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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막 09: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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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은 이미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고전과 같이 읽혀지고 있는 책인데 그가 또 하나의 아주 흥미있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된 제목이 '돈, 섹스, 권력'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주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아주 예민한 것들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선배나 스승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의를 받고 교훈을 받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자 조심해야 된다...' '물질을 멀리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유독 목회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에게도 다 같이 적용이 문제들입니다. 작년도에 이혼을 요청한 가정중에서 가장 큰 사유는 '배우자의 부정'이라는 통계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전 에이즈에 걸린 한 직업 여성이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에 대한 분풀이로 수많은 남자들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가진 것이 밝혀졌는데, 그가 활동했다는 00 지역에서는 그 뉴스가 나가자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지역 보건소에서 에이즈 감염 확인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는 여전히 음란과 정욕의 삶속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자 문제, 혹은 남자 문제를 넓은 의미에서 성 문제로 부르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상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어서 60-70이 넘은 분들에게서도 종종 생기는 전천후 가정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처가들이 고백하기를 '나는 우리 아내만 쳐다보고 산다...' 그러면 아내들이 화답합니다. '나는 당신만 바라보고 살거다...'

또 한가지 권력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일상에서 밀접한 부분입니다. 정치인들만 권력에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시민들도 일상생활에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부싸움도 알고 보면 주도권 다툼, 일종의 권력의 갈등 때문에 비롯되는 예가 많습니다. 사회학자들의 평가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남편은 스포츠 중계를 보기를 원하는데 반해서 아내는 주말 연속극 보기를 원하지요. 남편이 보고 있는 채널을 아내가 허락없이 돌렸을 경우, 혹은 아내가 보고 있는 연속극을 중요한 경기라며 남편이 일방적으로 채널을 바꿨을 때 심각한 분쟁이 생기겠지요. 결국 이것은 주도권의 싸움 즉, 권력투쟁이라는 얘기지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는 늘상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교회 직분의 꽃이라는 장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열심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돈을 쓰거나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왜그럴까요? 장로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가끔씩 장로 후보로 추천되었다가 2/3 표를 못얻어 망신(?)을 당한 사람이라면 더욱 이 부분에서 열을 올린 것입니다. 이런 일로 시험에 들거나 아예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규모가 큰 곳은 아무리 훌륭하고 인격적인 분이라고 할지라도 왠만해선 당회원의 1/3 표도 얻기 어렵다는 것이 그들의 하소연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그래서 자연히 성가대나 교회학교 같은 보여지는 봉사의 자리를 선호하게되고, 장로 후보로 추천되었을 때 당연히 그분은 성도들의 인정을 받아 압도적 표로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임원들을 대상으로 '사명자 세미나'를 하고 나서 자기가 원하는 위원회에 지원하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위원회는 초과현상이, 교회 밖에서 활동하는 위원회는 자원자가 별로 없었다는 보고를 받고 무척 실망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교회 밖의 봉사의 자리라면 주차안내와 같은 일 일텐데, 그분들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나 뙤약볕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고 고단한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재무부장이라고 하면 교회 권력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옛날 고부간에 관계에 있어서 누가 쌀 뒤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주도권이 확인되던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며느리가 저녁 밥이라도 할 요량이면 먼저 시어머니에게 가서 아주 겸손한 자세로 쌀을 내달라고 하면, 시머머니는 뒤주를 열어주면서 쌀을 퍼가도록 허락하는 구조 말입니다. 살림은 며느리가 하는데 살림의 내용은 시어머니가 주장하는 아주 불편한 구조이지요.

