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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단 0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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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렸을 때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할머니나 삼촌을 졸라댔던 기억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옛날이야기의 구성은 대체로 어떤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도입 부분에서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의 하나는 어느 나라에 또는 왕궁 내에 무슨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요. 가령 공주가 괴물에게 납치되었다거나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왕은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에게는 공주와 결혼시키고 나라의 절반을 준다고 포상금을 거는 것입니다.

나라의 절반을 준다는 것은 왕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세례요한을 목 벤 헤롯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자기 생일잔치에 의붓딸 헤로디아가 나와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헤롯이 뿅-갔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 뭐 갖고 싶니? 뭐든지 줄 테니까 말만 해. 네가 원한다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막 6:22-23). 아무리 큰 공헌을 했다 한들 나라를 통째로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왕 자신이 물러나야 하니까요. 그래서 절반을 떼어 준다는 것이지요.

나라의 절반과 왕의 포상금

여기 나오는 벨사살의 이야기에도 똑같은 패턴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잔으로 술을 마시는 호기를 부리려다가 들이닥친 재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손가락이 벽에 글자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왕은 온 기력을 잃어버릴 정도로 경악했고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그 손가락이 벽에 쓴 글자를 아무도 읽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왕의 행위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분명한데,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더 두렵겠어요? 그래서 포상금을 걸지요.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벨사살이 자기의 능력과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있지요? 왕이 최고의 보상을 한다면 나라의 둘째 치리자로 삼는 것일 텐데 벨사살은 셋째 치리자의 보상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벨사살이 바벨론 제국 권력서열 1위가 아니라 2위였기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나보니더스의 아들인데, 나보니더스는 나라를 아들 벨사살에게 맡기고 아라비아 반도를 정벌하러 갔다가 거기에 도읍을 세우고 10년 동안이나 머물고 있었습니다. 벨사살로서는 당장 왕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왕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서열이 2위였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는 권력서열 3위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어쨌든 나라의 권력서열 3위라는 어마어마한 포상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 술사들이 총동원되었어도 알아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다니엘이 등장해서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이 패턴 역시 다니엘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잊어버렸을 때, 세계 최고의 학문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갈대아 박사들, 술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 끌려온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해석까지 했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것은 느부갓네살 시대에만 필요한 메시지가 아니라 벨사살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할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박사들이 읽지도 못하고 해석도 할 수 없는 그 벽에 쓰인 글자를 다니엘이 읽고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온 천하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역시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는 당연하듯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님을 보세요. 자기 아들을 둘이나 죽인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자기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세상의 법칙과 상식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행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했습니다(고후 3:3). 그리스도의 메시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다니엘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을 증거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왼쪽 뺨을 맞고도 오른쪽 뺨까지 돌려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갈고 원통한 마음에 치를 떨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인생의 목표삼아 남을 속이고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바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가치, 즉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해야 합니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그리스도인은 맛 잃은 소금입니다.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꺼져버린 등불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까? 일요일마다 성경책 들고 교회가는 것입니까? 신상명세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아이덴티티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 그리스도의 편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아이덴티티인 것입니다.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극한 고통을 참고 견딘 사람들의 모습을 나열한 다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세상이 두손 들어버린 사람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아이덴티티인 것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줄까?

여기 등장하는 다니엘은 90이 넘은 노인입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이 황망한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태후가 들었습니다. 태후는 왕실의 어른임과 동시에 왕실의 살아 있는 역사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이와 같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다니엘이 해결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왕을 찾아가 다니엘을 천거합니다. 왕은 나라 안의 가장 유능하고 지혜로운 박사들, 술객들을 불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정작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름이 잊혀진 채 숨어 있었군요. 즉 다니엘은 숨어 있는 진주였습니다.

태후의 말을 빌어도 다니엘은 거룩한 신들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사람입니다. 비록 늙어서 은퇴했다고는 하나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초야에 묻혀 있었고 왕이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도 종종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고 슬퍼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거야? 왜 내가 이렇게 합당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거야? 속상하지 않겠어요? 세상이 나의 진실을 몰라줄 때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몰라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세상도 우리를 알아주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즉 먼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고 순서입니다. 세상에서는 잘 알려지고 인정을 받는데, 하나님이 정보가 부족해서 그렇게 유능하고 성실한 우리를 몰라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박수와 술객의 대장으로 임명했던 그 유명하고 유능했던 다니엘은 벌써 잊혀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젊은 왕은 다니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니엘의 믿음과 신실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결국 왕의 앞에 나가게 되었고 바벨론의 권력서열 3위까지 오르게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눈에 띄었다고 해서 꼭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면, 세상의 인정을 받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종교개혁의 표어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다니엘이 초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는 동안 궁궐에는 수많은 박사와 술객들이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서로 잘났다고 떠들며 경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짜 고수는 중원에 나타나지 않고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수가 많지요. 세상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정말 실력있고 훌륭한 인재는 아무데나 널려있는 것이 아니지요.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눈보라를 헤치고 산속 시골마을에 세 번이나 찾아가야 했습니다. 이처럼 진짜 실력자, 진짜 인격자는 자기가 나서서 떠들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만한 실력과 인격을 지녔으면 세상이 알아주는 것을 초연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

정말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자기 믿음 좋다고 떠드는 것 보셨습니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성숙한 인격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조용히 숨어 있습니다. 나서기 좋아하고 많이 떠드는 사람, 제가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에 비춰봐서도 별로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닙니다. 어디 가서나 스포트라이트 받기를 좋아하고 늘 화제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사람, 별로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 아닙니다. 오히려 미숙한 인격을 가졌을 때 그런 행동양식을 보이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특히 교회는 믿음과 사랑을 근거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무슨 경제적인 이익을 내기 위한 회사도 아니고, 이 교회라는 집단을 발판으로 해서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단체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기희생과 자발적인 봉사정신이 교회를 세워가는 벽돌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다른 곳에 가서는 잘난 체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와서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겸손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별난 사람도 없습니다만, 앞으로 많은 별난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거 아닙니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묵묵히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지려고 하지 않고 모두들 하나님 보시기에 성실하고 착하게 살려고 해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되는 것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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