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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펀치 한 방 (단 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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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가장 큰 패배와 수치는 유다 왕국이 느부갓네살에게 망해서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기물이 탈취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무참히 짓밟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은 것은 그들이 범죄함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막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민족공동체를 박살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일종의 손상이나 도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만일 느부갓네살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인식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기물을 탈취해다가 자기가 섬기는 신의 보물창고에 쌓아두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도전과 모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시각으로 본다면 느부갓네살 정도야 하나님이 부리시는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트러블메이커입니다. 모두가 과거에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전쟁의 신 여호와가 느부갓네살에게 패배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건재하시다는 것을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같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젊은이들의 개인적인 헌신과 믿음의 삶을 통해서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의 트러블메이커였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이 직접 트러블을 일으키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중원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하고 원정에서 승리하여 세계를 제패한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 그러니까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하루는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그 꿈이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 우리가 늘 겪는 일이지요.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수면을 취하는 동안에도 뇌가 활동을 계속하기 때문에 늘 꿈을 꾸지만 깨어났을 때는 거의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론 꿈을 기억하는 경우도 많은데, 깨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져버립니다. 아, 정말 달콤한 꿈을 꾸다가 그만 잠이 깨버렸을 때 얼마나 아쉽던가요? 또 누군가에게 쫓긴다거나 무서운 꿈을 꾸다가 잠이 깨면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심이 되던가요? 그러나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런 꿈은 다시 기억하기 어렵게 잊혀져버립니다. 이처럼 꿈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사실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꿈도 있을 수 있습니다. 꿈 하나 때문에 인생이 변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꿈을 그냥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성공적인 삶으로 승화시킨 인간승리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유명한 사람들의 출생 배후에는 매우 특별한 태몽 이야기가 따라오곤 하지요. 인간의 의식활동과 심리작용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꿈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고, 그래서 해몽이라는 분야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꿈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꿈을 계시의 방편으로 종종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개꿈이라고 치부하고 마는 일장춘몽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의미있고 중요한 꿈들은 하나님이 관할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선지자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사무엘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면 사무엘에게 가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고 나니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때의 답답한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삼상 28:6). 솔로몬이 새로 왕이 된 후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바로 솔로몬의 꿈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있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수직 상승시킨 사건은 바로의 꿈을 해석한 것이었는데, 그 바로의 꿈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즉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종종 인간의 꿈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꿈이 바로 그런 꿈입니다. 만약 느부갓네살이 꾸고 금방 잊어버린 꿈이 한낱 개꿈이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것이었는지 그 꿈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면서 생각을 하고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그 꿈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쳐버릴 그런 하찮은 꿈은 분명히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그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 꼭 알아야 할 꿈이고, 또 그 꿈이 무슨 뜻이었는지도 꼭 알아야 할 그런 꿈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알 수가 없으니 그만 이 왕이 잠도 못자게 되고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트러블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이겼다고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펀치 한방에 그만 똥오줌 못가리는 형국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짓밟고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해놓고, 마치 하나님을 정복한 것처럼 기고만장했으니 어찌 이 느부갓네살이 무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사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계에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공의를 믿고 보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사람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어찌 무사할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트러블메이커 노릇을 한 사람이 어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트러블을 피할 수 있겠어요?

우리 주님께서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고 그 정확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물론 아닙니다만, 어쨌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서도 온전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정말 조심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교회 시끄럽게 하고 분열시킨 사람 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 속에 살아가는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타우랑가 한인교회를 새로 시작해서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목사인 제가 부르심을 받아 앞장서고는 있지만, 이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앞으로 어떤 세력과 어떤 개인이라도 이 교회를 깨뜨리고 상처입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제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의 끊임없는 시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하며, 사랑으로 감싸며, 서로 위로하며, 함께 힘을 모아 주님의 몸된 이 교회를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음해하고 깨뜨리려는 세력과 시도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처리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반격으로 제정신을 잃어버린 느부갓네살의 행동양식을 한번 살펴볼까요?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술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말하고 그것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들의 몸을 쪼개고 그들의 집을 거름터로 삼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절대권력이라 하지만 이런 억지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여기 나오는 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라는 단어들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그 나라의 최고 지성인 집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고의 지성인 집단이라 한들 잊어버린 왕의 꿈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의 최고 두뇌집단이 몰살을 당하게 될 운명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은 적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외부의 도전이 없을 만큼 강력한 세력은 반드시 그 내부적인 결함에 의해 붕괴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이 그 꼴입니다. 대제국의 통치자로서 그리고 세계의 정복자로서 최절정에 달한 그의 권력은 이제 스스로 붕괴될 위기에 부닥친 것입니다. 아무리 느부갓네살 자신의 능력이 탁월하다 한들,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이 두뇌집단이 반드시 필요하고, 결국 이 집단이 없이는 바벨론 제국도, 느부갓네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집단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것은 자신의 권력과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파괴시키겠다는 행동입니다.

머지않아 바벨론의 궁전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되겠군요. 좀 머리가 좋고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은 모조리 불려가서 몸이 두 쪽이 날 것입니다. 물론 집안 식구들까지 몰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판 분서갱유나 문화혁명이 될 것 같군요. 사실은 느부갓네살이 두뇌집단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심지어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들 가운데서도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발탁해서 자기의 Think Tank를 보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두뇌집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또 잘 활용했던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뻔히 자신과 나라의 파멸을 초래할 일을 거침없이 밀고나가는 것은 그만큼 그가 교만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의 교만으로 인해서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역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입니다. 즉 그의 행동에는 자신의 주장과 자기 사정만을 고려할 뿐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입장은 전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수준 낮은 지도자나 권력자의 행동양식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에 근거한 권력은 매우 악한 권력입니다.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갈취해서 치부하고 사치했던 탐관오리들 생각이 나지요?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는 지도자입니다.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주신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우리와 같은 미천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던 분, 그리고 심지어는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분을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요?

같은 개라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팔자가 완전히 달라지지요? 주인의 식탁에 보신탕으로 올라갈 날을 기다리는 개들이 있는 반면에, 크레디트 카드를 소지한 개도 있고, 주인이 죽으면 그 재산을 상속받는 개도 있습니다. 좋은 주인, 또는 좋은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역사의 발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지도자들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한국에서 곧 대통령 선거가 있기에 생각이 나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 좋은 지도자가 선택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군요. 여기 있으면서는 투표도 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또한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을 다스렸던 느부갓네살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때 이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더 선한 사람, 좀더 합리적인 사람, 좀더 양보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를 다스려 주시라고 맡기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인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느부갓네살처럼 좀처럼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는 수도 있습니다. 또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게 될 때도 있습니다. 혹은 너무 외롭고 슬퍼서 견딜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일생을 망친 경우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혼자서 그런 감정을 다스리고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면 정말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실패가 온 나라의 두뇌집단을 몰살시키고 나라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데 실패할 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많은 손실과 해악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믿음을 가진 사람의 행동양식은 분명히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다스리셔서 미움이나 분노나 슬픔이나 외로움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도록 그분의 손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실패한 우리가 두 손 들고 돌아올 때 언제라도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우리 모두 늘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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