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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나의 형제인가? (막 0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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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잘못된 정보에 의해 서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도 서로 간의 오해 때문에 힘들어 할 때가 많지요. 부부간에도 오해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상처를 받는 예가 드물지 않습니다.

서기관들이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입니다. 바알세불이 무엇입니까? 바알세불은 고대 수리아 사람들이 믿던 신의 이름인데 유대 사람들은 바알세불을 귀신의 상징적인 의미로 여기고 있었서 '저 사람은 바알세불에 지폈다'라고 말하는 것은 , 우리 말로 하면 '아무개 이단에 빠졌어'라는 의미 처럼 여겨지는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상한 심령을 취료하시며,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을 때, 서기관들은 그 중요한 사역을 귀신 들린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지도자 계층이었던 서기관들의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크게 오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는 바알세불,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이 어찌 사단을 내어쫓을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해 때문이나 잘못된 정보가 주는 역기능 때문에 성도들이 상처를 받거나 두려워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진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옆구리에 창이 찔리면서 물과 피를 쏟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무덤에 장사한 뒤 다락방에 모여 두려움 중에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그 소식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이상한 정보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시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에게 돈을 주고 헛소문을 퍼뜨리도록 사주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밤중에 훔쳐갔다'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어찌 다시 살 수 있겠어?'

엠마오에 고향을 둔 제자들 두사람이 근심이 가득한 가운데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했지만 주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느냐?'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마을에 다가올 때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을이 가가워오자 더 가시려는 주님을 자기 집에 유하기를 강권했고, 저녁을 대접하자 주님은 떡을 들고 축사하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동행했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서로 길을 걸으며 느꼈던 은혜들을 나눕니다. '아까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실 때에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성도 여러분, 은혜는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내용을 쭉 보니까 한 10년 전쯤에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셔서 제가 병이 나았는데 내가 입다물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받은 은혜는 감사함으로 함께 나누어야 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목사님께 이 편지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하라고 그래요?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라고 그러지요? 혼자 고민하며 근심하지 말고 어려움을 나누는 것이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치료의 은혜를 입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성도들과 은혜를 나누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제자가 아까 서로 간에 느꼈던 은혜를 이제야 나눕니다. '아까 말씀하실 때 내 마음이 뜨거웠었는데 당신도 그랬소?' '나도 그랬는데......' 잘못된 정보를 지녔을 때 그들은 두려워했고 근심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명의 자리를 떠나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 바른 말씀, 은혜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은 사라진 줄 믿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 밤에 사명의 자리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간 줄 믿습니다. 사명이 회복되어진 것이지요.

성도들과 신앙생활 하다 보면 잘못된 정보 때문에 서로 오해하고 그리고 오해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얼굴에 기쁨이 없지요. 얼굴을 마주치면 얼굴이 벌써 얼어있어요.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오해가 생기면 금방 알아요. 우리 부부도 우리 집사람이 무슨 오해가 있으면 제가 얼굴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벌써 결혼 20주년이 넘었잖아요.
얼굴에 써있어요. '나는 꽁해 있다. !' 목소리가 달라지고 벌써 얼굴의 색깔이 달라요. 그거 모르면 남편도 아니겠지요. '무슨 오해한 거 있어? 무슨 속상한 일 있어요?' 그럼 금방 얘기가 되면 '이건 이랬는데..' '아, 그랬어요' 대화를 통해서 풀어지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못된 것에 대해서 시정을 약속하면 또 풀어지는 거예요.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과 들어올 때 얼굴 모습, 나갈 때 얼굴 모습 자기의 그 얼굴은 원하지 않아도 얼굴은 자기 마음을 표현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오해하고 있어요. 나는 지금 뭔가 마음에 막힌 부분이 있어요' 얼굴에 다 쓰고 다녀요. '저 양반 저 오해를 풀어줘야 할텐데.. 저 양반 저 얼굴에 막힌 부분을 좀 풀어줘야 할텐데..' 그것이 목회자의 기도의 제목이고 또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잘못된 부분이라면 고치면 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거짓 정보, 오해된 부분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근심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갈등을 갖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족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총동원되어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 왔습니다. 왜 왔어요? 왜냐하면 '그가 미쳤다함이라' 얼마나 잘못된 정보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이제 우리는 예수를 붙잡아가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그런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신앙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하지만 엠마오의 두 제자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근심의 이유가 사라지고 오해의 이유가 사라지고 나서는 오히려 근심이 회복되고 기쁨이 다시 그들에게 찾아온 줄 믿습니다.