성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교회 재정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양 생각하고, 각 부서에서 내민 청구서들을 보고 맘에 드는 사람의 부서는 더해주고, 밉게 보인 부서의 요청은 깍으면서 권세를 부리듯 하는 왜곡된 재무부 관행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 있음을 알고 우리는 슬퍼합니다. 열쇠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곧 그 집안의 권력 중심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며느리는 생각합니다. '언제 내가 저 열쇠를 가질 수 있을까?' 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겠지요. 재무부장이 마치 뒤주의 열쇠라도 가진 시어머니처럼 그렇게 인식하는 교회의 장로들이 있다면 속히 회개하고 교회 갱신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교회의 부서장을 서로 돌아가면서 맡으면 좋을텐데... 아주 평범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교회의 구조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거의 20년 가까이 재무부장을 하셨어요. 제가 목사님께 건의를 드렸습니다. '재무부장을 바꿔야 하지 않나요?' 담임목사님은 곤혹해 하시면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바꾸긴 바꿔야 되겠는데... 저거 바꿔놓으면 큰 시험거리가 될텐데....' '교회가 장기간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안됩니다.' 거듭되는 건의에 결국 담임목사님은 큰 용기를 얻으셔서 모든 부서장을 바꾸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당회가 개최되었고 부서장들이 발표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재무부장에.....' 조용해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당연히 아무개 장로님이겠지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과 본인의 기대와는 달리 다른 장로님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순간 적막이 감돌았어요. 그리고 곧 바로 정적을 깨는 큰 함성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시는 교회의 일반적인 회의 모습이 마루 바닥에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임원회를 하거나 당회를 하곤 하였는데, 수십년 동안 아무 저항없이 재무부장이라는 섬김의 직분을 무슨 권력의 중심에라도 앉은 양, 왜곡된 모습으로 성도들과 목회자의 걸림돌이 되었던 그 분이, 성경, 찬송을 마루 바닥에 집어던지면서 '다들 해먹어라' 하며 소리치고는 획 나가 버린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제 큰일났구나. 이제 우리 교회는 큰 시험에 들었구나'하며 염려와 두려움으로 안절부절이었죠. 사실 그분은 헌금을 가장 많이 하는 분이었고, 그 당시에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고, 나이도 많은 집안의 어른이어서 모든 면에서 어른 노릇하기에 충분한 세상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 얼굴에도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어요. 하지만 그날 당회 이후, 그 교회는 매년 당회의 부서장을 바꿀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고 이젠 모범적인 교회, 건강한 교회의 길을 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때 제가 다짐한 것이 바로 교회 행정의 민주적인 제도화였습니다. '내가 단독 목회를 시작하면 반드시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해야 되겠다.....' 그리고 평안의교회가 개척된지 20년이 되는 동안 특별한 경우-교회 건축 기간동안에는 2년간-를 제외하고는 모든 당회의 부서장이 매년 자연스럽게 로테이션하면서 주님의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재무부장을 맡았다고 해서 그 분이 교회의 권력을 틀어쥐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만큼 우리 교회의 행정 구조는 편중되지 않은 건강하고 민주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재무부장 장로님이 재무 사역을 마치면 장부를 가지고 제게 오십니다. 담임목사실에 들어오신 장로님은 언제나 두 손으로 제게 장부를 보여주시고 결제를 받습니다. 저 역시 장로님이 제게 오실때면, 특별한 경우-전화를 받고 있을 때-가 아니면 어김없이 일어나 장로님을 반기며 두 손으로 장부를 받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장로님!'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저보다 연세가 높으십니다만, 나이를 떠나서 장로님들의 수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제겐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오늘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일반인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군중에게 주신 교훈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을 닮기 원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기 원하는 제자들을 앉혀놓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크냐?'라고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소위 서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는 것이 있어요.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나이를 왜 물어봅니까? 당신하고 나하고 나이를 확인해서 서열을 정하자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나이가 들어보이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덜 보이는 분이 계세요. 그런데 사실 보여지는 그 이미지만 가지고는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그럴수록 더 나이를 물어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리고 자기보다 나이가 하나라도 적을 양이면 '어, 나보다 동생이구만. 나 이제 말 놓겠네' 그리고 아주 즐거워하는 거예요.

