채소만 먹고도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훨씬 안색이 좋고 건강하게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하나님이 바로 자기편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어요?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내편이시고 나를 도우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한 이상 바벨론 제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 있는 삶을 살게 되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하면, 3년의 훈련과정을 마쳤을 때 이 네 사람이 수석을 모조리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채소를 먹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 점심식사를 하는데, 우리 집사님이 만들어 오신 갈비찜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야, 다니엘 정말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겠다고 작정한 그 결단도 대단한 것이거니와, 식욕이 왕성할 때인 청년 시절에 맛있는 음식은 남들 먹는 것 구경이나 하면서 자신은 채소만 먹어야 하는 것이 참 힘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이 자기편이시고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했을 때, 채소만 먹으면서 얼마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를 했을까요? 그러다 보니 졸업할 때 수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채소만 먹는다는 절체절명의 결단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속에 살던 이 젊은이들이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있을 수나 있는 일이겠습니까? 자신들에게 그렇게도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대충대충 공부하고 대충대충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머리를 싸매고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체험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매사에 자신이 있고 당당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기 때문입니다. 채소만 먹어도 조금도 꿀리거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채소만 먹어도 고기 먹는 아이들보다 더 건강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너무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목회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교육전도사로 시작해서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목회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목회에 관해서 배우거나 실습을 해본 것도 없습니다. 저야 선교사 된다고 그쪽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요.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잠시 갔다 온 이후 해밀턴에 와서 2년 목회를 해본 것이 목회경력 전부입니다. 그나마 제가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할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도 없고, 그러다 보니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내 사는 동안 교회 개척하는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제가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여기 타우랑가에 왔으니 얼마나 걱정이 됩니까? 아는 분이라고는 여기 만복 집사님 내외뿐인 이곳에서 말이지요. 그나마 이 타우랑가에 계시는 분들이 한인교회에 대해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개척한다고 했다가 사람들도 안모이고, 그러다가 실망하고 그만두게 되면 얼마나 부끄럽고 낭패스러운 노릇입니까? 제가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안수하고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거나, 설교를 아주 잘해서 듣는 사람이 즉시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난다거나 하면 좀 안심하고 개척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또 제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거나 인격이 훌륭해서 감화를 끼친다거나 한다면 또 사람을 끌 수 있는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무슨 빵빵한 지원이 있어서 믿는 구석이라도 하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제가 돈이라도 많아서 물량공세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기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가꾸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 교회를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이 교회를 이끌어 가신다는 체험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놓을 것 하나 없고 자랑할 것 하나 없는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보고 저는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애원하고 매달리던 기도에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하시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최소한 이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10일 동안 채소만 먹고도 더 건강했던 것을 체험한 이 젊은이들이 3년 동안 아무런 불안이나 걱정 없이 채소만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저 역시 앞으로 이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역사하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체험은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체험의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체험을 했다고 믿음이 더 좋아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또 아닙니다. 코너에 몰렸을 때는 정신없이 기도하며 매달리던 사람들이 정작 문제가 해결되고 지나갔을 때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거나 혹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응답해 주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니까 우연의 일치로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체험이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이 분명한데, 그 체험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필요하다니 참 복잡하네요. 결국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는 말씀처럼, 믿음이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우리의 의지작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군요.

우리는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이 네 젊은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을 것이고, 그래서 졸업할 때 수석을 싹쓸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 보면 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셨고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공부는 다니엘이 하고, 공로는 하나님이 차지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불만입니까? 저는 분명히 이들이 다른 소년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 수석을 했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식을 얻게 하시고 명철하게 하셨기 때문에 수석을 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같은 사건과 결과를 놓고도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은 이처럼 다른 것입니다.

이 젊은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셨기 때문에 수석을 차지했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한다는 진리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젊은이들의 수고와 노력이 값어치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그러나 흰 옷을 입고 금면류관을 쓰고 있던 24 장로들이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며 그 면류관을 주님의 발 앞에 던지는 계시록의 장면(계 4:10)을 생각해 보십시오. 반대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챘다가 우스운 꼴을 당한 헤롯(행 12:21-23)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는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는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우리의 능력과 재주로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노력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해도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처럼 지혜가 탁월했던 사람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설마 그 정도일까 하는 마음으로 와서 솔로몬을 테스트해 보려고 왔던 시바 여왕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솔로몬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했어요.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고 했는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가장 첫걸음 아니겠습니까? 그 놀랍고 탁월했던 솔로몬의 모든 지혜도 사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아무리 아이큐가 높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수석을 했다 한들, 하나님이 이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기 때문에 수석을 휩쓸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진술 아니겠어요?

성경에 나오는 여러 테마들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역전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역전의 드라마들이 있지요.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는 데 그 통로가 되었던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2-53)라고 노래했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성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학적 현상으로 보면 혁명이라고 하겠지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있던 앙뜨와네뜨 왕비가 시끌벅적한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궁금해서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하녀에게 물었습니다. 하녀가 혁명이 일어났다고 대답하자, 이 답답한 왕비, 혁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혁명이란 제가 왕비가 되고 왕비님이 제 하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대역전의 드라마가 다니엘을 통해서 바벨론 궁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같은 클라스에서만 수석을 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제국의 모든 박수와 술객보다 그 지혜와 총명이 십 배나 나은 줄을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 인정했다는 것 아닙니까? 나라가 망하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올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그 치욕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바로 그 전쟁포로 젊은이 몇 명이 대 바벨론 제국의 학문과 지식 분야를 압도적으로 정복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발견한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고전 1:27) 분이었습니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했다고 떠들었습니까? 누가 전쟁의 신 여호와의 힘이 이제 떨어져서 유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망했다고 했습니까?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변함없는 능력을 온 천하에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엄청난 역전의 드라마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꼭 수석을 하고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해야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당당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에 따라 우리를 통해서 그러한 대역전의 드라마도 연출해 나가실 것입니다.

21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한 마디입니다. 다니엘이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때까지 살았다거나 그때까지 공직에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이 지난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문제는 고레스 왕 원년에 일어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을 다니엘이 살아서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사건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전쟁포로로 잡혀온 이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다니엘이 무척 오래 살았네요. 다니엘을 그렇게 늙도록 오래 붙잡아두신 이유는 이처럼 좋은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죽지 못하고 있던 시므온이 마침내 결례를 행하러 성전에 올라온 아기예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므온이 이 아기를 안고 뭐라고 합니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소원이 성취되었으니 이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쟁포로로 잡혀서 이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온 다니엘에게 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너무 좋으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 좋으신 하나님이 다니엘에게만, 시므온에게만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똑같이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직접 체험하며 살도록 합시다. 저는 이 타우랑가 한인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로 자라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는 것을 꼭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 좋은 선물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신실하고 믿음 있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좋은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정말 가치 있고 좋은 선물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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