이사야 11장 3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난 예수 믿는 것이 좋아. 난 예수 믿는 것이 그냥 즐거워' 교회 오는 발걸음이 즐거움의 발걸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안오면 전도사님이 또 총알같이 전화하겠지?' 그래서 억지 발걸음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전화로 여러분들의 안부를 물묻거나 아니면 찾아가실 것입니다. 전화로 물어보는 것은 30점이지요. 찾아가서 만나면 70점입니다. 전화하고 만남이 이루어 진다면 100점이지요.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럽니다. '찾아오시면 부담이 됩니다' 그렇지요. 부담을 줘야지요. 복되고 귀한 일은 거룩한 부담감이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전도 못하시는 줄 아십니까?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서 그래요.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을까?'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의 역사를 이룰줄 믿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로 가라고 해서 갔는데 부담을 가졌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해서 빌립보 마게도니야 첫 성으로 나를 가게 하셨는데..'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 줄 믿습니다. 뭐라고 기도했는 줄 알아요? '하나님이여 이 빌립보 성에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루디아를 만난 줄 믿습니다. 그를 통해서 빌립보 전도의 문이 열려진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거룩한 부담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담감은 곧 책임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사님들이 되시고, 여러분들이 권사님, 장로님들이 되시고,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책임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거기에 따르는 부담감이 있지요. 부모가 된다고 하는 것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한 쌍의 새로운 부부가 탄생을 했어요. 한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결혼을 하는 일은 후회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결혼을 안하는 일은 더욱 후회스러운 일이다' 무슨 얘기예요?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혼이라고 하는 큰 축복을 주셨어요. 하지만 그저 결혼은 서로 희희낙락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로서 이제는 독립된 경제적, 정신적, 신앙적인 독립된 사람들로서의 부담감을 갖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전엔 없으면 부모님들에게 손내밀면 되었지만 이제는 결혼한 사람들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독립을 하는 것이고 부담감을 갖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낳고 부모가 되고 나면 더 부담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부담은 우리에게 우리를 성장하고 새롭게 하고 어른스럽게 말하는 성숙함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줄로 믿습니다.

'D.M 무디'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많은 부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셨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부르셨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주님께서 생활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새로워지는 훈련의 공동체를 이루어주셨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신 줄 믿습니다. 무엇입니까? 전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마을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줄 믿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냥 보내시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아가서 귀신 들린 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귀신들이 물러가는 역사가 나타난 줄 믿습니다. 예수께 다가오는 수많은 환자들, 수많은 심령에 고통받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죄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셨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부분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니까 귀신의 왕인가 보다.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저렇게 하는가 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들은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무지에서 오는 오해가 바로 여기에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면회를 신청한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람들을 시켜서 예수님을 밖에서 좀 보자고 한 거예요. 밖으로 나오면 예수님을 붙잡고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냐?' 주님께서 형제에 대해서 부모에 대해서 무관심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형제에 대해서, 더구나 부모에 대해서 강조한 분은 없습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형제들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어느 사람이 신장병으로 이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그전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마르고 닳도록 수많은 형제 친구들이 찾아오다가 신장 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나서는 발걸음이 딱 끊어졌어요. 친구도 발걸음을 끊고 심지어는 집안들도 발걸음을 끊었어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혈액검사 해보자고 할까봐.. 그래서 혹 그 형제와 그 친구와 자신의 모든 조직이 같다고 하면 그에게 신장 이식에 필요한 요구를 할까봐.. 무섭지요? 주님은 말씀합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이보다 큰 사랑은 없다'

