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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막 0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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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라는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사람을 낚는다고 하면 고기를 잡는 어부를 생각해서 '사람을 낚나?' 이렇게 언짢아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을 건지는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오늘 말씀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에 자신의 구약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 마치고 마무리하는 그를 주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세워 주심으로서 그는 훌륭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증거하신 일은 다름아닌 복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병을 고치기도 하셨고,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도 하셨지만 주님의 사역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지만 그 모든 사역의 중심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변적인 것들이 많지만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준비와 과정과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우리가 많은 친교도 나누지만,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교가 목적이 아니고, 구제가 목적이 아니고, 봉사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중심 사역으로 삼으셨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우리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복음이 무엇일까? 말씀을 계속해서 15절에 보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왔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왔다' 여기서 때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간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실 계획,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는데 성경적인 시간의 개념은 대부분이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이 부르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의 시간이 아니예요. 그래서 종종 이 시간적인 개념에 우리가 혼돈을 하거나 마찰할 때가 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금 부르십니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아직 저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주 중요한 개념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나는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아니라고 할 때의 그 개념은 시간적인 개념이예요.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때는 '카이로스'입니다.

당신이 정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시간, 그곳에는 우리의 시간적 개념으로 그것을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부르실 때에 우리의 자세는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시간적 개념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려고 하면 '아직 저는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되어 있습니다. 아직 저는 지식적으로 준비가 안되어 있습니다. 아직 저는 시간적으로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교회 온 지 몇 년 안되었는데요. 아직 저는 집도 없는데요. 아직 저는 이러한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데요'라고 변명하기 일쑤입니다.

심방을 가려고 그래도 아직 '심방할 그런 분위기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우리는 세를 살기 때문이예요' 그런 생각들은 모두가 자기의 비관적인 개념에 의해서 말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란 그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분에서 '때가 찼고'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볼 때에 역사적인 배경에 의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가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개념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까워왔다' 사실 복음이라고 하는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다스리던 그 당시에는 황제가 전령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면 그것을 스페인이든 팔레스타인이든 헬라든 전령들이 그곳으로 달려가서 '황제가 주는 메시지를 받아라' 그러면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기다립니다.
'이번에 어떤 메시지를 황제가 우리에게 줄 것인가?' 그래서 그 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흥분하고 기대감에 차있습니다. 그 황제가 주는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대부분 황제가 주는 복음은 시작은 좋게 시작하고,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그 내용의 결론은 언제나 실망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대부분은 세금에 관한 것들입니다.
'지난해 까지는 세금을 얼마를 거두었는데 올해부터는 세금을 얼마씩을 올려야 되겠다'는 내용이라든지, 혹은 '어느 지역에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너희들 지역에서 장정들을 얼마를 뽑아서 보내라'든지 징병이나 세금에 관한 내용들이어서 듣기 좋은 말로 시작했지만 황제가 보내는 복음의 대부분은 실망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복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복음, 언제나 복음 시작은 좋은 말로 시작해서 결론은 부담스러운 것으로 끝나는 황제의 복음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가이사의 복음, 가이사의 나라가 차별이 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가이사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복음을 전파하시면 '복음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을 읽을 수 있지만 복음을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왜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도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가 '죄와 벌'을 고전이라고 읽듯이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위대한 고전이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읽는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아요. 그저 훌륭한 책으로, 고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일에는 반드시 전제가 따라갑니다. 주님의 말씀에 보면 복음을 믿으라고 하기 전에 우리에게 주시는 전제가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복음을 들을 수는 있지만 믿을 수는 없어요. 이 자리에도 100%가 복음을 믿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주의 종을 통해서 듣지만 회개하지 아니하면 듣는 것으로 머물고 마는 것이지요.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익숙해 있는 교통 신호로 본다면 유턴 표시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각, 내 방법으로 옳다고 여기고 살아왔던 그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서는 행위를 말하는 거예요.
회개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행동이예요. 이제는 내가 주님과 살겠다고 하는 분명한 삶의 태도의 결단입니다. 이 회개가 없으면 복음을 믿을 수가 없어요.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만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심령 속에 회개의 결단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복음을 듣는 자로 소위 군중으로 머물고 마는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오늘 이 시간에 이 복음을 듣는 여러분들 마음 속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서 이제는 내가 아닌 주님, 주님과 함께 더불어서 살겠다고 하는 회개의 결단과 그 회개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복음을 믿는 결단이 이 자리에 모든 성도들에게 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을 전파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는 어부들을 만나셨습니다. 16절에 보면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잡은 후에 그물을 깁고, 그리고 또 고기를 잡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를 따라 오너라' 여러분, 대단히 충격적인 그런 말씀이지요. 사실 알고 보면 시몬과 안드레는 주님이 초면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미 그들은 오래 전에 주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을 만났지만 그들은 큰 병화가 없었습니다. 생활이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의 개념으로 보면 그들은 주님을 만났지만 그때에 거듭나지 않았어요. 그냥 주님을 만난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그들의 일터에서 다시 만나셨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거리에서 만나는 것과 집에서 만나는 것과 그 사람의 일터에서 만나는 것과 만남의 의미가 다르고 그 사람 자신도 태도가 달라집니다. 길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일터에서 만나면 훨씬 그 사람의 태도가 진지해요. 파티장에서 만나는 것보다 일터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그들의 일터인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나셨습니다. 한참 고기를 잡고 있었어요. 그런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하셨어요.

