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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헬몬산의 감격 (막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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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매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산은 매력적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한반도 북쪽에 백두산이 천지의 웅장함으로, 남쪽에는 한라산이 백록담의 수줍음을 안고서 남북으로 지주처럼 버티고 서있서 마치 한반도를 지키고 있는 듯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중부지역에는 금강산과 설악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동해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누워있는듯 하여 수많은 산악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산이 여럿 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그리 높지않은 바위산인 시온산, 아합 왕과 이세벨이 믿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맞 대결을 해서 불로 응답 받은 곳으로 유명한 지중해 연안의 갈멜산, 그리고 오늘 본문에 소개된대로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올라가셨던 헬몬산은 높이 1,815m의 꽤 높은 산으로서 정상은 언제나 하얀 만년설로 유명합니다. 만년설에서 흘러 내려온 눈이 녹아 생긴 물이 요단강 발원지인 가이사라 빌립보 지역에서 솟아올라 요단강 수자원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셨던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셨던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때 비로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다'라는 대단히 어려운 제자의 길을 말씀하신 후, 제자 가운데 세 사람을 따로 구별하여 헬몬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곳에서 주님께서 변형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변화된 주님의 옷에서 얼마나 광채가 나는지 '사람이 손으로 빨래를 하여도 저렇게 희게 할 수는 없다'고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다시한번 인자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참으로 오래 전의 사람이었던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대화하는 장면은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구약성경만 해도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유독 엘리야와 모세를 소개한 이유가 무엇일까?

B.C 875년에 사역을 시작했던 (열왕기상 17장) 엘리야는 사실 모든 선지자 중에서 대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B.C 1527년에 태어났던 모세는 (출애굽기 2장)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인데, 엘리야가 선지자의 대표였다면,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좌우편에 서는 영광을 얻도록 그들을 세워주신 줄 믿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너무나 감격했고 또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러라'라고 6절에 말씀하는 것을 보면, 지금 베드로는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된 것으로 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그 당시로서 약 800년 전의 사람 엘리야를 보았고, 1500년 전의 사람 모세를 보았으니 말입니다.

주님과 더불어서 변화된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건의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기를 원합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라는 말에 감동을 받으셔서 '그래. 그렇게 하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리라 기대하고 드린 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종종 '주님을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감격해서 이 헬몬산을 내려가지 말고 여기에서 '주님을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천막을 짓고 살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 '위하여...'라는 말 속에는 언급한 사람들보다도 자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하는 욕심과 의지가 더 강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외명분은 '주님을 위하여...' 이지만, 내심으로는 '나를 위하여...'가 아니가 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건의를 무시하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말했지만 주님은 그 말에 이끌리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관심의 첫 부분은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는 2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곳에 따로 세움을 받았던 3인을 생각하면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선택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의 삶의 가장 큰 은혜와 축복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의 전승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해의 첫 번째 농사인 밀과 보리를 추수했을 때 처음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에서 출발합니다. 맥추절기는 한 여름, 정말 먹을 양식이 없어서 무척 힘들어 할 시기, 즉 보리고개를 넘기면서 처음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감격적인 시기입니다. 보릿고개를 잘 넘기지 못해 굶어죽는 이들이 많았던 우리로서는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배고픔 가운데 지었던 농사가 열매를 맺어 추수를 하였다면, 밀과 보리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지금 북한에서는 평양 시민들과 정규 군인들을 빼놓고는 정상적인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몇해전부터 함경도 지역의 주민들은 감자 몇 알이 하루 양식의 전부라고 합니다. 지난 주 우리 지방의 수양회가 금강산에서 개최되어 저희 부부와 전도사님 부부가 다녀오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한 주민들이 배급이 적어 굶어죽는데 , 한 아버지가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배급된 것을 아들에게 몰아주어 결국 아버지가 굶어죽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북한의 현실입니다.