더 나아가서 부모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어떤 것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땅에서 잘되는 일이다' 땅에서 장수하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중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께서 형제와 자매들이, 그리고 부모가 찾아왔을 때 하신 이 말씀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주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귀신에 들렸다고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주님을 붙잡으러 온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사모합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나요?' '이거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봐'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또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하려고 하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주 간략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해놓았습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말씀하신줄 믿습니다. 어떻게? 항상입니다. Always, 잘 나갈 때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큰 걸림돌은 우리의 신앙에 굴곡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우리 1,000명이 넘는 평안의 성도들의 일기예보가 다 각각이기 때문에 그것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아요. 성도 여러분, 항상인 줄 믿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기도 운동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기도합시다. 기도해야 합니다' 모두가 은혜를 받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우리는 기도하는 거야. 우리가 특별히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자' 그래서 그 성전 중심해서 그 숲으로 자기들의 기도의 자리를 정해놓았습니다. 모두가 기도의 숲으로 하루에 한 두 번씩 기도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기도생활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숲으로 가는 길에 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분주함으로 혹은 신앙적인 열정이 식음으로 기도가 소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분의 기도의 길엔 자연스럽게 잡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열심히 기도하는 다른 성도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성도님의 기도의 길에 잡초가 생겼어요' 그러면 '그래요? 내 길에 잡초가 생겼나요? 내가 기도를 열심히 못했는데 다시 열정을 회복하렵니다.' 하면서 열심히 그 길을 가면 기도의 길이 다시 밝아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권면해도 기도의 열정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의 길은 어떻게 됩니까? 잡초가 점점 많이 나기 시작하지요. 그럴 때 열심히 기도하는 다른 성도들이 그 성도의 기도의 길로 다니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연약한 성도의 길에 잡초가 많이 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지요.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의 영적 삶의 부족함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기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성도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호흡이지요. 지난주에 여러분들은 속회공과를 통해서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 들었을 거예요. 기도는 호흡인 줄 믿습니다. 심지어는 호흡은 잠을 자면서도 호흡하잖아요. 저 문래동 공장 지대에 가서도 여러분들은 코를 막을지언정 숨을 쉬지 않습니까? 설악산에 가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에어컨을 다 끄고 창문을 열고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하지 않아요? 심지어는 차에서 내려서 여러분 두 팔을 벌려서 심호흡하지 않습니까? '무공해 공기 좀 많이 마시고 가자'

제가 예언 하나 할까요? 앞으로 조금 있으면 저 설악산, 한라산의 맑은 공기 팩으로 담아 가지고 여러분 마시게 될 날이 올 줄로 생각합니다. 아멘 하는 분이 많지 않네요.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20년 전을 생각해 보세요. 제가 20년 전에 그런 뉴스를 듣고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한 중동의 산유국 부자들이 물을 유럽에서 수입해서 먹는다는 거예요. '정신 나간 사람들이구나. 어떻게 물을 수입해서 먹나?' 석유를 뿌릴지언정 물은 수입해서 먹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물이 펑펑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만 해도 물을 수입해서 사먹는다는 것이 개념에 들어와 있지 않아요. 20년 지났습니다. 여러분들 가정에도 생수가 있고, 정수기가 있고, 이 정수기는 대단히 비싼 물입니다. 여행을 다녀도 우리는 언제나 물을 사서 먹어요. 물 사서 먹는 사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제 우리 나라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번 어느 가정을 심방했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우리가 물이 떨어져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물이 없어서 아들보고 물 좀 사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싫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물을 못사먹고 집에 있는 음료수 가지고 저녁을 먹었다'고 그래요. 제가 그 집에 물어봤어요. '수도 안나오나요?' '나오지요' 수돗물은 펑펑 나오는데 그건 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먹지 못하면 음료수는 먹을지언정 수돗물은 안먹는다는 거예요. 이제 수돗물을 먹어야 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는데... 자, 거기에 관계되는 장관은 나는 수돗물 먹는다고 쇼 같은 장면을 보여주지만 아직 우리 시민들은 그렇게 신뢰를 보이지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것,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말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은 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인 줄 믿습니다. 기도는 능력을 우리에게 샘솟듯 만들어줍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늘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늘 감사하는 그 생활, 그러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가리워줄 수 있는 넉넉함이 있는 줄 믿습니다.


사랑은 덮어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 우리가 치유 사역이라고 말할 때 가장 좋은 치유 사역은 상한 심령을 감싸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셨고 성도로 인쳐 주셨어요. 그리고 주님은 당신께서 하셨던 그 일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셨고, 그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너희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 즉 가족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주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외형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감당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한 가족이 될 줄로 믿습니다. 평안의 성도들이 주님과 가족이 되는 이 기쁨,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행하면서 온전히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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