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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니엘 청문회 (단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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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면 한국에서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게 됩니다. 새 정부의 총리로 고건 씨가 지명되어 국회 청문회를 거치고 있는데, 이 고건 총리 지명자는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늘 중용되었던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그 전의 정권에서 활약하던 사람은 조용히 사라지게 되고, 심지어는 정권의 성격에 따라 고초를 겪는 수도 숱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해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판이한 성격의 정권들에서 언제나 중용되었다는 것은 하여튼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정의 달인이라는 그의 별명을 처세의 달인이라고 바꿔서 그를 폄하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능력 하나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것인가 봅니다. 37세의 나이에 도지사를 했을 정도면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고건 씨와 비교를 하는 것이 아주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엘 역시 역대 정권에서 중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능력과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나라가 망하기 몇 시간 전에야 그를 권력서열 3위에 임명하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페르시아에서도 그가 중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리오 왕은 방백 120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 세 총리 중의 우두머리가 바로 다니엘이었단 말이죠. 전 왕조의 대신을 이렇게 중용하고 있는 것에서 새로 등장한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성격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획일적인 통치와는 달리 소수민족들의 자치와 민족종교를 보장함으로써 포용과 관용의 정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페르시아의 등장과 함께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니엘이 역대 정권에서 중용된 것은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깨우치기 위한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여기서 또한 다니엘 개인의 능력과 성품을 간과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업무처리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그는 꼬투리 하나 잡힐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청문회 하다 보면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사소한 비리나 실수까지 다 드러나게 되지 않던가요? 그런데 다니엘의 경우에는 그의 대적들이 그를 고소할 틈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하군요.

그런데 이 세상은 참 이상한 곳입니다. 그처럼 고결한 성품과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칭송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이런 사람들은 질시와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배척당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마음이 깨끗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더러운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실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신의 게으르고 정직하지 못한 모습이 드러나게 돼요. 그러니까 불편하고 싫은 거예요. 사람의 양심이 자극을 받으면 두 가지로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의 군중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이렇게 외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6-37). 다른 하나의 반응은 양심의 소리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으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 역시 마음에 찔린 것까지는 같았는데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행 7:54).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이 작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양심이 태풍을 일으키고 지각변동을 일으킬 때 그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외침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 찔렸을 때, 즉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났을 때, 한 부류는 베드로의 권유대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부류는 자신들의 죄악을 드러나게 한 스데반에 대한 증오로 그를 돌로 쳐 죽이는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지적받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죽고 사는 갈림길의 문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닿을 때 우리의 마음은 심히 불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이 자극을 받고 소리를 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애써 그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양심의 기능이 매우 저하되어서 결국에는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딤전 4:2)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즉 양심이 전혀 기능을 상실해버린 사람이지요.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에 분노하고 반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말씀을 들어도 그저 덤덤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는 약간 불편하지만 돌아서서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구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찌를 때, 그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갤 때,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재를 무릅쓰고 슬퍼하는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이 실현되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제사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결국 총리들과 방백들은 다니엘을 제거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다니엘에 대한 시기심도 작동을 했을 것이고, 올곧은 성품과 깨끗한 처신으로 자신들을 감독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다니엘에 대한 반감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다니엘로부터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다니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불법화시킴으로써 그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즉 다니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한다는 것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이들의 음모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 경배하기를 그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배한다는 테마가 이 다니엘서의 근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삶에서도 페르시아의 총리가 되는 것은 여호와를 섬긴다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유다의 전쟁포로 출신의 다니엘이 페르시아의 총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나라를 다스리신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총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행사를 포기한다면 뭐가 되겠어요?

우리는 때때로 어떤 것이 본질적인 일이고 어떤 것이 부수적인 일인지 헷갈릴 때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헷갈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익이나 안전에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지요.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페르시아의 총리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 잠깐 경배하고 기도하는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를 계속했다가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하게 된다는 현실입니다.

꼭 알맞은 비교는 아닐지 모르지만, 믿음 좋은 분들이 주일날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요일에 영업을 하면 매출이 평일보다 두세 배나 많다는 현실적인 유혹을 뿌리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익도 놓치기 싫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상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협점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십일조도 많이 하고 선교사업에도 열심히 참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로 섬기는 것이라는 그럴 듯한 이론을 들고 나오기도 합니다. 어차피 교회 일에도 돈이 필요하니까 그 부분에서 공헌을 하면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충이 되리라는 희망 같은 것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은 매우 인간적인 발상이고 현실성도 없는 얘기지만 대체로 수용이 되고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엉뚱한 것으로 드러나기 십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에서 어쨌거나 주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은데, 주일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결국 신앙생활이 매우 큰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주일 예배에 나가지 못한 것 때문에 갈등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가 그것이 반복되면서 점점 무디어지고, 나중에는 예배 참석하는 것이 별로 큰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손상된 신앙은 더 많은 십일조를 하며 선교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약속마저 이제는 헌신짝처럼 내다버리게 만듭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비록 주일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처음의 약속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돈으로 섬기는 일을 충심으로 시행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 진심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아직까지는 신앙이 무너졌다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늘 하나님께 죄송하고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고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위험을 내포한 상태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쨌든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지요.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사이에서 부수적인 것을 더 중시하고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풍족하든지 부족하든지 그것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그 부자청년은 재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었습니다(마 19:21). 그러나 그는 재물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그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양육하라는 하나님의 위탁입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자녀를 잘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자녀를 선택함으로써 하나님도 잃고 자녀도 잃는 불행을 자초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종종 문제시되는 사안입니다만, 워낙 대학입시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까 믿음이 좋다는 부모들도 자녀들이 고3이 되면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공부를 하게 만듭니다. 교회간다고 공부 못해서 대학 떨어지는 것보다 교회 안가고 공부해서 대학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실컷 교회활동도 하고 봉사도 하라는 것입니다. 일견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으로 섬기는 것보다 돈으로 섬기겠다는 사람의 논리와 똑같은 것이지요?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사이에서 부수적인 것을 선택하는 실수인 것입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하게 되었다면 그래도 다행이지요. 이놈의 대학에 들어가려고 교회에도 못 가게 된 것을 슬퍼하고 한탄하면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 경우라면 상당히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가정의 분위기라면 설령 대학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좋은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겠군요. 결국 하나님도 잃고 자녀도 잃는 결과 아닌가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거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불편한 마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고 복종하게 하고 변화된 모습을 창조함으로써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고, 아울러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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