두 번째 사람 야고보와 요한도 19절에 보면 그들이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고기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똑같이 불렀지요. '나를 따라 오너라' 일터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우리 전도사님들에게 요즘은 심방을 여성들이 집에 있는 여성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화하면 통화하기가 어려워요. 이제는 집에 있는 전화로 전화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 요람에도 집 전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0번 걸면 한번 통화하기가 어려워요.

요즘에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폰입니다. 요즘은 명함에도 휴대폰 하나만 적어서 보내는 분들도 많아요. 어디든지 통화할 수 있어요.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통화할 수 있어요. 심방을 전화하면 '없어서 못갑니다' 그럼 제가 그럽니다. '전도사님, 이제는 집으로 가지 말고 일터로 가십시오. 일터로 찾아가세요. 삶의 현장으로 찾아가세요' 물론 일터가 바쁘고 분주해서 어떤 분들은 일터에 오는 것을 짜증 내는 분도 있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자리로 찾아간다고 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야고보와 요한을 그들이 분주하게 그물을 깁고, 분주하게 그물을 배에서 올리는 삶의 현장으로 가셨어요. 저 사람들이 지금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언제 끝날 것인가?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물을 건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물 다 건지고, 고기 다 솎아내고, 찢어진 그물 다 깁고, 그 다음에 한가하게 커피 마시고 있을 때, 그때 주님이 다가가신 것 아닙니다. 분주한 그 현장에서 그 시간에 주님께서 다가가신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고기 잡고 있으니까, 내가 지금 그물을 깁고 있고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합시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다가가야 합니다. 차떼고 포 떼고 언제 복음 전하시려고 그래요?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언해야 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신 줄 아십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면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그물도 중요하지 않고 배가 중요하지 않아요.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사물은 사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명이 있고, 사람은 생명을 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어부인 바로 그들, 생명을 가진 그들을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구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를 운영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 회사의 사물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회사들은 사원들을 많은 돈을 들여서 해외에 연수도 보내고, 많은 경험들을 해요. 당장 보면 회사에 크게 축이 나는 일이지만 회사의 미래를 보면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보적이고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것만 바라봅니다. 사람을 키우지 못해요.

최근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퇴를 앞두고 후임자를 구하는데 30대 중반과 후반의 두 목회자를 최종적으로 선발하고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번 목회자로 이러 이러한 분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랬습니다. 수만명이 모이는 강남의 큰 교회였는데 30대 중반의 목회자들을 두 사람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후에 소식이 들립니다.

'30대 후반의 한 목사님을 최종적으로 담임자로 선택을 했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신선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 큰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염려 섞인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앞으로 20년을 바라보고 그분을 선택했습니다' 그분이 20년이면 60이 가까워지는데 20년을 바라보고 그분을 택했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그전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공부를 돕고, 유학을 돕고, 많은 일들을 소리없이 도왔습니다. 사람을 키워놓은 거예요.

우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 있다면 사람을 키우지 않는 거예요. 은퇴하시는 목사님들이 은퇴하면서 빠이 빠이 하고 떠나갑니다. 그 다음 나머지 교회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새로운 담임자가 와서 교회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교회에 몇 년을 온통 홍역을 치루는 교회들이 한 둘이 아니예요. 그것은 전임자가 교회에 대해서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람을 키워놓지 않고 오직 자신만 생각하다가 그만 두는 경우에 생기는 거예요. 마음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아요. 적어도 4-5년 전에는 그 교회를 책임질 사람을 키우는 일에 좋은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물질을 투자하고, 정성을 다 쏟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하신 일은 다시 말하면 사람을 세워서 일꾼을 삼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벌써 주님은 당신 다음의 일을 염두에 두셨어요. 주님 승천하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남은 일, 내가 복음을 전파하고 남은 그 일 너희들이 계속해서, 언제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이미 주님은 시작하시면서 우리로 말하면 취임하시면서 은퇴할 준비를 하신 거예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투자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당신의 다음 사역을 준비시키셨다는 거예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일꾼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줄 믿습니다.