군대 갔다온 남자들은 만나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있어요. '군번이 어떻게 되시나요?' 당신과 나의 군대의 서열을 한번 정해보자는 거예요. 학생들은 만나면 처음 물어보는 것이 있어요. '학번이 몇 번이지요? 몇 학번이시지요?' 이런 것들은 우리의 잠재된 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열을 정하고자 하는 우리의 잠재 의식을 잘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도 기본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지요. 서로를 알고자 하는 그런 차원에서는 좋은 인사가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동기가 서열을 정하겠다고 하는 동기라면 이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제가 부천 출신이 아닙니까? 고향은 마산이지만 부천에서 북초등학교를 나왔어요. 부천의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거기에 어느 장로님과 대화를 하는데 제가 부천 출신이라고 그러니까 '어, 그래요? 목사님, 그 학교 몇 년도 졸업하셨지요?' '저 몇 년도 같은데요' '어, 나보다 후배구만' 아주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동안 목사로서 은혜 받고 콱 눌려 있었는데 갑자기 생기가 돌더니 나보다 후배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이제는 말이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니고 이상하게 말하더라구요. 제가 속으로 '참 안타까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 생각이 '담임목사님이 무척 피곤하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덜 됐다는 얘기예요. 덜 된 사람 많습니다.

제자들이 사실은 그 주인공들이예요. 12명 밖에 안되는 제자들이 서로 서열을 정하는데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거예요. 아마 이렇게 서로간의 서열을 정하려고 그랬을 거예요. 12명 중에서 그래도 변화산상의 예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았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사람은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너희들 보다 높다'라는 말을 했을 거예요. 그런 말에 자존심이 상한 다른 제자들이 '그래. 그렇지만 나는 당신보다 은사 면에서 내가 더 커!' 그리고 또 반격을 했을 것입니다. 12명이 이런 저런 이야기로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다 보니까 토론이 아니라 논쟁이 되어져 버렸어요.

성경학교가 진행중인데 보통 중요한 행사를 마치고 나면 평가회를 하지요. 평가회를 하면서 다과회를 준비하고 '자, 이제 그동안 한 것 중에 우리가 다음을 위해서 우리가 좋은 의견들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꼭 잘못한 것만 가지고 계속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있지요. 10가지 중에 9가지는 너무 잘됐는데 그 잘못된 1가지만 가지고 계속 문제를 크게 만들어서 결국은 전체 분위기가 아주 어색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되어서 그 평가회를 주최한 지도자는 '괜히 평가회를 했구나' 그렇게 속상할 때가 있지요.

여러분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땅을 파놓은 그 작업터에 포장을 하지 않고 빗물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밟힘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종종 우리가 길을 가다보면 아스팔트가 푹 내려앉은 부분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수도나 가스 같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위에 포장을 해놓았는데 트럭이 지나가고 나면 푹 꺼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엉터리 공사를 했구만' 그렇지요. 내 집 앞에 공사를 해놓고 포장을 안해 놓으면 포장 안해서 비오면 질다고 불평하고, 빨리 그것을 포장해 주면 그것이 푹 꺼진 다음에 날림 공사했다고 시청을, 정부를 원망하는 우리들의 구조는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외국에 보면 공사를 해놓고 나면 그냥 놔둡니다. 흙을 묻어놓고 그냥 놔둬요. 푹 꺼지고 푹 꺼집니다. 또 흙을 메꾸고 또 흙을 메꿔요. 거기에 차가 다니고 사람이 밟고 비가 오고 그래서 많은 시간동안 그것이 다져진 후에야 자갈을 깔고 포장을 합니다. 보수 공사한 도로라고 해서 지반이 내려앉는 법이 없어요. 비판이란 내일을 위해서 오늘 다지는 일인데 다지자고 하는 이야기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어야지요. 아예 뒤집어 놓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이 제자들에게도 주님께서 '너희들이 쟁론하였다'라고 하는 표현을 쓴 것 보면 건설적인 비판의 자리는 아니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고 내가 너보다는 높은 서열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의식들을 서로가 감추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열이라고 하는 부분, 우리는 이것을 '서열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섬김을 받는 자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호칭도 우리는 바꿔야 합니다.

