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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한다고 말합시다 (막 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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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글을 쓴 '레나 마리아'를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두 팔이 없고 다리도 한쪽 다리마저 짧은 장애인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부모를 통하여 강한 의지와 믿음을 주셔서 장애인을 장애인처럼 키우지 않고 정상인처럼 키우게 하셨습니다. 그는 두 발을 가지고 운전도 하고, 요리도 하고, 피아노도 쳤습니다. 세계 장애인 수영 선수권 대회에 나가서는 금메달을 4번이나 땄습니다. 스톡홀름 음대를 나온 뒤에는 가스펠 싱어로 활동을 하는 그가 얼마전에는 우리 나라에도 다녀갔습니다.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장애가 믿음과 함께 오늘날의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제 부천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랑선교회' 이사장 이, 취임 예배가 있었습니다. 약 6,00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는 사랑선교회는 장애인들이 약 4,000여명, 정상인들이 2,000여명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 선교단체입니다. 몸이 불편한 지체 장애인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들, 말하거나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예배후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시각 장애인의 말하기를 '우리 시각 장애인은 참 행복한 편입니다. 저 청각 장애인들은 참 불쌍합니다. 그들은 듣지못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각 장애인들은 앞을 보지 못할 뿐이지 음악 감상도 하고 이웃과 대화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감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한번 옆 사람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뜬금없이 잘 모르는 분을 보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니까 쑥스럽지요. T.D 훈련을 받으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처음에는 좀 어색해요. 어색하다고 하는 말은 사실 거기에 오는 분들도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한 것은 우리가 사랑한다는 일에 서투르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고 하셨는데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 어색하고 서툴다는 것이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책이 없었어요. 그렇게 사는 것이 팔자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그 중풍병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들 중 네 사람이 자원하여 그를 예수님께 데려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 새' 이 네 사람은 강제로 떠밀려 온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자진하여 수고의 땀을 흘리기로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께 그 환자를 데리고 가려면 무거운 침상을 메고 가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들 역시 일상적인 삶에 바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사람의 자원의 손길은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까지 데려 갈 수 있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 어렵게 가버나움의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도착을 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2절을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방안과 뜰과 집 주변까지 모여 있어서 이제 더 이상은 안으로 들어 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가정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바로 1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사는 베드로의 장모 집을 방문해서 열병을 고쳐주셨고, 열병 고쳐주신 것을 계기로 각색 병든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까지 치유해 주셨는데 오늘 계신곳도 베드로 장모의 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베드로 장모의 집은 주님의 사역의 중심지가 된줄로 믿습니다. 물론 육신의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주님은 언제나 영적인 문제, 죄의 문제까지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실제로 오늘 이 중풍병자가 제일 먼저 기대했던 것은 육신의 문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첫 말씀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었습니다. 영적인 문제,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구경왔다가 마음에 시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가 누구이길래 감히 죄사함을 선언하는가?' 서기관은 지금 그 자리에 왜 있습니까? 억지로 끌려온 것은 아니겠지요. 본문에 '어떤 서기관들이..' 했으니까 여러명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치료하시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수용하는 마음, 은혜받으려는 자세가 아니라 비판하고 평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왔어요.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나? 여기 서기관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참람하도다. 저가 무엇이관대 죄를 사한다고 하는가?'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만나는 일에 여러 사람이 동원이 되었습니다. 자원해서 한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마을 사람들이 모였고 그 중에서 네 사람이 자원해서 한 사람을 주님에게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은혜 받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먼길을 침상을 메워가는 수고도 큰 일이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주님에게로 다가갈 수 없었어요. 네 사람이 침상을 내려놓고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우리 돌아갑시다. 이만큼 했으면 우리가 저 사람을 사랑하고 관심 갖고 있다는 증거는 충분히 되었을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가득 차 있는 저 집을 어찌 들어가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얘기했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저 사람을 우리가 주님에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좀 더 생각할 수 없을까요?' 네 사람이 고민하다가 결국은 '지붕을 뚫읍시다'라는 아주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물론 지붕을 뚫자고 했을 때에는 그들의 가옥 구조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옥 구조는 대부분 철근 슬라브가 되어서 그것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중동 지역의 가옥 구조는 대부분이 흙벽돌로 집을 지은 단층 구조입니다. 비가 자주 오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저 태양의 뜨거운 햇빛만 가려주면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중동지역을 여행해 보면 흑벽돌로 된 정방형의 집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붕을 뜯었다고 했으니까 다른 가정보다는 좀 견고하게 지붕을 만들어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든든한 지붕도 이 네 사람의 열정에는 이길 수가 없었어요. 결국 지붕을 뜯기 시작했고, 지붕을 뜯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마 이러한 염두도 두었을 것입니다. '혹 주인이 배상을 요구하면 물어줍시다'

