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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식의 비늘을 계속 벗어야합니다 (마 2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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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전 TV에서 꽃게를 양식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꽃게가 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10번의 허물을 벗어야 한답니다. 어느 정도 크면 더 크기 위해서는 허물을 벗는답니다. 그렇게 10번을 해야 다 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허물을 벗어나 제대로 된 인간이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도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내가 자꾸 나를 감쌉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이 외식의 비늘을 계속 벗어야 진실한 자기가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외식, 하나님 앞에 보이는 외식 이런 외식들을 벗고 나면 진정한 자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클라인스가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Imposture Phenomenon』 이라고 하는 책이다. 임파스쳐는 ‘’사기꾼“이라는 뜻이다. 남의 이름, 남의 지식, 남의 명예를 도용했다는 것입니다. 사칭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면이 되는 것입니다. 무릇 '가면형상(假面現象)' ,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어느 사이에 우리는 자기 존재와 진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기업의 중역 가운데 70%가 이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하는 척, 아는 것 없으면서 대단히 아는 것처럼, 알고 보면 이렇다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으면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남의 것, 남의 돈, 남의 지식 가지고 내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닌 것을 긴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가면입니다. 외식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람은 Hypocrite ‘위선자’라 부릅니다.

이렇게 거짓된 내가 있는 한 진실하지 못합니다. 거짓된 나,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외식이 많습니다. 가식 말입니다. 겉은 말짱한데 속은 이상한 것 말입니다. 속마음과는 달리 거짓으로 꾸민 외식이 판을 치는 사회입니다. 사회에는 겉을 치장하여 속을 위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사고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이런 외식신앙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만은, 신앙에서만은, 하나님 앞에서만은 이런 외식과 위선과 가식을 벗고 순수한 자기로 설 수는 없을까요? 세상과 인간의 탈을 쓴 우리이기에 위선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 위선의 비늘을 벗어야 합니다. 가식과 외식의 비닐을 벗고 진실한 자기로 서야합니다. 어떻게 외식이라는 인간의 위선과 가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식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외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기로 서야합니까? 외식과 위선과 가식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23장 16절에서 36절까지는 칠화장 즉 예수님이 일곱 가지 죄를 지적하시는 특별한 장입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설적으로 죄를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외식이라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위선자의 정체를 백일하에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외식은 왜 죄입니까? 외식은 겉치레며 외면치레입니다. 외식은 속마음과 겉을 다르게 꾸민 거짓의 죄입니다. 외식은 위선입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 하는 위선자입니다. 외식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같이 꾸민 허위(虛僞)의 죄입니다. 외식, 위선, 가식은 거짓의 죄이기 때문에 벗어나야 합니다.

외식이라는 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랬습니다. 겉은 치장을 해서 말장합니다. 그러나 속은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합니다. 겉을 치장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위선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은 더럽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의롭게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속은 더럽습니다.

삶에도 외식이 있지만, 신앙생활에도 겉치레로 꾸미는 외식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외식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하루에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등 세 차례씩 회당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외출 중에는 길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습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기도하면서 외식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자는 외식자가 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셨습니다. 외식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합니다.

외식은 자기를 속이는 거짓의 죄입니다. 왜 외식하게 됩니까? 나의 허물과 추함과 더러움이 탈로 날까봐,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자기의 기득권을 상실할까봐, 인정받지 못할까봐.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죄입니다. 이것이 거짓의 죄입니다. 외식은 허위를 조작합니다. 외식은 가식의 죄입니다. 외식은 위선의 죄입니다. 외식에서 나온 죄가 더 무섭습니다. 알고 지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카톨릭 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택시 운전사가 한밤중에 여자 손님을 태우고 가다가 으슥한 곳에 멈추었습니다. 그는 여자를 차에서 내리게 한 후 살해했습니다. 가방을 뒤져보니 값비싼 보석과 햄버거가 들어 있습니다. 보석만 취하고 가방과 시체를 강에 버렸습니다. 그는 다음 날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은 살해된 여자의 햄버거가 든 가방을 그 증거물로 잡았습니다. 한 사람이 “왜 햄버거를 먹어 치우지 않았느냐?”고 살해자에게 질문하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이지 않습니까? 카톨릭 신자인 제가 어떻게 고기가 들어있는 햄버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보석이 탐이나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까지 하면서도 종교적 의식에만 철저했던 외식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도 살인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유사한 외식이 있지 않습니까? 외식, 왜? 이 외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기를 찾아야 합니까? 외식은 거짓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가지고 자기를 조작하는 위선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외식의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외식의 비닐을 벗으십시오. 순수한 자기로 서십시오. 자랑할 것 없지만 자기의 순수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진실한 나를 간직하십시오. 조금 인기가 없어도 좋아요. 거짓으로 나를 치장하기보다는 진실한 내가 더 소중하지 않나요?