보통 당회가 열리면 그 당회를 주재하는 담임목사를 당회장이라고 그럽니다. 장로교회에서는 당회가 장로님들의 모임인 기획위원회를 의미하고 우리 감리교회는 당회가 세례교인 이상이 모인 장로교회 의회를 의미합니다. 거기서 당회장은 당회가 열릴 때에만 쓰여지는 호칭이예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도가 담임목사를 호칭하거나 목사 자신이 자신을 호칭할 때 당회장이라는 말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잘못된 호칭입니다. 그런 표현을 주로 쓰는 어느 교단도 깨어있는 각성하는 그룹들이 이제는 그런 표현을 쓰지 말자고 하는 운동이 생기고 있어요. '담임목사'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여러분, 청장년 남선교회 이런 지방 단체에서도 호칭에 대해서 좀 바꿔야 할 것이 있어요. 연합회 회장을 연합회 회장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인데 연합회 회장을 하고 난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 공문이 오는 것을 보면 '증경 회장' 증경 회장이라는 말이 좋아하는데 이거 아주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그룹에서도 이제는 쓰지 말자고 하는데 우리 감리교단은 그런 말을 안쓰는 교단인데도 어디서 그런 말들이 들어와가지고 그런 말들을 아주 잘써요. '증경회장'이 뭐예요? 절대로 그런 말 쓰면 안돼요. 그런 마치 담임목사라고 하는 좋은 표현을 두고 당회장이라는 말을 쓰기 좋아하는 것과 같아요. 그 의식 속에, 그 호칭에 대한 의식 속에 어떤 서열과 권력에 대한 의식이 가득차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해라'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섬기면 곧 나를 섬기는 거다. 너희가 나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일이다' 점진법을 사용해서 주님은 더 높여 주셨어요. 어린아이를 섬기는데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높여주셨고,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높여주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높여주시는 거예요.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분명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반드시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첫째가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비결을 오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라고 하는 이미지가 무엇인가요? 왜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 앞에 비유를 하셨습니까? 어린아이는 이해관계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이기심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셔도 그것이 이기심에 의한 것이라면 이해 득실을 따져서 나온 행동의 결과라면 그것은 첫째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언젠가 제안을 드린 적이 있어요. '여러분 장롱 속에 고이 고이 간직해 둔 부조금과 축의금 명단을 없애버려라' 청첩을 받고 나면 여러분이 축의금을 드리시지요. 친구의 딸이 결혼을 한다. 여러분이 3만원을 축의금으로 내십니다. 그 친구분은 예식이 끝나고 나서 그 축의금 명단을 볼 것입니다. '우리 친구가 3만원 했구나' 나중에 나의 아들이 장가를 들면 친구가 청첩을 받고 장부를 뒤집니다. '이 친구가 우리 딸 결혼했을 때 얼마를 했더라? 3만원 했구나' 3만원을 넣어서 축의금을 보냅니다. 여러분, 꼭 그렇게 해야 되나요? 친구의 딸이 결혼할 때는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3만원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내가 생활이 좋아졌으면 30만원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왜 그 장부에 얽매여서 그렇게 살아가느냐 그 말이예요. 그 축의금, 조의금 장부를 없애지 않는 한 우리는 매일 거기에 얽매여서 살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해 관계를 따지는 사회에서는 첫째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첫째가 될 수 없어요. 이기심을 넘어서 갈 때에 진정한 성도의 섬김, 제자의 삶이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주님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섬김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자 훈련을 받고 나서 목사님에게 질문합니다. '제가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종 취급을 받았을 때 그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주님의 제자가 된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종종 성도들, 특별히 섬기는 자리에 있는 분들이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뭐 종인가요?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어요.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섬긴다고 하는 일에는 육체의 피곤도 따라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때때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이 상한다고 나를 무시한다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고 하면 아직 나는 그리스도의 종의 자리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훈련을 많이 받았으나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에게 종이라고 하는 위치가 정해졌을 때 여러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여러분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예요. 그래서 일반 성도들 보다 집사님은 조금 더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법은 그것을 사람의 수로 정해주었는데 우리 집사님들은 5명 정도를 섬기는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권사님들은 10명 정도를 섬기는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님들은 장년 15명 정도를 섬기는 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15명 중에 하나를 뽑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의 직분과 여러분의 섬김의 정도를 가늠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5명 분의 섬김이 지금 실천되고 있는가? 나는 10명 분의 섬김의 정도를 실천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내가 교회에서 장로인데, 권사인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기분 나빠하고 마음이 상하는 분이 있다면 아직 그는 제자의 길에 들어서있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주시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여러분들의 삶 속에 진정으로 누가 크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때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하심 속에 머리가 되는 자임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 첫째가 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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