여름의 길목에서 맞이하는 맥추감사주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한 줌의 곡식이 아까운 그 시기에 그러나 여름 농사의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면, 그 감사는 결코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감사의 표시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지난 전반기 동안 여러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우리 한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지난 6월달에 전반기를 결산하는 아름다운 기쁨과 감격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월드컵 4강의 감격이라고 하는 세계사의 정말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공 하나를 통해서 민족이 단결할 수 있다고 하는 기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붉은 악마' 이름이 좀 우리에게 정서가 안맞는다고 해서 이름을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국민들은 그런 정서와는 관계없이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800만명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들은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 골을 넣은 선수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친 감독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행정적으로, 그 뒤에서 응원을 하면서 수고했던 수많은 사람들, 곧 대한민국 전체가 승리자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새로운 감격이 생기고 정신적으로도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기쁨이 생겨서 우울증 환자들이 많이 치료가 되었다고 그러지요. 그래서 병원에는 이 소화불량, 우울증, 신경증, 이런 환자들이 줄어들고 오히려 너무 소리를 질러서 이비인후과 환자들, 성대가 손상이 되어서 환자들이 늘었다는 그런 재미있는 통계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에서 오는데 우리가 '한번이라도 이겨보았으면..'하는 그런 열망이 4강이라고 하는 엄청난 변화를 맛보면서 이 나라가 충격 속에 기쁨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기쁨이 얼마나 갈 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국내 프로축구인 K리그가 개막 되는데 월드컵의 열기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기독교가 주는 매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요한복음 2장 10절에서 말씀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당신은 다릅니다. 당신은 달랐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매력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나중이 점점 더 좋아지는, 나중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그러한 가나의 변화가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워지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다고 하는 것, 이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매력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함께 하셨다는 사실, 어디로 가셨습니까? 산을 가셨습니다. 등산을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등산을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남들보다 등산의 실력이 뛰어나서 그들을 데리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산은 가셨으되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 기도하러 가신 것이지요.

성도의 삶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기도생활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생활이 막히거나 기도생활이 중단되거나 기도생활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생활 가운데에서 기도생활이 계속되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지금 신앙생활은 하고 있으되 습관적이고, 그리고 여러분의 경험에 의해서 기차 바퀴가 관성에 의해서 돌아가듯 그렇게 하고 계신 것일 것입니다. 능력 없고, 생기 없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그런 삶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산으로 데려가신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기도의 동역자로서 인정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누구와 함께 갈까? 누구와 함께 기도하러 산에 갈까?' 주님께서 고민하실 때 이 사람들이 선택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 인간적인 잘남이 아니라 이것은 기도의 동역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기도하러 간다고 하는 것,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고 하는 것,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기도의 사역을 위해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말은 곧 기도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생활을 한다고 하는 말은 곧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말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비소니치의 하루'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 이반이 형무소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는 자주 벽에 기대서 기도하였는데, 하루는 옆에 있던 동료 죄수가 이반이 기도하는 줄 알고 비아냥거립니다. '이봐. 네가 여기서 기도한다고 해서 더 빨리 나갈 줄 알아?....' 그때 이반이 자신을 조롱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이유는 여기서 빨리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형무소 안에서도 나와 함께 하셔서 이 모진 생활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거야.....'

여러분이 기도하시지만 종종 우리의 기도가 잘못된 기도일 때가 많습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상당히 낮은 단계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여, 제게 주신 이 고난의 시간들을 견디게 하옵소서. 이 고난을 극복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성도로서 바른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곧 그분과 기도의 삶을 나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기쁨은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삶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엉뚱한 소리도 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주님께서 개의치 않으셨어요. 우리가 실수할 있고, 우리가 부족함을 보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삶의 주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게서 느껴지는 영적인 분위기의 주류가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그 이미지가 너무나도 세속적이다. 이 사람은 분위기가 너무나도 물질적이야. 이 사람은 분위기가 너무나도 육체적이야'라고 느껴진다면 곤란하겠지요. 우리에게 나타나는 전체적인 분위기의 흐름이 영적인 것이고 기도의 분위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집사님을 얼굴을 보니까 참 분위기가 기도하는 집사님 같네요' 그런 분위기가 우리의 이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위기라고 해서 실수하지 않는 분은 없어요. 말도 실수할 수 있을 것이고, 행동도 실수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서 풍겨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의 분위기, 기도하는 사람의 분위기가 풍겨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제일 감사하게 느낄 때가 있어요. 언제냐 하면 우리 교인들이 아니라 다른 분들이 '목사님을 보면 목사 같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제일 행복해요. '나를 목사 냄새가 나는 목사 분위기가 좀 나는 그런 목사로 알고 있구나' 얼마나 행복한 지 모릅니다. 성도가 성도의 분위기가 나야 되지 않겠어요?