둘째,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외식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식의 비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할 때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겉으로 꾸민 사실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아시며 우리의 거짓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동기를 아시며 내 본심을 아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는 속일 것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외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실만이 통합니다. 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는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외식도 옳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안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다.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을 보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보십니다. 이 안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외식과 위선과 가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격탐사기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시광선, 적외선, 마이크로파에 의한 사진 촬영 등에 의하여 원격 대상물의 정보를 수집하여 해석하고 거기 필요한 정보를 읽어 내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레이더와 같은 별도의 파장 영역을 사용하여 지하의 사물이나 인간의 눈으로 본 것과는 다른 실물의 정확한 실체를 밝히는 기술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원격탐사기술보다 더 정확하십니다. 정확하게 인간의 속을 꾀뚤어보시고 그 동기를 추적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이 통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아 17장 10절에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환하게 살피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보다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설 때 우리는 외식의 비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랍니다. 동네 입구에 빈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전에 작은 집이 있었고 큰 길이 나면서 집이 헐려 자투리땅으로 남은 공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이 공터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동네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동네 입구가 쓰레기장이 된 것에 분개한 동네 주민들 가운데 60명이 자신들의 도장을 찍은 탄원서를 구청에 냈습니다. 얼마 후 구청에서는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사람을 배치해서 단속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단속에 걸린 사람들 20명의 명단을 공개하였는데 그 중에 13명이 탄원서에 서명을 한 동네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가 왜 외식이라는 죄에 걸려 넘어집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 속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찌 거짓으로 뭉쳐진 외식과 가식과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까? 다시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내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가식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동기를 아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다시 서십시오. 하나님을 다시 의식하십시오. 외식이 줄어들 것입니다. 외식과 위선과 가식의 탈을 벗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위선과 가식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자기로 서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믿습니까?

셋째,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의 비늘을 계속 벗겨야 합니다.
외식을 가장 쉽게 표현한다면 거짓입니다. 외식은 진실한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의 탈을 벗어야 합니다. 진실한 자아를 찾을 때 우리는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거짓의 옷을 계속 벗고 진실의 옷을 계속 입는 것입니다.

거짓의 옷을 벗고 진실의 옷을 입기 위해서 우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을 벗는 훈련, 진실의 옷을 입는 훈련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식의 옷을 계속 벗어야 합니다. 위선의 옷을 계속 벗어야 합니다. 허위의 옷을 계속 벗어야 합니다. 이것은 훈련입니다.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의지와 결단 즉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의 위선과 거짓과 허위와 가식을 다 벗어보십시오. 계속 벗어보십시오. 나에게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별수 있습니까? 인간은 어쩌면 이런 외식으로 가득 찬 덩어리인 줄 모릅니다. 인간은 마치 양파와 같습니다. 양파껍질을 까는데 겉푸집을 뜯어내면 깨끗하고 하얀 속살이 나옵니다. 그렇게 몇 일 지나면 껍질이 푸시시해집니다. 다시 껍질을 한 조각 벗겨내면 또 깨끗해집니다. 계속 그렇게 껍질을 벗겨내면 나중에는 남은 것은 뿌리뿐입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파는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마치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에게서 위선과 가식과 거짓과 허위를 빼내버리면 우리에게 사실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추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내 놓을 업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 놓을 진실이 없습니다. 내 놓을 인격이 있습니까? 거짓, 위선, 가식, 탈, 이런 것들로 우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이라는 말을 성경은 스스름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까? 다 벗어 내버리면 아무 실체도 없는 그런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다 벗겨졌으면 이젠 진실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25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거룩하신 주님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옷, 거룩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비록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지 몰라도 주님은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눈빛 같이 빛나지는 않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진주같이 귀중한 보배가 될 것입니다.

나의 순수함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의 진실한 모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가능합니다. 거짓와 위선의 탈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진실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루이 14세 때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주일에 왕이 가족과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나오곤 했습니다. 프넬론이라고 하는 대주교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이 왕이 늘 출석을 했는데 좌우간 너무 많은 교인들이 모여서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예배당이 터질 정도로 모였습니다. 이 대주교의 마음속에 이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인지 왕을 만나러 오는 것인지 그걸 알 수가 없거든요. 그게 궁금해서 어느 날 한 번 시험을 해 보았답니다. 어느 주일에 왕과 왕족들이 마차를 타고 교회에 나왔는데 보니까 교인이 하나도 없고 대주교만 있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렇게 됐느냐? 하고 왕이 물었더니 대주교 말씀이 '아무래도 이분들이 예배하러 오는 게 아니라 왕을 만나러 오는 것 같아서 한 번 제가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조용히 광고하기를 '다음 주일은 왕이 못 나오십니다' 했더니 오늘 이렇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예배거늘 교회에 나갔다가 왕과 악수 한 번하고 왕에게 보이려고 하는 이 마음, 이게 바로 겉치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신앙, 외식적인 신앙입니다. 바로 거짓신앙입니다.

외식의 비늘을 벗기 위해서 이제 거짓의 옷을 버려야 합니다. 진실, 이것은 우리가 입어야할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평상복입니다. 거짓을 계속해서 벗어 던지는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곧 바로 진실이라는 옷을 입혀주십니다. 외식의 탈을 벗어버리는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곧 바로 거룩한 옷을 입혀주십니다. 가식과 위선이라는 외투를 벗어 던지는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평안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외식이 이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추하게 보이십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당신도 변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의 가식과 위선이 부담스럽게 여겨집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이제부터 진실이라는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외식의 탈, 위선의 옷, 가식의 투구를 벗어버리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외식과 위선과 가식을 벗어버리는 순간 잠시 동안은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배신의 아픔도 있을 수 있습니다. 버림받음의 쓰라린 고통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한 자기를 찾은 것입니다. 마음에는 진정한 평안이 찾아옵니다. 내 속에서는 나를 발견한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축복이 있습니다. 잠시 외식을 벗고 진실했기에 당신을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들은 당신의 진실 앞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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