어제 시내산 선교회에서 소래산 등반이 있었습니다. 함께 동행을 했었는데 산에 가면 늘 느끼는 공통된 일이 있습니다. 10-15쯤 산에 올라가면 숨이 차 올라요. 숨이 차요. 옆에서 우리 권사님이 '목사님, 숨소리가 왜 그렇게 커집니까? 갈수록 커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땀이 막 나지요. 한라산을 올라갈 때나, 소래산을 올라갈 때나 언제나 똑같은 거예요. 그때 숨이 차 올라올 때 약수터가 나타나요. '여기가 좋사오니 운치도 있고, 약수도 있고, 거기서 노래 한 곡 부르고, 박수 한번 치다가 내려오면 제일 편해요. 한라산에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예요. 한 10-15분 올라가면 땀이 나고 숨이 턱에 차고... 근데 그 부분에는 계곡이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흘러요. '목사님, 여기서 도시락 먹고 여기서 좀 쉬다가 돌아갑시다'

베델성서대학 졸업여행을 제주도로 많이 갔는데 제주도 여행할 때마다 거의 후렴처럼 거의 반복되었어요. 그때 우리가 하는 말, '여기서 주저앉으면 한라산 못갑니다' 그리고 격려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다 힘들지만 다시 시작해 올라가는 거예요. 처음 그 고비만 넘기면 그 다음에는 숨도 차지 않고 그 다음에는 어렵지가 않아요. 언제나 산에 오를 때마다 느끼는 공통된 마음입니다. '아, 이것이 고비이구나.....'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고비가 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도 고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계속 순풍이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고비가 있는데 이것을 넘지 못하면 우리는 일꾼이 될 수 없어요.
고비는 어렵지만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 과정들이 자랑이 되고 기쁨이 돼요. 감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이 어부들을 3년 6개월 동안 훈련하셨습니다. 그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제는 고기만 잡는 어부가 아니라 생명을 건지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부들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입에서 이제는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기준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놀라운 고백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물론 아직 속으로는 덜 된 고백입니다. 왜?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다 달아났어요. 입은 변화되었는데 삶은 아직 덜 변화된 상태예요. 우리 성도들도 그런 분 많지요? 입은 변화가 되어져서 고백하고 말하는 것은 넉넉히 그리스도인다운데 생활은, 행동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베드로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그의 삶까지도 온전히 변화된 줄 믿습니다.

키워야 합니다. 일꾼을 만들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일꾼을 세우고 일꾼을 양육하는 교회입니다. 그를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양육하시는 그 주님의 수고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일꾼을 세우고 우리가 일꾼을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전파가 계속 된다고 하는 측면에서 제자들은 끊임없이 부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 덜 된 상태에서 주님 앞에 다 된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직분만 있다고 해서 온전해 진 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에 성전 건축을 앞두고 장로님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돈이 많은 부자였지만 평판은 좋지 않은 사업가였습니다. 이제 발인하는 장례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장로님의 동생 집사님이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내일 아침 형님 장례식때 많은 동료들과 성도들이 올텐데 그들 앞에서 '죽은 김장로는 성자였다'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곧 있을 성전 건축비 절반을 제가 내겠습니다'

목사님은 그러겠다고 그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에 수많은 친구들과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장례식 설교를 목사님이 시작합니다. '죽은 김장로는 사업을 한답시고 주일 범하기를 밥먹듯 했습니다. 죽은 김장로는 동료들에게 사기를 많이 쳤으며 교인들에게 본이 되지 못했고 담임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생 김집사님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하지만 담임목사님은 김집사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후에 계속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김집사에 비하면 돌아가신 김장로는 성자였습니다' 그 형제가 생활이 어떤가 하는 것을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실 장례식이 생기면 목사는 고민입니다. 충성하고 헌신하고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던 분들이라면 장례식이 뭐가 고민이 되겠습니까? 충성하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고 본이 될 것도 없는데 죽은 사람에게 좋은 얘기를 하려니까 얼마나 고민이 되는 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장례식 때 기도시키면 성도도 아닌데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엉터리 기도도 있어요. 이것은 절대로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천국에 못가는 건데 무슨 그런 엉터리 기도를 합니까?

그때는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면 남아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 이 가족, 이 분의 남아있는 가족들이 주님 잘 믿고, 주님의 나라에 가게 하옵소서. 거짓말하거나 없는 거 괜히 추킬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장례식은 고인의 예우를 하려 하다 보니까 참 고민이 되는 거예요. 없는 거짓말 할 수 도 없고, 없는 장점 찾아내자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지요. 그런 인생 되지 말고 여러분 돌아가시고 나서 칭찬할 것이 없어서 장례식 인도하시는 목사님 고민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하마슐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태어날 때 그대는 울었지만 사람들은 반가와서 웃었습니다. 당신이 죽을 때 바로 그대는 웃으면서 가고 주위에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당신이 돌아간 것 때문에 울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말 그 사람 가면 안되는데.. 정말 그 사람 더 살아야 되는데... 그 사람 꼭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래서 눈물 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안에서 훈련되지 않고 거듭나지 않고 성숙되지 않으면서 입만 살아서 그리스도인 같은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어부들을 부르셨어요. 제자들을 부르셨어요. 그리고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때때로 실망하시면서, 때때로 당황하시면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주님을 닮은 주님의 제자로 양육해 가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우리가 부족해도 낙심하지 않고 아직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주변이 성숙하지 않다고 돌 던지지 마시고 그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아 가면서 마침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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