지난 주간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동행한 북측의 관리원들이 저를보고 '뭐하는 사람입니까?' 묻길래 ' 목사입니다'했더니 '아, 목사입니까?' 하면서 종교에 대하여 사뭇 깊이있는 대화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옛날 같으면 '목사가 뭡니까?'하면서 배타적으로 나왔을 텐데 금강산 관광 사업이 3년이 넘어가면서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북한에 교회가 있나요?' 물론 평양에 봉수와 칠곡교회가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나라에서 가서 지어준 것입니다. '우리도 있지요' '어디에 있나요?' '평양에 가면 봉수교회도 있고 칠곡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자존심을 위해서 그거 우리가 지어준 교회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동네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아마 한 둘씩은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왜 한 둘씩 밖에 없나요?' '그거 아마 예수 믿는 사람들 그전에는 많았을텐데 요즘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요?' '아마 믿어봐도 별 것이 아니라서 그러겠지요'

제가 핵심적인 질문을 했어요. '북한 사람들은 마음의 기둥을 누구로 삼고 있습니까?'했더니 '물론 수령님이지요' 하기에 김일성 주석이 죽기 직전의 일화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마음의 기둥으로 수령임을 삼는 것은 좋지만 수령님도 얼마 있으면 돌아가시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북한 안내원이 '수령님이 죽다니요?' 하면서 화를 냈다는데 얼마 후에 수령님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마음의 기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물질이 기둥이 되어 있는 분들 '이것만 붙잡고 있으면 내 인생은 행복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 그 물질의 기둥도 무너질 때가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기둥은 남편이야. 내 기둥은 자식이야'라고 했던 분들도 남편도 무너지고, 자식도 무너질 때가 있어요. 북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령님이 죽는 것 처럼 세상적인 기둥은 무너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기둥은 '당신들은 어떤 기둥이 있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이지요'

과거와 달리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가 좋아진 김에 '한국에 오고 싶지요?' 했더니 '거, 말하면 뭐합니까?' 하면서 속내를 감추지 않는 관리원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이 '당신도 또 하나의 잠재적인 탈북자구나' 사실상 북한 주민 대부분이 잠재적 탈북자일 것입니다. 탈북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요.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7절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삶을 응답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하면 늘 우리는 내 삶 속에서 나의 생각, 나의 음성, 내가 원하는 나의 욕심을 따라서 우리는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늘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과 육신의 법을 따르고 싶어서 내 마음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싸움이 일어난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우리 나라에 단 하나 남아있는 세계 타이틀 챔피언이 우리가 결국은 패배를 해서 이제 우리 나라는 복싱 챔피언 타이틀은 하나도 없는 그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 그 하나님의 음성이 내 중심에 있을 때 그 중심 속에는 언제나 그분의 뜻이 있어서 내가 길을 가도, 내가 중요한 결단을 해도 그 결단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 모든 결정 속에는 나의 욕심과 나의 정욕이 나를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바울은 그것을 고민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산다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고 하면 우리는 결단코 우리의 최종적 결론을 육신의 정욕으로 내리지 않을 줄 믿습니다.

8절에 봅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더라' 제자들로서는 자기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들은 헬몬 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화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인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체험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참으로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더라' 진정으로 영적으로 체험을 한 사람의 삶의 태도는 오직 예수인 줄 믿습니다. 체험은 수단이예요. 체험을 통해서 예수를 붙잡는 삶이 되어야지 체험만 따라가는 삶이 되면 안된다는 거예요. 어느 기도원, 어느 기도원... 하면서 체험, 체험 체험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안타까운 사람들이지요. 체험은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붙잡는 계가 되는 것이지 체험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예요. 지금 제자들은 황홀한 체험을 했지만 주님은 그 체험 속에서 결론을 내려줍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들 앞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의 바른 신앙은 체험을 통하여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알고, 예수를 붙잡는 데까지 이르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전반기 동안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의 모든 6개월 동안의 생활 속에 다사다난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 속에서 결론은, 고난 가운데에서의 결론은 광야의 생활을 한 사람들의 결론조차도 오직 하나님, 그 여호와께 감사하라' 우리의 삶의 풍성함 속에서도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시고 헬몬산의 감격을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과 새로운 동행의 삶을 가게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가 오늘 우리를 제자를 삼으시고 우리를 불러 주셔서 여기에까지 이르게 하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후반기의 삶도 새로운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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