사랑을 하려면 돈이 들어요. 어떤 남자가 자꾸 쳐다보니까 아가씨가 하는 말이 '왜 쳐다봐요?' 남자가 '좋아하니까 쳐다보지요?' 그러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좋아하지 마세요. 좋아하면 돈 들어요'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기 전에는 돈이 들어가는 것을 아까워하지만 사랑하게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식당에 가도 먹고 나서 각자 돈을 냅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저희 세대만 해도 '식사하러 갑시다'하면 응당 초대한 사람이 내는 줄 알고 있지요. 밥먹으러 가자 해놓고 각자 돈을 내자면 욕먹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돈을 써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 여러분 그 사람이 여러분의 이웃을 위해서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그런 단계로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서 여러분의 물질을 써도 아깝지 않은 마음, 이 네 사람은 그런 마음까지 가졌을 거예요. 지붕을 뜯자고 했을 때에는 '이 지붕의 주인이 배상을 요구하면 물어줍시다' 그런 마음까지 가졌을 것입니다. 결국 그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네 사람의 열정과 희생이 주님을 만나게 해 준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5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의 마음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행동을 보시고' 맞습니까? 정확하게 다시 여러분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보셨어요? 믿음을 보셨어요. 여러분,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표현은 틀린 것이지요. '예수께서 저희의 행동을 보시고' 이렇게 해야 말이 되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예요. 추상적인 것이고 개념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추상적인 믿음, 그 개념적인 믿음이 행동이 뒷받침될 때 우리는 말합니다. '믿음이 있다. 믿음이 크다. 믿음이 건강하다. 믿음이 많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행동과 더불어서 동반적인 그런 개념으로 가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죽은 것이라' 이제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은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의 사랑의 실천이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에는 내게 가진 물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능까지도 당신을 위해서 기꺼이 쓸 수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인사합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 말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이제는 물질도 쓸 수 있고, 시간도 쓸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두 가지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는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사실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거예요. 사실은 중풍병자가 중풍병자에서 해방되어서 걸어가는 것, 이것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구하지 않은 것, 그러나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을 해결해 주신 줄 믿습니다. 영적인 치료,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신 주님, 그리고 나서 두 번째 말씀합니다. 11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네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네가 환자 때에 너를 싣고 왔던 침상을 이제는 네 손으로 들고 가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길 원하는, 그리고 그 사랑을 이제는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셨어요. 감동 받았습니다. 배운 사람들도 도망가고, 훈련된 사람도 도망치는데 저 사람은 자기 돈으로 환자를 치료시키고 위험을 무릅쓰고 불편을 무릅쓰고 자기 나귀에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태워주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한걸음 더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행동하기를 원하셨어요. 믿음은 행동이 따라가야 돼요. 사랑도 행동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감동만 받고 돌아가면 소용이 없어요. 성도들이 말씀 듣고 은혜 받고 감동되어서 가슴이 벌렁벌렁 하다가 돌아가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돌아가면 또 그만 인 것을...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움직여 보고 행동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전면허를 다 갖고 계시지요? 또 5년이나 10년 되면 그 면허증을 갱신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운전면허증을 새로 주거나 갱신할 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어요. 어떤 것을 물어 볼 것 같습니까? '안전운전 하십시오. 과속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물어 볼 것 같지요. 그런데 이런 것을 물어본다고 그럽니다. '각막 기증하시겠습니까? 장기 기증하시겠습니까?' 운전면허를 주면서 그것을 물어본대요. 그 자리에서 '각막 기증하겠습니다'하면 기증서를 쓰고 스티커를 받아서 면허증에 각막 기증 스티커를 붙이거나 장기기증 스티커를 붙여요. 여러분 집에 돌아가셔서 여러분 면허증에 각막 기증이나 장기 기증 스티커가 없는 분들은 좀 부끄러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티커를 붙일 수 있기 바래요.

작년에 우리는 장기 기증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교인의 거의 절반이 기증의 약속을 했고, 아마 그분들은 자신들의 면허증이나 주민등록증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실 것입니다. 그 헌신예배가 지나갔다고 해서 기회가 없어진 것은 아니예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은 실천이거든요. 사실 스티커 붙인 것은 실천의 10% 정도만 실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이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여러분들의 시신이나 각막이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여러분의 가족들이거든요. 여러분 스티커를 붙였다고 해도 10%정도 밖에 안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여러분의 가족들이 동의하시고 실천해 주셔야 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한국인들은 유교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이 시신이나 어떤 우리 장기를 기증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갖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제가 몇 년전부터 '우리가 화장 문화를 정착시킵시다. 자녀들에게 유산 물려주지 않기를 우리가 정착시킵시다' 오래 전부터 말씀을 드렸는데 작년에 장기 기증 헌신예배를 드릴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절반 이상이 기증하시는 것을 보면 저 분들의 마음이 많이 오픈 되었다고 하는 확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결정하지 못한 분들도 앞으로도 계속 결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사를 보면 은혜로운 찬송가들은 대개 어렵고 힘들 때 작사되거나 작곡된 것입니다. 좋은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고통과 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 더 많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을 때, 그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헌신의 결단을 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만난 중풍병자가 육신의 치료뿐만 아니라 심령의 치료, 죄사함의 은혜까지 입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을 바라보고 그 사랑의 대상의 범위를 넓혀가면서 그들의 육신의 피로만 채워갈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의 죄사함의 문제를 해결시켜 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주님을 만나게 하는 일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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