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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시작 (막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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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은 이렇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선언 중의 하나가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어떤 사람의 도움이나 변호가 필요없는 선언입니다.
신약에서도 위대한 선언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바로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계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라는 무대에서 쓰임받는 일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 처음 기록된 서신으로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Good News'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기쁨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올해는 무엇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까? 바로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되셔서 나를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만을 섬기는 'Good News'가 널리 전파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는 굉장히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이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네로는 자신의 이복형제들과 심지어는 부모까지도 의심하여 죽인 경계선 인격장애자였습니다. 이러한 네로가 로마 시민의 생명을 주장하는 생사 역할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아이러니 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그가 이동할 때마다 늘 옆에 철가방을 들고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을 명령할 수 있는 비밀 장치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몇 번씩 반복해서 '정말 사용할 것인가?'를 되묻겠지요.
마치 컴퓨터에서 자신의 신용카드에 접속을 하고 나서 결재를 하려고 하면 몇 번씩 되 물어보는 것과 같은 보안장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네로에겐 그러한 보안장치가 없었습니다. 그저 움직이는 '핵폭탄'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궁에서 로마 시내를 바라보면서 시상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시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로마가 불바다가 된다면 시상이 떠오를텐데...' 결국 그는 로마 시내에 불을 붙이도록 군대에 명령 합니다. 방화였습니다.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이 집에서 뛰어나오기 시작하고 점점 불길이 커지면서 로마 시내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 장면을 왕궁의 높은 난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던 네로는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 시상이 떠오를 것 같다'

그런데 보고가 들어옵니다. 로마 시민들이 분노하여 왕궁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급해진 네로는 누군가에게 방화에 대한 죄를 뒤짐어 씌울 희생양이 필요하게 되었고 결국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로마에 불을 지른 자들은 네로가 아니라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이다' 분노의 시민들과 군사들은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사자의 밥이 되게 하였고, 박해를 피한 크리스챤들은 지하 동굴 '카타콤'으로 들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부는 해외로 박해를 피해 떠나 갔습니다. 주후 약 6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이 핍박의 상황 속에서 성도들의 손에 손에 들려졌던 작은 소책자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이었다고 신학자 '존 델몬'은 그의 저서 '마가복음'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빌어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도시로 들어와야 하는데 세례 요한은 오히려 도시에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아와 말씀을 듣고 회개한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성도들은 물론이거니와 목회자들에게도 큰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새롭게 개척을 해야하는 이들에겐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몫이 좋은 곳을 찾아 다닙니다. 마치 무슨 가게라도 오픈하려고 하는 사람들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사역지는 도시 예루살렘의 중심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광야에 나아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을 쫓아다녀서는 안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계신 이 자리는 19년 전만 해도 저보고 정신 나간 전도사라고 할 정도로 몫이 좋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개척을 하면서 이런 곳에 자리잡았느냐고 만나는 선배마다 교회를 옮기라는 것이 인사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한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한끼 먹는 식당도 장소보다는 맛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시내 번화한 곳에 평당 수백만원씩 들여 인테리어를 잘한 식당들이 왜 텅텅 비어있습니까? 시설이 나쁘거나 위치가 나빠서 그렇습니까? 아니잖아요.
식당의 생명은 맛입니다. 맛이 있으면 시골 농가를 개조해서 만들었어도 자가용 타고 자기 돈 들여가며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하물며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만나를 주는 곳이 왜 사람을 찾아다녀야 됩니까? 올해는 A 아파트 입구에서 해보다가 안되면 내년에는 B 아파트 입구에서, 그 다음에는 C 아파트 입구......이렇게 사람을 찾아다닌 교회치고 제대로 된 교회가 없어요.

저는 오늘 이 세례 요한을 보면서 사람들이 유다에서 예루살렘에서 광야로 찾아나오는 이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바로 '복음'이라는 거예요. 오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외로운 일이지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이 재미있고 살맛 나는 것인데 그는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외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린양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사함을 위해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지시고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장차 거할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신 이 주님의 생애와 주님의 사역을 소개하는 일이예요. 성경은 그 세례 요한의 역할을 신랑을 위해서 기뻐하고 수고하는 들러리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좋은가요? 들러리가 좋은가요? 결혼식 당일, 신혼여행 당일까지는 들러리가 설치지만 정작 기쁨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스스로 들러리의 기쁨을 자초하고 만족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어요.

사실 이 당시에 세례 요한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수없이 많은 제자를 거느렸어요.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12제자 대부분이 세례 요한의 제자였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 제자들조차 주님에게 다 보냈어요. '나는 아니라. 나는 신랑을 소개하는 들러리일 뿐이다. 이제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라' 자기 제자들조차 다 주님께로 보냈어요.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 있었지만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저기서 나타나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는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신의 영광을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사울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 몸이 달아 있을 때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제사장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아 조바심을 내다가 결국은 왕인 내가 제사를 드려서 집행했는데 사무엘이 와서 보니까 이미 제사는 끝났어요. '왕이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제사장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서 내가 제사를 대신 했습니다. 나도 기름 부은 왕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장로님들도 안수를 받으셨어요. 어느 개척 교회 전도사님이 장로님을 세웠는데 장로님은 안수 받은 후에 세워도 늦지 않는다고 권면했는 데도 고집을 피우고 장로님을 세웠어요. 그런데 그 장로님이 훌륭한 분이면 괜찮은데 안수를 딱 받더니 어느날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안수를 받지 못한 전도사님이니까 설교 마치고 축도는 안수 받은 내가 합니다' 정신이 핑 돌지요.

지금 사울이 그런 꼴입니다. '나도 안수 받았는데 내가 제사해도..' 그리고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을 자기가 해버린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 왕 세운 것을 후회하노라' 하나님이 후회하면 그 인생은 끝난 거예요. 하나님이 포기하셨으면 그 인생은 끝난 거예요. 사울은 그 이후에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었어요. 겸손하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우리가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아무 것도 아닌 예수를 자기가 소개하고 '나는 그 분에게 있어서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합니다'라고 말한 다는 것이 여러분 가능하겠습니까? 겸손의 자리에 있는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 요한은 바로 그 자리, 자기의 자리를 알았어요. 설 자리도 알았고, 사명의 자리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삽니까? 사업도 하시고, 공부도 해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만 우리의 삶의 근본적 이유는 바로 사명 때문인 줄 믿습니다.
한번 더 인사하십시다. '집사님,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읍시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사명에 사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주의 복음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고 '벙어리'로 사신 분들이 계실 거예요. 전도 한번 못해보고, 열매 하나 거두지 못하고 벙어리로 산 아쉬움이 있다면, 이제 새해에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으로서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듯이, 입을 열어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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